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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은 재현(再現), 표상(表象) 등을 뜻한다. 재현과 표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존재(存在)를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존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철학자가 바로 플라톤이다. 그는 변하지 않는 것도 있고 변하는 것도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진짜 존재하는 것은 단 한 번도 바로 그것으로 고정되지 않고 매순간 다른 것이 되는 것이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생각과, 진짜 존재하는 것은 변하지도 운동하지도 나눠지지도 않는 단 하나의 것 즉 일자(一者)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생각을 결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재현이라는 말의 어의(語義)가 다시 드러나게 한다는 뜻이니 단 한 번도 바로 그것으로 고정되지 않고 매순간 다른 것이 되는 것을 다시 나타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재현이란 곧“현상(現象)에 대한 부정, 현상 뒤의 실체나 본질에 대한 믿음“(29 페이지)을 내포할 수 밖에 없다.

앞에 불러 세움을 뜻하는 독일어 vorstellung으로 잘 알려진 표상 역시 주체가 대상을 자신 앞으로 호출하고 그것에 대응하는 어떤 상(象)을 대리인으로 내세움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는 무상(無常)한 흐름을 포착할 수 없고 하나의 통일된 상으로 정지(停止)시키는 방식으로만 대상을 지각(知覺)할 수 있다.(31 페이지) 재현의 사고는 인간이 영원하고 불변하며 완전한 이상을 설정함으로써 현실로부터 달아나거나 현실을 망상으로 뒤덮는 데서 시작된다.(8 페이지) 재현의 사유는 어떤 개념을 일반화하고 이를 원형(原形)으로 삼아 세계를 이해하고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다.(26 페이지) 재현의 논리 속에서는 무엇인가를 매개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참된 세계에 가 닿을 수 없다.(35 페이지) 재현은 뭔가를 닮게 하는 것이 아니라 원본의 절대적 권력을 회복시키는 것이다.(37 페이지)

저자는 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모방, 비(非)재현적 모방을 이야기한다. 저자가 비재현적 모방의 예로 거론한 사람이 벤야민이다. 벤야민은 미메시스(모방模倣) 능력을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으로 정의했다.(40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재현적 모방이 닮음을 위한 닮음이고 무엇인가에 대한 닮음이라면 비재현적 모방은 새로워지기 위한 닮음이고 배움으로서의 닮음이며 닮지 않은 닮음이다. 재현의 삶에 대립되는 것이 동사(動詞)로서의 삶이다. 주어진 것을 재생하고 반복하는 것, 주어진 삶을 향해 매진하는 재현의 삶과 달리 동사로서의 삶은 주어진 것을 넘어 예기치 못한 것을 생산하는 삶이다. 이는 생성과 변이, 창조를 가능케 하는 분열의 의미를 강조한 펠릭스 가타리의 철학을 연상하게 한다.

되기(becoming)의 철학 역시 동사로서의 삶을 연상하게 한다. 되기의 철학에 의하면 정체성은 규정된 것이 아니라 소통과 접속에 따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재현의 논리에 관건으로 작용하는 것은 유사성이다. 그 유사성의 논리로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 환상이고 광기가 되었음을 보여준 책이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이다, 돈키호테는 단지 책을 많이 읽었을 뿐 아니라 읽은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은 사람이다. 유사성은 르네상스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규정했다. 반면 차이와 동일성은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규정했다.‘소설의 이론’의 앞 부분을 장식한 루카치의 탄식은 재현 논의에 중요한 참조점을 제공한다.“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는 모든 것이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데, 왜냐하면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별들이 발하는 빛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란 루카치의 탄식은 근대 자본제를 넘어선 세계, 황금시대를 그리는 탄식이다.

문학 평론가 방민호 교수에 따르면 현대는 밤하늘의 별빛에 상응하는 것들이 길을 잃은 시대이다. 문제는 치유이리라. 현대비평은“확실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이 문명의 질병적 상태를 정확히, 깊이 파악하여 새로운 구원의 가능성을 찾아나가는 치유의 비평이 되어야 한다.”는 방민호 교수의 처방은 의미 있게 읽힌다. 문제는 본질과 원형은 무조건 나쁜 것인가, 란 점이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또는 잃지 말아야 할 본질과 원형은 당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총체성 상실과 관련된 루카치의 탄식과 반(反)재현 논의의 범주가 얼마나 공명하는지 알 수 없지만“별(총체성)이 빛을 잃어서인지 저마다의 빛들이 찬란해서인지, 이제 별빛이 하나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총체성으로서의 보편이 너무 낡은 개념이라고 판단하는 자들의 대답은 둘 중 하나이다. 여럿이거나 없거나. 그러나 저마다의 별빛을 하나의 작품 안에 담아야 하는 작가는 쉽게 답할 수 없다.”는 차성연의 논의는 주목된다.(2010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작‘특수한 보편, 무수한‘이야기’들의 겹침 - ‘김연수론‘에서 인용) 그러나 요는 저마다의 별빛을 하나의 작품 안에 담아야 하는 작가 뿐 아니라 총체성 또는 재현에 관심을 둔 사람은 예의 그 별빛에 대해 논의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저자에 의하면“ 동일성으로부터 차이를 구출하는 것, 윤곽을 지우고 색채를 흘러넘치게 하는 것, 이것이 재현의 논리로부터 달아나는 방법이다.”(76 페이지) 저자는“안일하고 익숙한 재인(再認)이 아니라 낯설고 고통스러운 사건의 의미를 찾기 위한 고투(苦鬪)야말로 새로운 사유, 새로운 삶의 출발점“(80 페이지)이라 말한다. 재현에 대한 문제제기는 실존적인 의미로 여겨진다. 저자는 선문답을 이야기한다. 저자에 의하면 선승(禪僧)들이 종종 제자들의 질문에 동문서답을 하거나 몽둥이를 든 것은 그들의 잘못된 질문을 깨기 위한 것이다.(27 페이지) ’덕산방 임제할(德山棒臨濟喝)’이라는 말과 ”부처란 마른 똥막대기“, 그리고 ”부처란 삼(蔘) 세 근“ 등의 말을 생각해 보자. 저자는 선문답은 질문과 답이 아니라 질문을 부수는 행위들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81 페이지) 선불교란 중국 불교인데 그간 나는 초기 불교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물론 나에게 선문답은 작위적인 어떤 것이었다. 하지만 한 번쯤 달리 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그리스 민주주의의 세 가지 특징인 범우주적이고 범도시적인 초월적 기준을 거부하는 토착성, 사랑, 견해(doxa)가 서양에서 철학의 탄생과 발전 조건을 형성했다.”재현 의지 즉 본래적인 것과 그것의 사본(寫本), 모델과 환영, 진리와 비진리를 구분하려는 의지는 현실을 한없이 비하하고 현실 너머의 완전한 세계를 상정함으로써 지금 여기서 낯설고 새로운 힘을 창조하려는 모든 실험들을 묵살한다.“(87 페이지) 이 부분을 읽고 다시 루카치를 사유해 보자. 루카치는 바로 재현 의지가 말살하려 한‘지금 여기’에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 분투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루카치의 사상과 반재현 논리의 공명 여부를 놓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저자가 말했듯 근본적으로 재현 행위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고정된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은 재현의 필요조건들인 재인(再認), 동일성(同一性) 등을 버리고 나면 어디서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이는 언어라는 표상 없이 어떻게 사유하며, 동일성 가정 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물론 표상 없이 사유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동일성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약속하거나 의지할 수 없다. 하지만 표상의 한계를 자각하고 동일성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동일성을 출발이 아니라 결과로, 즉 변화와 관계 속에서 도출되는 일관된 리듬으로 사유한다면 동일성이라는 망상에 빠지지 않고서도 자신의 의지를 삶에 관철할 수 있다.(106 페이지) 언어표상 역시 진리의 표상으로서가 아니라 깨달음이라는, 존재의 혁명적 전환에 이르는 방편(方便)으로 사고한다면 재현의 세계를 넘어서는 출구로 기능할 수 있다.(106 페이지)

저자는 베르그손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시간관을 비판했음을 지적한다.(117 페이지) ”똑딱똑딱 일정한 움직임으로 표상되는 시계적 시간의 이미지는 점과 점 사이의 거리를 시간으로 환원하는 오류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베르그손은 자신의 철학을 ”시간이 존재하고 그것은 공간에 속하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이런 ”시간의 관점에 설 때 현재는 언제나 지나가고 있는 흐름이며 수학적 점과 같은 것이 아니다.“(황수영 지음‘물질과 기억, 시간의 지층을 탐험하는 이미지와 기억의 미학’207 페이지) 베르그손에게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운동과 변화이며 오히려 고정된 형태야말로 변화의 순간적 외양일 뿐이다.”(황수영 지음‘물질과 기억, 시간의 지층을 탐험하는 이미지와 기억의 미학’318 페이지) 베르그손에게 입자(粒子)란 완전하게 공간화되지 않는 운동이 어느 정도 공간적으로 응축되어 있는 것, 시간의 흐름이 어느 정도 지연(遲延)되어 있는 것에 불과하다.(이정우 지음‘담론의 공간‘ 256 페이지)

베르그손은“의식의 개입을 공간의 한 좌표롤 환원시킴으로써 고전적인 의미의 객관화를 완성시“킨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는 ”강력한 비판을 제기“했지만 그의 ”만년(晩年)에 성립한 양자역학에는 커다란 경의를 표“했다.(이정우 지음‘담론의 공간‘ 257 페이지) 베르그손은 많은 비슷한 이미지들이 계속해서 나타날 때 우리는 그 모든 이미지들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지각하지 못함을 지적했다. 베르그손은 이 중간적 이미지들을 우리가 사물의 본질이나 실체라고 착각한다고 말했다. 베르그손은 우리가 운동이라 부르는 것은 흐르는 실재 속에서 순간적 이미지를 절단하여 실체화한 뒤 그것들을 연속적으로 이어붙여 움직이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라 지적했다. 베르그손은 그것을 영화적 환상(幻想)으로 규정했다.

물리학자 소광섭 교수는 물체 중심의 사고에 바탕한 고전역학적 세계관에서 사건 중심의 세계관으로 전환해야 상대성 이론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을 하며 사건 중심의 사고란 이 세상에 물체가 실재해서 사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아닌 찰나생 찰나멸하는 사건들의 집합이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을 이해, 수용하는 것이라 말한다. 일상적 예로 물체 중심의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텔레비전 화면상의 한 점에 밝은 점이 얼마간 있다가 사라지는 것을 그 점에서 빛이 발생하는 사건이 계속 일어나는 것으로 보지 않고(못하고) 밝은 점이 생겨[生] 있다가[住] 멸[滅]하는 것으로 본다. (’물리학과 대승기신론‘ 22, 23 페이지)

저자는 ”존재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존재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존재를 존재케 한다.“는 말을 한다.(’재현이란 무엇인가’113 페이지) 사정이 이렇기에 우리의 논의는 수행적(修行的)이고 실존적이다. 앞서 말했듯 재현에 대한 문제제기는 실존적인데 실존이란 ”인간 존재의 내적인 무한성”(조광제 지음‘존재란 무엇인가‘ 118 페이지)이다. 내적인 무한성이라는 말은 것을 함축한 말인 듯하다. 저자는 시뮬라크르를 이야기한다. 플라톤이 제거해야 할 악(惡)으로 규정한 시뮬라크르는 원본(이데아)의 복사본인 현실(現實)을 모방한 복사본의 복사본 즉 하찮은 가짜이다. 하지만 이 규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시물라크르는 본질과 대비되는 현상(現象)도 아니고 실재에 반하는 가상(假想)도 아니다. 그것은 니체적 의미에서 실재성의 근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세상에 유토피아는 없다. 다만 파라다이스 즉 낙원은 있다. 스피노자는 현실 밖에 초월적인 시공간을 상정하는 순간 현실적 지평 위에서 자유와 해방의 힘이 부정된다는 이유에서 유토피아를 부정했다.

이로써 철학자 토드 메이가 ’질 들뢰즈‘에서 신성한 삼위일체로 규정한 스피노자, 베르그손, 니체가 모두 호명되었다. 저자는 재현을 넘어서는 것과 인간을 넘어서는 것은 동일한 문제라고 말한다.(136 페이지) 저자는 모든 것은 지혜의 증오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들뢰즈의 논의를 소개하며“철학은 차라리 진리라는 유토피아에 대한 혐오로부터 시작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란 말을 한다.(139 페이지) philo - sophy가 아닌 miso - sophy이고 philo - art가 아닌 miso -art! 저자가 비재현의 사유와 예술에서 강조하는 것들은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것들, 의외성을 지닌 것들이다. 재현적 예술과 비재현적 예술의 차이는 형식이 아니라 그것들이 열어놓고 있는 의미의 틈새에 있다.(150 페이지)

라깡으로 하여금 나는 생각하지 않은 곳에서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는 생각을 하도록 한 에드가 앨런 포의 ’도둑 맞은 편지‘는 열린 구조와 의외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저자는 이를 잠재적인 것의 존재방식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로 규정한다. 가능성은 실현된 것을 통해 유추될 뿐이지만 잠재성은 무언가가 현실화될 수 있었던 차이를 보게 해준다.(153 페이지) 앞서 사건의 철학을 이야기했는데 사건은 두 가지 측면으로 나뉜다. 하나는 연장적(延長的) 성격을 가진 관계들의 총체이며 다른 하나는 매 순간 분출되는 새로움으로서의 창조적 역동성의 발현이다. 전자는 공간이고 후자는 시간이다.(송희식 지음 ’존재(存在)로부터의 해방‘ 117, 118 페이지)

재현은 이 우글거리는 잠재성의 평면을 사유하지 않는다. 반면 (참다운) 예술은 드러난 것을 관조하고 반영하는 행위가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것을 펼치는 행위, 세계의 잠재성을 현실화시키는 행위이다.(156, 157 페이지) 모든 진정한 작품은 하나의 새로운 발견이다.(158 페이지) 이 정의(定義)는 예술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자신만의 교유한 관점과 새로운 사유가 필요함을 느끼게 한다. 저자는 동시에 독자나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술작품 자체가 하나의 두루마리와 같다고 말한다.(15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예술작품의 의미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에도, 그것을 해석하는 주체에게도 속해 있지 않다. 작품의 의미는 예기치 못한 공간을 펼치는 두루마리 그림처럼, 혹은 물이 닿으면 나무의 형상으로 펼쳐지는 일본종이처럼, 관객과의 마주침을 통해 생성(生成)된다.

예술작품은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표현된다.(159 페이지) 이 부분이 떠올리게 하는 것은 주름이다. 동일성을 기반으로 하는 축(軸)과 차이를 기반으로 하는 축이 교차해서 만들어진 좌표계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주름이다. 다양태는 그 주름을 가진 것이다. 다양태들이 만나 서로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서로가 자아내는 파동(波動)이 그 내부에까지 파고들어 떨림의 방식, 즉 주름짐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일체의 것들을 다양태로 보는 것은 언제든지 서로가 파동을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그 내부의 구조를 바꿀 수 있음을 의미한다.(조광제 지음 ’철학 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사전‘ 296 ~ 298 페이지) 지기보존 의지로 해석되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는 하나의 다양태가 가능하면 동일한 떨림과 파동을 시종여일하게 자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저자가 말한 사람의 마음에도 주름이 생긴다는 말은 멋지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동료의 배신, 시대의 억압과 광기 뿐 아니라 인생을 뒤바꾼 책, 벗과의 만남, 스승의 가르침 등은 나의 심신(心身)에 주름을 새긴다.“(160 페이지) 주름은 재현하지 않고 표현한다. 들뢰즈는 플라톤이 ’국가‘에서 언급한 두 종류의 사물 즉 정신을 평온하게 하고 사유를 활동하지 않게 내버려두는 사물과, 사유에 재료를 주고 사유를 발생시키는 사물 가운데 후자를 기호로 규정한다.‘프루스트와 기호들’의 초반부에서 들뢰즈는 기호를 근원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해석에 나서도록 강제하는 폭력적인 힘이라 정의했다. 들뢰즈의 기호와 같은 칸트의 숭고(崇古)는 이성의 요구와 상상력의 힘 사이의 불일치가 만들어내는 것으로 상상력은 사막이나 산 같은 광활한 대상이나 폭풍, 화산 같은 강력한 대상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다.(162 페이지)

예술적 기호의 의미는 객관적 대상으로도 주관적 연상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미지의 세계의 펼쳐짐이다. 이는 사랑의 의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사랑받는 사람에게도 있지 않는 것과 같다.(164 페이지) 이는 또한 소리가 사물에 들어 있지 않은 것과 같다. 이는 산에서 풀을 베어내고 밭을 만들던 백장(白丈)의 학인(學人) 향엄(香嚴)이 땅에 있던 돌을 캐어 내던지다가 대나무를 맞혔을 때 난 소리가 돌에도 대나무에도 없었고 다만 새로운 창조성이 생성된 것과 같다.(오경웅 지음‘선학의 황금시대’ 258 ~ 260 페이지)

들뢰즈는 구상(具象)에 연연하지도 않고 추상(抽象)의 논리로 빠지지도 않는 제 3의 길을 프란시스 베이컨에게서 암시받아 형상(figure)으로 개념화했다. 베이컨의 형상은 동일성을 재현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재현 불가능한 힘 또는 생성 중인 어떤 것을 표현하는 이미지이다.(169 페이지) 들뢰즈에 따르면 구상적인 것이 한 사물의 요소들 사이의 관계가 다른 사물의 요소들 사이의 관계로 직접 넘어서는 생산적 닮음이라면, 형상적인 것은 자신이 재생하도록 되어 있는 관계들과는 전혀 다른 관계들의 결과처럼 느닷없이 나타나는 생산된 닮음이다.(170, 171 페이지) 느닷없이 나타나는 생산된 닮음의 예로 들 수 있는 것은 세잔의‘인간 이전의 풍경’과 베이컨의‘인간 - 고기’이다. 베이컨은 ”나는 항상 도살장과 고기에 관련된 이미지에서 매우 충격을 받았다. 나에게 이런 이미지는 십자가형의 모든 것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말을 했다.(서동욱 지음‘일상의 모험’190 페이지)

베이컨이 받은 충격은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감응(感應: affect)에 해당할 것이다. ”습관적 기억에 의존하는 감정작용과 달리 감응은 신체의 역량을 증가 혹은 감소시키며 이를 통해 정신은 자신의 신체나 신체의 일부에 대해 이전보다 더 크거나 작아지게 하는 실존적 힘을 긍정하게 된다.“(스피노자 지음‘에티카’참조, 채운 지음‘재현이란 무엇인가’177 페이지) 기호들은 감응들 즉 역량의 모호한 변이(變異)들을 지시한다. 크리스테바, 프로이트, 바타유, 들뢰즈, 라깡, 메를로 퐁티 등 여섯 사상가들의 세잔론인‘세잔의 사과’(전영백 교수 지음)를 통해‘재현이란 무엇인가’에서 만난 들뢰즈의 사상을 확인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런데 나는 이 가운데 메를로 퐁티의 세잔론이 가장 마음에 든다. 메를로 퐁티는 가시적인 것은 우리의 시각을 결정(決定)짓는 존재의 덩어리가 아니라 상상적인 세계의 심연(深淵)에서 들어 올리는 화석(化石)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시각은 비시각적 가능성과 잠재력을 딛고 부상하는 가시계의 결정(結晶)이라는 것이다.(‘세잔의 사과’340 페이지)

현상학자인 메를로 퐁티는 두 공간 사이의 이중성과 상호작용 즉 강압과 이완, 상호성과 경쟁, 결정된 위치 사이의 공간의 유출과 흐름을 상정한다.(‘세잔의 사과’342 페이지) 메를로 퐁티에게 공간성이, 지각하는 자와 지각되는 것 사이의 적극적 상호개입(‘세잔의 사과’342 페이지)의 결과로 나타나는 창조적인 것이니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감응과 연결될 것이고, 들뢰즈적 의미에서 형상적인 것(자신이 재생하도록 되어 있는 관계들과는 전혀 다른 관계들의 결과처럼 느닷없이 나타나는 생산된 닮음)과 가까워 보인다. 예술적 행위는 되기로부터, 공감으로부터 시작된다.(‘재현이란 무엇인가’182 페이지) ”나는 무엇이다”라는‘무엇이기’는 마음과 신체의 다양한 변용 가능성을 경직시키는 것이다. 반면 변용 능력으로 규정 가능한‘되기’는 소수자의 덕행(德行)이다.(신승철 지음‘에코소피’102 페이지)

장애인 되기가 장애인 입장에서 느끼고 공감하는 것이라면 동물되기는 말 못하는 동물들의 입장에서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간 이외의 생명체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느끼는 것이다. 소수자 되기는 신체의 변용능력을 증가시켜 그들의 삶을 피부로 느끼는 실천을 할 수 있도록 늘 열린 자세를 갖자는 것이며 그러한 변용을 통해서만 그들과 정신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신승철 지음‘에코소피’110 페이지) “~ 되기는 주체를 거부한다. 아니 망각한다. 모든 개체는 어떤 불변의 실체로서가 아니라 특정한 조건(인연의 장)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표현될 뿐이다.”(‘재현이란 무엇인가’184 페이지) 되기는 속도의 문제인데 관건은 빠른 속도가 아닌 다양한 속도를 가지는 것이다.(‘재현이란 무엇인가’185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예술은 무언가를 벼리고 만들어냄으로써 세계의 비의(秘義)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재현의 세계를 넘어서는 것인 예술이란“아직 펼쳐지지 않은 세계의 주름 하나를 쳘쳐내는 것”이고“아프리카의 대장장이처럼 사물들의 비의 하나를 드러내는 것, 그와 동시에 아(我) 안의 비아(非我)를, 잠재적 차이를,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현실화하는 것, 끊임없는 ~ 되기를 통해 사는 것, 유토피아를 꿈꾸는 대신, 이 세계 속에서 또 다른 세계를, 또 다른 개념을, 또 다른 자신을 창안하는 호모 파베르가 되는 것!”이다.(189, 190 페이지) 저자의 예술론은 화려하고 의미로 가득하다. 이는 저자가 근현대미술사를 전공했기에 산출된 것은 아니리라.

이지훈 교수에 의하면 바슐라르는 문학적 상상의 본령이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있지 않고 변형하는 데 있다고 본 철학자, 시인, 과학자이다. 이지훈 교수는 이런 말을 들려준다.“작품을 자율적 존재로 본다는 말은 그것을 하나의 완결된 세계로 본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묘한 추론이 가능해집니다. 세계에는 작품 수만큼 많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추론이 나오게 되지요... 작품의 고유함을 존중하다 보면 상대주의로 치우치기 십상입니다. 작품들을 비교할 잣대도 없으며 예술성을 평가할 기준이 없다는 생각마저 들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슐라르는 이중성을 보입니다. 작품은 각자 자율적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담고 있는 이미지의 운동방식에는 몇 가지 근본 패턴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근본 유형이 바로 네 원소(물, 불, 공기, 흙)의 운동임을 새삼 말할 필요는 없을”것입니다.(이지훈 지음‘예술과 연금술’89 페이지) 네 원소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변화 속의 패턴 뿐 아니라 최소한의 안정성에 초점을 맞추는 작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