시인 정끝별. 그는 ‘아브젝시옹의 상상력’(‘파이의 시학’)을 말하고 융 학파의 심리학자 클라리사 에스테스가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에서 소개한 물개 여인과 외로운 사냥꾼 사이의 소생인 오룩으로부터 시의 위상을 읽어낸 바 있는 문학평론가이기도 하다. 오룩Ooruk은 태고적 아눌룩Annuluk이라는 마술사 할머니의 풍성한 흰 털 속에 묻혀 살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인 얼굴에 깊은 눈물 계곡이 패인 한 남자가 사냥을 나가 가죽을 벗어 놓고 목욕하는 아름다운 물개 여인들 중 하나와 결혼해 낳은 아들이다.

이 아들은 성인이 되어 어미의 물개 가죽을 찾아주고 그녀와 함께 물 속 나라를 다녀와 훌륭한 고수(鼓手)이자 이야기꾼이 된다. 시인은 시는 알지 못하는 데서 울려오기 때문에 시라고 말한다. 시인은 시의 의미는 열려 있기에 그 여백 또는 틈에 독자 스스로 찾은 의미를 채워넣어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인은 시를 잘 읽으려면 시가 시인 까닭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기는 수 밖에 없음을 역설한다.(‘詩心傳心’ 참고) 이 즐기는 수 밖에 없다는 말로 인해서인지 그의 ‘삼천갑자 복사빛’은 무거움과 가벼움이 절묘하게 섞인 언어들로 읽힌다. 이 시집의 특징 중 하나는 삼천갑자로 상징되는 긴 시간의 축적,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순간 또는 찰나의 포착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이 순간 또는 찰나는 때라는 말, 뿐이라는 말로 나타난다.

’늦도록 꽃‘에서 시인은 “앉았다 일어섰을 뿐인데”, “잠결에 잠시 돌아누웠을 뿐인데”, “가다가 뒤돌아보았을 뿐인데”라고 말한다. 그 짧은 순간에 꽃은 맘껏 벌어져 사태지고, 결국 금세 다 져버릴 것 같은 순간을 맞는다. 이 시집에 이 부분 외에 사태 진다는 말이 두 차례 더 나온다. “갈 수 없는 거 맞지?/ 봄바람에 사태 졌던/ 흰 꽃잎...”(’산사춘‘), “..둥둥/ 뿌리 뽑힌다는 거/ 사태 지고 두절된다는 거...”(’오래 된 장마‘)...

사태 진다는 말은 어떤 현상이나 움직임이 공간에 맘껏, 무수히 펼쳐진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짧은 시간을 나타내는 찰나, 순간 등과 대비되는 것이다. 이때 공간이란 시간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 시집에는 시간 또는 순간을 나타내는 말들이 풍성하다. 동안, 내내, 순식간에, 때마다, 때까지, 나왔을 때, 내려왔을 때, 그때까지, 높아질 때, 오십 년째, 사이, 순간, 잠시, 마악 한 발을 떼려고만 하면서, 흰 꽃가루가 피어날 즈음, 서귀포에 겨울비가 내리는 동안, 마악 발을 떼려 할 때마다, 아침마다 말간 바다 이슬이 맺힐 때, 눈이 감길 때마다, 안 보이는 것이 보일 때마다,

구름을 생각할 때마다, 종일, 너를 데려갈 때까지, 너를 부려놓을 때까지,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봄이 되어 새잎이 날 때까지, 바람을 일구던 마음이 주름에 겨울 때, 연리지(連理枝) 첫 움으로 피어날 때까지, 죽을 때까지, 길들이 하나씩 잘려 나갈 때마다, 큰 물이 거두어 갈 때까지, 빗방울이 화석이 될 때까지, 늪이 물이 될 때까지...주로 무엇 무엇 할 때의 형태로 나타나는 이 순간 또는 시간 표현의 명사는 풍성한 의미망을 형성한다. ’늦도록 꽃‘에서 앉았다 일어섰을 뿐인데, 잠결에 잠시 돌아누웠을 뿐인데, 가다가 뒤돌아보았을 뿐인데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음을 말한 시인은 ’상강‘에서 이런 말을 한다.

“서랍을 조금 열었을 뿐인데,

그늘에 잠시 기대앉았을 뿐인데,

너의 

숫된 졸참 마음 안에서 일어난 불이

제 몸을 굴뚝 삼아

가지를 불쏘시개 삼아

타고 있다

저 떡갈에게로

저 때죽에게로

저 당단풍에게로

불타고 있다

저 내장의 등성이 너머로

저 한라의 바다 너머로

이 화염으로

사랑아, 나를 몰아 어디로 가려느냐“

‘삼천갑자 복사빛’의 또 다른 특징은 언어의 창의적 사용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봄 야윔이라는 뜻의 춘수(春瘦), 다음의 인연이라는 뜻의 차연(次緣), 폐가(肺家), 폐허(肺虛), 춘풍낙엽 등의 새 언어. 쓰다(bitter)란 의미의 단어를 돈을 쓰고 머리를 쓰고 손을 쓰고 억지를 쓰고 힘을 쓰고 색을 쓰고 글을 쓰고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쓰고 관을 쓰고 등의 용례와 함께 쓴 것(시인은 밥이 쓰다고 한 뒤 마지막 연에서 목메인 밥을 쓴다고 말한다. 목메이게 밥을 넘기고 밥을 버는 현실에 대해 쓴다는 뜻이 아닐지?), 수구린다는 말을 수구(首邱)린다고 표현한 것, “창공의 공터에/ 동그랗게 입을 다물고 있는/ 가출한 동안(童顔)..”이라는 표현...

‘삼천 갑자 복사빛’은 이별의 안타까움을 노래한 시집이다. ‘어떤 자리’에서 모과가 거두어진(떨어진 것이기보다 꺾인이라고 해야 옳을) 사태를 말한 시인은 헤어짐의 짝을 노래한다. 몇 편의 시가 이에 해당한다. ‘연리지’에서 시인은 “...남아도는 네 슬픔과 내 슬픔이/ 한 그루 된/ 연리지 첫 움으로 피어날 때까지/ 그렇게 한없이 누워”라고 말한다. 연리지란 두 나무의 가지가 맞닿아 결이 서로 통(通)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자두 가지 끝을’에서 시인은 “누가 너를 부러뜨렸을까/ 꺾인 자두 가지의 두 몸이 삐걱, 삐걱/ 질긴 가지 껍질에 오래 매달려 있다....부러진 자두 가지의 몸이 툭, 툭/ 살아 있는 자두 가지의 몸에 부딪힌다/ 비야 바람아, 내가 매달린 이 가지 끝을/ 마저 분질러다오!”라고 말한다. ‘가지에 가지가 걸릴 때’에서 시인은 “...한줄기에서 난/ 차마 무너지지 못한 마음과/ 차마 보내지 못한 마음이/ 얼마 동안을 그렇게 엉켜 있으리라/ 서로가 덫인 채/ 서로에게 걸려 있으리라// 엉킨 두 마음이 송진처럼 짙다”고 말한다.

‘어떤 자리’에서 “어떤 손이 모과를 거두어 갔을까/....”라고 말한 시인은 ‘사과 껍질을 보며’에서 “떨어져 나오는 순간/ 너를 감싸 안았던/ 둥그렇게 부풀었던 몸은 어디로 갔을까...붉은 사과 껍질은/ 사과의 살을 놓치는 순간 썩어간다/ 두툼하게 살을 움켜쥔 채/ 청춘을 오래 간직하려는 과즙부터 썩어간다...”고 말한다.

시인은 시집에 다양하게 등장하는 나무의 가지를 빌어 이별을 슬퍼하는 시를 완성해간다. “꽃의 눈이 감기는 것과/ 꽃의 손이 덩굴지는 것과/ 꽃의 입이 다급히 열리는 것과/ 꽃의 허리가 한껏 휘어지는 것”을 “오뉴월 불 든 사랑”이라 표현하는 ‘여름 능소화’의 관능미는 ‘살구꽃이 지는 자리’에서 살구나무의 시어를 빌려 사랑의 아름다움과 이별의 애틋함, 그리고 기다림의 결연함을 표현하는 절창(絶唱)의 시로 표현된다.

“바람이 부는 대로

잠시 의지했던 살구나무 가지 아래

내 어깨뼈 하나가 당신 머리뼈에 기대 있다

저 작은 꽃잎처럼 사소하게

당신 오른 손바닥뼈 하나가 내 골반뼈 안에서

도리 없이 흩어지고 있다

살구 가지 아래로 부러진 내 가슴뼈들이

당신 가슴뼈를 마주보며 꽃 핀 자리

한 잎 뺨 한 잎 입술 한 잎 숨결

지는 꽃잎도 저리 인연의 자리로 쌓이고

문득 바람도 피해간다

누구의 손가락뼈인지

묶였던 매듭을 풀며 낱낱이 휘날리고 있다

하얗게 얼룩진 꽃 그늘 아래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부쳐준 오래된 편지 한 장을 읽으며“

‘개미와 꿀병’과 ‘봄 늦바람’의 유쾌한 발상, 승화된 형태로 나타난 ‘봄 꿈’의 비장함, ‘가을 편지’의 장황한 익살 등이 눈에 띄는 가운데 시간적으로는 봄, 생명체로는 나무와 꽃들, 정서로는 이별의 애잔함이 주조를 이루는 ‘삼천갑자 복사빛’은 일관(一貫)과 변주(變奏)의 조화가 돋보이는 시집이다. 식물의 상상력, 사이의 시학이라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