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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전례 없는 성황(盛況)이 우리 시대의 한 풍경을 장식하고 있다. 자본가에서부터 노숙인에 이르기까지 인문학을 이야기 하고 있는 이 상황에 대해 누군가는 인문학의 시대라는 말을 입에 올린다. 그러나‘인문학은 과학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가‘(동국대 교양교육원 이상헌 교수: 2012년 8월 10일 경향신문)란 제목의 글이 실릴 정도로 인문학의 내실(內實)은 그리 견고하지 못한 듯하다. 물론 이상헌 교수는 인문학에는 인간존재와 삶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통해 과학기술의 부정적 영향을 감소시키고 위험을 예방하며 과학기술과 인간존재의 가치가 조화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하는 역할이 더욱 요구되는 시대라고 진단했다.

인문학의 위기는 최근 서울의 한 대형서점의 북 마스터의 말을 들어보면 더욱 분명해 보인다. 그 북 마스터는 서점의 전체 인문학 도서 매출 가운데 철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0.5%에 불과하다는 말을 했다. 나는 물론 인문학 성황을 우려스런 눈으로 바라본다. 그 이유는 인문학이 돈이 되는 학문으로 인식되어서도 아니고 힐링을 안겨줄 대상으로 인식되어서도 아니다. 나는 인문학 관계자들(출판인과 독자들)이 인문학에 꾸준한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 그들은 한때의 유행이나 거품에 편승해 인문학을 바라보다가 다른 유행에 휩쓸려 갈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공허한 뒤쫓기에 그칠 것이다. 인문학에 꾸준한 관심을 보여 내공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전문적인 글을 쓸 수도 있고 출판 기획 등의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결과를 의도하고 인문학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결코 아니다. 한편 학계에는 정체성에 따른 위상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듯 하다.‘신 없는 구원 신 앞의 철학’(1994년 다산글방 刊)에서 김영민은 자연과학을 효자에, 정경(政經)과학을 적자(嫡子: 정실이 낳은 아들)에, 사회과학을 맷집 좋은 학문에 비유하며“인문학에 매달려 오해와 폄시(貶視)의 그늘 아래 소득 없는 열정을 불태우는 우리 탕자들은 누구인가?”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우리는 물론 김영민의 분류를 통해 인문학의 윤곽을 짐작할 수 있지만 문(文), 사(史), 철(哲) 즉 문학, 역사학, 철학을 인문학의 범주에 넣는 동양 전통의 분류법을 따를 수 있고‘지금 시작하는 인문학’의 저자(주현성)처럼 심리학(心理學), 회화(繪畫), 신화(神話), 역사(歷史), 철학(哲學)과 함께 약간은 변칙적(?)으로 글로벌 이슈를 추가할 수 있다. 나는‘학문(學文) 어떻게 할 것인가?(1993년 學文社刊)가 분류한 방식을 선호한다. 이 책은 인문학을 철학, 종교학(宗敎學), 신학(神學), 문학, 언어학(言語學), 역사학 등으로 분류했다. 반면 연세대학교 인문예술대학 구장률 교수는 ’근대 초기 잡지와 분과학문의 형성‘(2012년 케포이북스 刊)이란 책에서 문학, 철학, 언어학, 국가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법률학, 교육학, 심리학 등을 인문학의 범주에 넣었다.

구장률 교수의 분류는 근대에 합당한 것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법률학 등이 인문학의 범주에 포함된 것은 그가 학문을 크게 인문학과 자연과학으로 대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사회과학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이는 것이다. 인문학이 가벼운 유행 차원에서 소비되고 있는 현상은“소득 없는 열정을 불태우는 우리 탕자들”이라는 김영민 교수의 말이나“이렇게 순수 철학을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참 행복한 것이죠.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가난하지만 행복한 겁니다.”(2001년 거름출판사 刊 ’주름 갈래 울림‘ 195 페이지)란 이정우 교수의 말 등에 비추어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특기할 것은 주현성 저자, ’학문 어떻게 할 것인가?‘, 구장률 교수, 이정우 교수, 김영민 교수 모두 철학과 인문학을 하나의 시각으로 본다는 점이다. 그런데 황수영 교수에 의하면 동양에서는 인문학과 철학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았지만 서양에서 인문학과 철학은 나뉘어 있었고 심지어는 대립되기까지 했다.(2005년 철학과 현실사 刊 ’철학과 인문학의 대화‘) 서양의 이런 사정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의 비실용과 비정치로서의 휴머니즘의 신화는 그 이면으로 지극히 실용적이고 정치적인 비호를 받으며 융성했고 휴머니즘이란 애초 인간을 위한 학문을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는 지적과 맥을 같이 한다.(2011년 휴머니스트 刊 ’불온한 인문학‘)

서양은 시학, 수사학, 문학, 역사, 예술 등 인문학적 영역에 속한 것들은 가변적 인간세계를 대상으로 하며 진리의 불완전한 모방으로 봄으로써 진리로 인정하지 않았다. 한편 수학적 자연과학을 엄밀학의 전형으로 생각한 서양 근대철학은 진리에 대한 플라톤의 이념을 실현한다는 이유에서 진리로 인정받았다. 오늘날 철학을 인문학의 일부로 분류하는 것은 철학과 인문학의 관계 변화를 반영한다. 주현성의 책은 인간의 영원한 화두인 마음을 다룬 심리학, 눈으로 확인하는 지식의 지형을 다룬 회화(繪畫), 은유로 가득한 또 하나의 인간 역사를 다룬 신화, 세계를 이해하는 기초 지도를 다룬 역사, 역사를 움직여온 지식 동력을 다룬 현대 이전 철학, 현재와 미래를 재구성하는 대화의 장을 다룬 현대 철학, 앞선 교양인의 궁극적 관심사를 다룬 글로벌 이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심리학 편에서 프로이트와 칼 융의 관계를 범성욕주의 vs 신비주의로 보았다. 대개 하나의 현상에 대해 고착적 의미를 두는 것은 어두운 분위기로 채색되기 쉬운데 프로이트가 바로 그렇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뇌과학을 결여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기법이 문학과 문학 비평 등에서는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심리학이 자기계발서를 닮은 것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심리학 읽기가 꺼려진다. 물론 다양한 관점과 지향성으로 심리학을 읽을 수 있지만 나는 심리학의 본령은 타인의 심리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치유라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여성주의 심리학의 원조인 미리암 그린스팬의 ’감정 공부‘ 같은 책을 높게 평가한다. 회화 편에서 인상적인 내용은 눈앞의 순간이 아닌 영원히 변하지 않는 형태를 그린 세잔이 현대 회화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사실이다.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연상하게 하는 면이 있다. 입체파의 피카소와 야수파의 세잔이 만난 시기에 피카소에게서 밝은 색채가 드러났고 마티스에게서 입체파적 면모가 드러났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신화 편에서 그리스 신화와 히브리 신화(구약 성경)의 차이는 전자가 천지 창조 후에 신이 생겨난 데 비해 후자는 절대 신의 힘으로 천지가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흥미로운 것은 에리히 아우얼바하의 분석이다. 그것은 스타일 분리와 스타일 혼합이라는 그의 이론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스타일의 혼합 또는 분리는 아우얼바하의 ’미메시스‘의 뿌리를 이루는 개념으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즉 아담, 노아, 다윗, 욥 등은 모두 형편없이 타락할 수 있는 인물들이어서 영웅적인 고양(高揚)의 순간에도 변화를 보이지 않는 호메로스의 인물들과 구별된다. 아우얼바하는 호메로스의 세계에 대해 신의 숭고한 영향력이 너무나 깊숙이 일상적인 것 속에 뻗쳐 있어 숭고한 것과 일상적인 것의 두 영역은 사실상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1989년 민음사 刊 유종호 지음 ’문학이란 무엇인가‘ 388, 389 페이지)

그리스 신화는 여러 면에서 구약 성경에 모티프를 제공했다는 점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역사 편에 의하면 그리스 문화의 힘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더욱 빛을 발했는데 근대에 이르러 법률을 제외한 대부분이 그리스 문화의 모방처럼 되살아 났다고 한다.(207 페이지) 왜 법률만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을까? 로마의 가장 눈부신 유산이 법률과 기독교이기 때문일까? 역사편에서 아쉬운 것은 기독교가 현재의 카톨릭, 장로회, 성공회 등을 중심으로 논의되었다는 점이다. 1054년에 비잔틴 교회와 결별한 로마교회는 16 세기 루터의 종교 개혁을 통해 다시 한 번 대분열을 하게 된다.

루터의 종교 개혁 이전의 그리스도교는 구 카톨릭 또는 원시 카톨릭이고 그 이후 로마교회와 동방 정교회가 나뉘었고 종교 개혁으로 그리스도교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나뉘었다. 나는 역사편에서 종교 전쟁이 실은 세속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실리전의 양상을 띠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했다. 현대 이전 철학편에서 중요한 인물은 파르메니데스이다. 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인물인 그는 세계는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생성도 소멸도 하지 않는 존재라는 주장을 했다.(239 페이지) 그에 의해 세계는 가시적(可視的) 세계와 가지적(可知的) 세계로 나뉘었다. 정확하게 말해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이야기한 헤라클레이토스와 생성과 변화가 존재할 수 없다고 본 파르메니데스를 화해시키려는 노력이 서양 철학을 추동(推動)하는 힘이 된 것이다.

있으나 마나 한 즉 제거해도 무관한 언어적 의미의 무(無)라는 공간에서 넓이를 가지는 실재하는 빈 공간을 설정한 파르메니데스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의 시초를 제시한 철학자이다.(296 페이지) 현대 이전 철학편에서 중요한 인물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지만 나는 고르기아스를 꼽는다. 고르기아스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해도 알 수 없다. 알 수 있다 해도 전달할 수가 없다는 말을 했다. 이정우 교수는“사유의 역사는 고르기아스에 답하려고 끝없는 모험을 감행했다”고 말한다.(1997년 민음사 刊 ’가로지르기‘ 37 페이지) 현대 이전 철학의 인물들 중 흥미로운 두 사람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스승과 제자이다.

리차드 루빈스타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서구에서 오랜 세월 잊혀져 있었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플라톤 사상을 수용해 이교도의 반기독교적 교리에 대항하는 논리로 활용한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2004년 민음사 刊 ’아리스토텔레스의 아이들‘ 87, 89 페이지)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의 확대에 공헌한 사람이다.(315 페이지) 아우구스티누스는 아퀴나스와 대비되는 인물이다. 플라톤에 경도되어 있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을 타락한 존재로 보았다. 반면 아퀴나스는 이성의 힘을 믿었다. 현대 이전의 철학에서 내게 큰 의미를 주는 인물은 스피노자이다.

반면 현대의 철학에서 큰 이슈로 다가온 인물은 후설이다. 저자는 후설의 현상학은 대상의 본질보다 대상이 우리의 의식에 노출시키는 현상과의 관계만을 이야기 해야 하는 학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것은 현상적 의미이지만 인간이 사물의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433 페이지) 현대 철학에서 중요한 대목이 나오는 곳은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이다. 저자에 의하면 레비스트로스는 세계의 모든 가족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친밀하면 조카와 외삼촌이 소원(疎遠)하고 조카와 삼촌이 친밀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소원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454 페이지) 현대 철학에서는 어려운 개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에크리튀르이다.

일본의 노마 히데키 교수가 에크리튀르를 원용해 정음(正音)을 분석한 공로로 2012년의 주시경 학술상을 수상한 사실이 기억에 새로운데 저자는 미국 영화 진주만을 보며 일본인들이 미국의 전투기가 자국의 전투기들을 추락시키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것을 에크리튀르에 묶여 있기 때문으로 분석한 롤랑 바르트를 예로 든다. 에크리튀르는 쓰는 것, 쓰인 것, 쓰인 앎 등을 의미하는데 랑그나 스틸과 다른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철학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들뢰즈이다. 저자는 마누엘 데 란다를 들뢰즈를 이으며 영미철학까지 포섭하고자 하는 인물로 소개했다.

그의 난해한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이 생각나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번역자의 한 사람인 이정우 교수가 한 말이다. 이 교수는 보드리야르, 라캉, 들뢰즈와 가타리 등 쟁쟁한 유럽 철학자들이 현대 물리학 개념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렇게나 가져다 쓰고 있음을 증명하려고 벌인 소칼(미국 뉴욕대의 물리학 교수 앨런 소칼) 스캔들을 언급하며 사기꾼들이 이 책(’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데 란다가 들뢰즈를 이으며 영미철학까지 포섭하려는 배경을 지녔기에 들뢰즈를 비롯한 현대 철학을 잘 이해하고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는 적임자인 것일까? 마지막 챕터에서는 당연히 세계화가 거론될 수 밖에 없다. 나는 앞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을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라 말했다.

하지만 이 터무니 없는 세계화 시대에 인간을 우선시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인문학이 주요 근거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문제는 이기적 욕심이 아닌 공동체적 희망이다. 이 도도한 세계화, 반역적인 세계화 시대에 누군가는 마을이 대안이라 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협동조합을 대안으로 거론한다. 이런 현상을 현실에 뿌리 내린 인문학적 상상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현실을 규제하는 정치적 조건들에 대해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이란 책으로 대응한 이정우 교수나 ’뻔뻔한 시대 한 줌의 정치‘ 라는 현실 정치인들에 대한 실명 비판을 가한 정치서적을 쓴 이진경 교수 등의 작업은 시사하는 바 크다. 인문학 성황의 허상을 잠시 언급했지만 전문적 논의에 귀 기울이면 갈 길은 멀고 상황은 암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인문학 열풍을 그저 웃으며 반길 수는 없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