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비 카렐은 자신의 림프관 평활근증을 철학 담론으로 삼은 철학자이다. 림프관 평활근증은 거의 전적이라 할 만큼 여성 특히 출산 연령대의 여성에게 주로 생긴다. 카렐 역시 30대 중반의 나이에 림프관 평활근증 진단을 받았다. 카렐은 설득력을 갖춘 진지한 분석력을 선보이는 틈틈이 자신의 고통을 드러냈다. 그 고통의 맨 얼굴은 쿤데라가‘불멸’에서 한 다음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자아의 토대는 사유가 아니라 고통 즉 모든 감정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감정이다...고통이 극에 달할 때 세상은 자취없이 사라지며 우리들 각자는 자기 자신과 홀로 남는다. 고통이야말로 자기중심주의의 위대한 학교이다.”카렐의 고통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은 부드러운 근육 조직의 지나친 팽창이 일으키는 호흡부전으로 10년 안에 죽을 것이라는 진단(127 페이지)이다.

여자 40만명 가운데 한 사람 꼴로 발병(139 페이지)하는 림프관 평활근증은 카렐에게 오르막길을 걸을 때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극도의 어지럼증과 메스꺼운 호흡곤란, 질식할 듯한 상태 등으로 존재를 드러냈다. 걸으면서 말하기, 무엇인가 하면서 말하기, 멈추지 않고 2층까지 올라가기, 무거운 물건 들기 등은 카렐이 할 수 없는 것들의 목록이다. 의사는 카렐의 폐가 15세부터 담배를 매일 한 갑씩 피워온 60세 노인의 그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카렐은 누구보다도 더 부지런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운동을 했고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으니 아이러니한 삶의 면모가 드러나는 것은 이런 불가해함을 통해서인 듯하다.

카렐이 자신의 희소병(稀少病)을 담론의 대상으로 삼을 때 의거한 것은 메를로 퐁티, 후설, 하이데거 등이 다듬고 정교화한 현상학(現象學)이다. 그 중 가장 근원적인 철학자는 몸과 세계의 관계를 독특한 시선으로 바라본 메를로 퐁티이다. 메를로 퐁티는 정신을 물질로 환원하는 유물론을 경계하면서 정신과 육체, 생각과 지각의 불가분성을 강조한 철학자이다. 순수하게 정신적인 활동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메를로 퐁티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된 사실은 몸은 주체이면서 객체인 독특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메를로 퐁티의 사상 가운데 가장 낯선 것은 정신만이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몸도 지향한다는 것이다. 메를로 퐁티에게 몸의 지향성은 정신의 지향성보다 훨씬 중요하며 정신적 지향성의 토대가 된다.

1인칭 관점을 우선시하는 현상학은 객관적인 3인칭 관점으로 아픔을 설명하는 의료계의 자연주의적 방법론을 보완(補完)하는 방법론이다. 현상학적 관점이 자연주의 또는 3인칭 관점의 설명에 대해 대안(代案)이 아닌 보완적 방법론인 것은 현상학이 체험되는 몸과 생물학적 몸을 구별하지만 생물학적 몸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146 페이지) 사실 이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다. 현상학은 아픔을 의사가 고쳐야 할 생물학적 기능장애가 아닌 타인과 소통하고 세계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한 방식으로 본다. 생물학적 몸 vs 체험하는 몸, 아픔에 대한 3인칭적 관점 vs 1인칭적 관점, 자연주의적 접근 vs 현상학적 접근이 노정(露呈)하는 차이는 환각지(幻覺肢)와 신경성 거식증을 해명함으로써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다.

메를로 퐁티에 관한 논문을 써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조광제 교수는 그가 환상지(또는 환각지) 현상을 근거로 해 몸이 객관적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세계에의 존재‘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다고 말한다.( ’몸의 세계, 세계의 몸‘ 95 페이지) 중요한 것은 환상지 또는 불인증(不認證: 마비된 자신의 오른팔을 일관되게 부정하고 다른 사람들이 오른팔을 내밀라고 할 때 왼팔을 내미는 증세) 등은 세계에의 존재인 우리 몸의 일반적 경향이라는 점이다. 뇌에 고통의 신호를 보내는 신경 말단 자체가 없음에도 수년 전에 절단된 손에서 아픔 또는 가려움을 느끼는 현상은 수십년간 사지가 멀쩡한 몸틀(body schema)을 유지한 데 근거해 몸을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표현한 결과이다.

거식증 역시 뼈만 남은 몸을 가진 실상에 반(反)해 주관적인 몸 즉 체험되는 몸은 뚱뚱하고 비대한 몸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차원이 같다. 치료 방법이 없는 중증 질환에 걸린 사람들처럼 카렐도 처음에는“ 왜 하필 나야?”란 생각을 했고 자신의 병이 마음 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했고 자신의 증상을 부정하기도 했다. 그런 카렐에게 삶과 고통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갖게 해준 사람은 림프관 평활근증을 앓는 다른 여자였다. 카렐은 1인칭과 3인칭의 관점 대비에서 나아가 2인칭 관점을 제시한다. 이는 마르틴 부버의‘나와 너’로부터 암시를 얻은 방법론이다. 2인칭 관점에서 긍정적인 것은 나 - 너 만남(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만나는 것)이고, 부정적인 것은 나 - 그것 만남(한 사람이 객관화된 세계를 만나는 것)이다.

카렐은 의사와 환자 사이에 구현되어야 할 나 - 너 만남의 예로‘환자에게 눈높이를 맞춰 말하기, 인간의 기본적인 공감과 동정 표현하기, 신의 은총이 없었다면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 이해하기‘ 등을 예시한다. 메를로 퐁티는 ’내 몸은 비밀을 노출하여 나를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처한 상황을 아픈 사람으로 육체화한 것“이라는 말을 한 바 있다. 아픔이나 장애는 그 사람이 경솔하다는 외적 표시가 아니라 눈에 보이고 객관적으로 인식되는 몸의 일부라는 카렐의 말은 메를로 퐁티의 맥락에서 읽힌다. 카렐은 인간 존재의 특징은 존재 가능이라는 하이데거의 정의(定義)를, 근본적으로 다른 능력까지 포함하도록 확장되어야 하며 존재 불가능도 존재의 한 방식으로 인정(認定)해야 한다는 수정안(修正案)으로 더욱 확장시킨다.

존재 가능이라는 개념을 최대한 넓은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카렐은 휠체어를 타는 사람, 말기 암 환자, 학습 장애자, 다운 증후군을 앓는 사람들도 인간의 존재방식으로 간주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존재 불가능도 존재의 한 방식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카렐의 주장은 가능성이 줄어든 한계 안에서도 선택의 여지는 충분히 있다는 말로 뒷받침된다. 스티븐 호킹은 카렐이 예로 든 인물이다. 카렐에 의하면 존재 가능은 무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몇 년 동안만 허락되는 결코 보장되지 않는 존재방식이며 쉽게 망가지는 덧없는 선물이다.(143 페이지) 카렐은 극단적인 육체 장애의 경우에도 생각, 상상, 감정, 지성은 항상 자유로우며 자유와 상상력을 발휘하면 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는 사람도 새로운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카렐에 의하면 가상공간에서 육체의 무능력은 아무 의미가 없고 문학, 영화, 미술의 세계 역시 존재 해방의 가능성을 주는 영역이다. 카렐은 ”아프면서 행복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답은‘그렇다’이다. 카렐은 건강과 아픔을 상호배타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둘의 연속체로 볼 것을 제안한다. 카렐에 따르면 아픔 속 건강의 숨은 측면은 아픈 가운데 행복을 느끼는가, 라고 꼭 집어서 물을 경우 드러난다. 카렐은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현상학적 질문을 할 것을 요구한다.(173 페이지) 그것은‘아픔이나 장애 때문에 삶이 어떻게 바뀌었습니까?’,‘그것의 어떤 측면이 당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습니까?’,‘어떻게 해야 그런 영향을 만회할 수 있을까요?’등의 질문이다.

카렐은 아픔과 긴밀하게 연관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에 논의의 초점을 맞춘다. 이 논의는 에피쿠로스의 쾌락론에 의거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에피쿠로스는 욕망과 격정에서 생기는 혼란, 죽음에 대한 불안, 신들의 처벌이라는 미신(迷信)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려고 한 철학자이다. 에피쿠로스에게 철학의 목적은 마음의 평정을 의미하는 아타락시아였다. 에피쿠로스는 욕망을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것에만 한정하면 쾌락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과격한 쾌락주의에 빠지지 않게 될 것이라 보았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의미의 쾌락주의자와 구별된다.“에피쿠로스의 사상 체계를 이어받은 후대의 사상가들은 쾌락이 단순히 감각적인 것일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209 페이지)

에피쿠로스는‘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할 때는 죽음이 아직 나타나지 않고, 죽음이 나타날 때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카렐은“사후의 비존재 상태를 믿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삶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경험과 쾌락을 소중히 여기며 즐기는 것과 완벽하게 양립할 수 있다.“(214, 215 페이지)고 말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삶에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이, 고통보다 쾌락이 더 많이 포함될 것이라는 선험적 보장은 없다.“(219 페이지)고 말한다.

죽음에 대해 논하는 자리에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두라고 한 에피쿠로스와, 죽음을 예상하라고 한 하이데거를 함께 인용한 카렐의 논지는 모순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카렐이 말했듯 죽음을 예상하라는 하이데거의 말은 삶을 유한한 것으로 보고 살아가며 자신의 유한한 존재 구조를 충분히 이해하라는 뜻이기에 두 철학자는 통한다. 중요한 것은 두 철학자가 아픔과 죽음에 대한 1인칭 실존적 관점과, 3인칭 객관적 관점을 통합하기 위해 애쓴 사람들이라는 점이다.(228 페이지) 그런데 나는 이 부분에서 죽음이든 아픔이든 삶이든 자신의 견해를 글로 쓰는 자체가 1인칭의 실존적 관점과 3인칭의 객관적 관점을 통합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글을 씀으로써 우리가 닿는 곳은 그런 통합의 지점이고 그것은 다른 말로 객관을 보완하는 주관(카렐이 말한 바로는 이론적 사색을 보완하는 실제 체험: 230 페이지)의 애씀이라 할 수 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카렐은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건강할 때 꾹 참고 하지 않았던 일을 마음껏“ 한다는 카렐은 ”현재라는 좁은 한계 안에서 울리는 증폭된 열정과 환희를 맛보“기도 했다는 말을 들려준다.”논문 한 편, 짧은 책 한 권, 봄에 열릴 몇몇 학회, 다음 달로 예정된 짧은 파리 여행“ 정도를 계획한다는 카렐! 그녀를 계기로 삶에 대한 실용적 답을 구하는 철학적 전통이 좀더 구체화하기를 바란다. 그 논의에 중심에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있다. 그는 과거와 미래에서 벗어나 현재를 살 것을 주문했다. 쾌락의 양이 아닌 질에 초점을 맞추기, 감각적(물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 벗어버리기, 과거와 미래가 아닌 현재에 충실하기 등을 강조한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은 석가모니 붓다의 메시지와 통하는 바가 있다. 림프관 평활근증 사이트를 통해 열심히 활동하며 아픔 가운데서 행복을 느낀다는 카렐의‘아픔이란 무엇인가’(원서)의 출간 년도는 2008년이다. 그 사이에 그녀에게 좋은 변화가 일어났으리라 믿는다. 

* 림프관 평활근증은 인종과 상관없이 가임 연령의 여자에게 나타나는 희소하고 치명적인 폐 질환이다. 이 병의 효과적 치료법은 없다. 체내의 여러 기관에 관련된 이 병은 암과 유사한 면도 있다. 적합한 기증자를 찾는다면 폐 이식수술이 최후의 수단이 되겠지만 이식수술용 폐가 심각하게 모자란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