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한 시각에 옛 생각이 나 장석남 시인의“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이라는 시집을 찾아 본다. 장석남 시인의 시 가운데‘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이란 제목을 가진 시는 없고‘ 옛 노트에서’란 시에“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란 표현이 있다.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시간을 저녁이라 할 수 없겠지만 지친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간신히‘란 말은 저녁을 지칭하는 듯 보인다.‘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란 시집에는 옛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시들이 많다. 1995년에 나온 시집임을 감안하더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시집에 실린‘어스름’이란 시에 나오는 시어 중 레코드 가게라는 시어가 그렇다. 불현듯 옛 생각에 빠지게 하는 이 레코드 가게는 아무래도 LP 음반을 파는 곳이리라. 참 많은 레코드 가게를 들락거렸던 나로서는 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안타까움을 부르는 것을 그냥 지켜본다. 하기야 그것이 어디 나만의 일이겠는가.‘격렬비열도‘란 시를 펴본다. ”드뷔시의/ 기상 개황 시간/ 나는 툇마루 끝에 앉아서/ 파고(波高) 이 내지 삼 미터에/ 귀를 씻고 있다“란 표현이 담긴 시이다. 이 시는“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라는 박정대 시인의‘음악들’과는 정서면에서 다른 듯하다. 하지만 상상력 면에서는 ”바닥에 음표처럼 담쟁이 잎 몇 개 떨어져 있“다는 장석남 시인과,“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라는 박정대 시인은 한 곳으로 수렴하는 듯하다.(두 시인은 같은 해에 태어났다.)

드뷔시의 기상 개황(槪況) 시간이란 무슨 뜻일까? 드뷔시의 ’바다‘란 곡이 바람과 파도로 대표되는 바다의 이미지를 지닌 것임은 알겠는데...’바다‘는 1부 바다의 새벽에서 정오까지, 2부 바다의 희롱, 3부 바람과 바다와의 대화 등 3악장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드뷔시는“자유로운 악상으로 바다의 역동성을 들려”주었다는 평을 받기도 하고“달빛이 나뭇잎을 애무할 때 들리는 수천의 이름 모를 소리들”(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김성현 씀 월간 ’예술의 전당‘誌 2008년 7월호 참조)을 묘사했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에게서 암시받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슬프고 아스라한 베토벤의 달빛(피아노 소나타 c # minor)과는 다른 세련된 인상주의적인 낮달인지도 모르겠다.

장석남 시인에겐 달에 관한 남다른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연못을 파서‘란 시에서 시인은“연못을 파서/ 지나가는 낮달의 발자국을 만들어줄 때/ 내 등허리를 파내려오는 허구렁들을/ 나는 삼킬 수 밖에 없네// 처마에 매달아놓은, 연못 물을 종일/ 퍼내고 있는 풍경(風磬) 소리/ 一生을 거기에 다 바치고 있네..”란 시어를 선보였다. 그리고 산문집 ’물의 정거장‘에서는“바슐라르의 책인가를 읽다가 ’낮달은 하늘에 뚫린 구멍‘이라는 구절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책에 실린 ’여로‘라는 글에서는 ”달이 물을 먹은 걸 보니까 비가 오겠구나.“란 한 할아버지의 말을 들려주었다. ’물의 정거장‘이란 글에서는 ”나는 자연스럽게 물이 차고 빠지는 일은 달이 하는 마술이라는 생각을 했다. 물이 빠져나간 긴 해안을 참방거리면서 걷고 있으니 마치 내가 지금 달의 길을 걷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글의 끝에서 시인은 ”오늘 같은 날은 드뷔시를 듣기에 좋은 날.“이란 말을 한다. ’격렬비열도‘에는 금성 라디오라는 시어와 (요즘 라라 크래커는 왜 안 나오지?)란 시어가 있는 것을 보아서 저자가 그런 현대 음악적 분위기에 초점을 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금성 라디오, 라라 크래커 모두 이제는 지난 시대의 유물이다. 요즘 무엇 무엇은 왜 안 나오지란 시인의 어법을 따라 나는 요즘 루빈스타인의 멜로디 F minor는 왜 저녁 FM 음악 프로그램 시그널로 안 쓰이지, 라고 혼잣말을 해본다. 저녁 노을이 고운 어느 퇴근길에 듣던 이 음악은 아스라한 추억을 선사한다.”정오가 되면 성공회쪽 담을 넘어 종소리가 들린다. 시내의 한복판에서 듣는 종소리는 일종의 슬픔과 같은 것이었다..“는 김용범 시인의 시(제목도 기억에 없고 시집은 절판된 듯한 시.. 따라서 행갈이 없이 산문처럼 옮길 뿐이다.)가 정오와 연결되는 것처럼 루빈스타인의 멜로디는 저녁 무렵에 어울리는 음악인 성무일도(聖務日禱)와 어울린다.

의식(儀式: ceremony), 절<拜: courtesy>, 일상의 의무(義務: sense of duty) 등의 의미를 가진 얀 가바렉과 힐리아드 앙상블의 ’officium’이 실험적이고 재즈적이라면 루빈스타인의 멜로디는 서정적이고 순하다. 달빛,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이 조용미 시인이다. ”숲은 팽창하고, 달은 차오른다/ 푸른 달을 한 입 베어 물면/ 사람 아닌 무엇이 속에 들어서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아아 비명을 지르게 된다.“(‘푸른 달을 한 입 베어 물면’), ”자미목 붉은 꽃들 위로/ 상현에서 하현까지의 달이/ 까맣게 떠올랐다// 붉은 꽃들의 자궁에서 피어나/ 달은/ 세상을 온통 뜨겁게 물들이고 있었다.“(‘달과 배롱나무’), ”초사흘 달처럼 고독한 삶/ 겨울 들판을 나는 기러기처럼,/ 치지 못하는 기타 줄처럼/ 고독한 삶“(’푸른 창문들‘),

”달빛은 눈 위에 유리 조각처럼 잘게 부서져 흩어졌다/ 그때 달빛은 위험했다.“(’맹점‘), ”끝없이 팽창했다가 수축하고 다시/ 그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이 우주는/ 해와 달이 반반인 세계“(’물고기자리의 새‘), ”반쯤 찬 달에 어두운 바람이 불었다/ 달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눈에 붉은 금이 그어졌다“(’고흐의 저녁 산책‘), ”섬의 동쪽과 서쪽은 죽음과 삶만큼 닮아 있고/ 또 빛과 어둠처럼 달랐다/ 동쪽에서는 검은 달이, 서쪽에서는 흰 달이 떠올라/ 두 개의 달이 머리 위를 지나기도 했다“(’검은 달, 흰 달‘), ”그들이 해를 쫓아 동쪽으로 달려갈 때 나는/ 측백처럼/ 서쪽을 향해 걸어갔다// 서편은 달이 기우는 곳/ 붉은 해가 기우는 곳/ 붉은 해가 현의 가장 낮은 음으로 스러지는 곳/ 별들이 고단한 몸을 누이는 곳“(’어둠의 집의 기록‘),

”달빛이 물밀 듯 방 안으로 들어오는/ 조그만 방을 하나 가지고 싶다/ 그 방에 유허재(幽虛齋)를 옮겨가도 좋으리라“(’큰고니‘), ”바람이 천년수를 만나러 내려오는 밤이면 오층석/ 탑 위로 폭우 같은 달빛이 쏟아진다 석탑 위로 비단/ 같은 모래가루가 떨어져 내린다“(’만일암터‘), ”옥이 품은 빛, 옥빛은 어디에서 왔는가/ 옥은 햇빛이 아닌 달빛의 자장가를 들으며 자랐고“(’곡옥’),“북쪽은 밤의 숲에서 보는 달처럼 얼룩이 많다/ 모든 색은 자주 어두웠다 밝아졌다 한다// 묵은 황금빛으로 이루어진 풍경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이상하고 야릇하였다/ 나는 여전히 북쪽을 선호한다”(‘미학적 인간에 대한 이해’) 등등...

시인이 노래한 달은 지구의 위성(衛星)인 자연(自然)이고 아픈 몸을 표현하는 매개체이고 해와 대비되는 어두움과 쓸쓸함의 상징이다. 달이 뜨는 쪽으로, 아픈 곳으로 가고 싶어 하는 시인의 바람을 읽을 수 있겠거니와 어느 덧 달은 자신의 방에 가득 들어차기를 기다리는 텅빈 충만함을 표상하며 불가능한 현상을 일으키는 주체가 되기도 한다.(“두 개의 달이 머리 위를 지나기도 했다.”) 우주는 해와 달이 반반인 세계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세계의 정확한 시간적 나뉨이고 차고 기우는 전전반측(輾轉反側)의 세계이다. 그런데 시인의 산문집인‘섬에서 보낸 백년’의 첫 문장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내 앞에는 오후 다섯 시의 낮달이, 내 뒤엔 붉은 해가. 내 옆에는 차가운 겨울 바람이.”이다. 이 것 말고도 이 산문집 곳곳에는 달이 얼굴을 보이고 있다.

“밤바다에 둥근달이 떴다. 옥상은 달을 보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비가 오고 며칠 흐려 달을 보지 못한 사이에 보름을 막 넘긴 달이 커다랗게 떠 바다에 넓고 환한 길을 하나 만들었다. 오늘밤엔 또 달이 만들어낸 바다의 길을 본다. 거기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달을 시어로 한 조용미 시인의 여러 시편들은 시인의 개인사와, 여성성을 상징하는 달을 하나로 연결하지 말 것을 가르친다. 달에 대한 시인의 남다른 관심을 우려의 눈으로 볼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달을 여성성과 연결시키지 않고 다양하게 상징화한 것에 마음을 열 필요가 있다. 일상에서 달은 어둡고 쓸쓸한 시어이지만 시인은 달이란 시어를 통해 때로 현실 이상의 의미를, 때로 추상적 세계관을, 때로 고요하고 아늑한 세계를 , 때로 여성성을, 때로 아픈 몸을 지시함으로써 풍요로운 세계를 현시(顯示)했다.

윤후명 작가의 단편‘강릉/ 모래의 시(詩)’에 나오는 구절을 읽어본다.“초생달 역시 보름달에서 그믐달로 변해가는 모든 달의 전존재이다.”(소설집 ’꽃의 말을 듣다‘ 수록: 3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