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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제이 굴드는 학문과 개인적 이력 양면에서 인상적인 삶을 살다 간 고생물학자이다.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리란 점은 분명하다. '과학과 휴머니즘'을 쓴 사회학자 리처드 요크와 브렛 클라크 역시 굴드가 자신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환경사회학자인 두 저자는 사회와 자연 세계 모두 역사의 산물이기에 포괄적인 분석을 하려면 역사적 방법이 필요한 바 생물학적 진화에 대한 굴드의 접근 방식이 사회과학자들에게도 유용하다고 말한다.

'과학과 휴머니즘'은 두 저자가 굴드에게서 배운 여러 개념들 중 자신들에게 특히 가치 있는 것들을 담은 책이다. 저자들은 논쟁보다 굴드의 연구에서 기저를 이루는 광범위한 지적 문제들에 더 흥미가 있음을 밝힌다. 과학과 휴머니즘이 제목으로 채택된 것은 그 두 분야가 삶을 영위하고 세상과 그 속에서의 자기 위치를 이해하려고 분투하는 데 있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위대한 두 전통"이기 때문이다.

책의 전반부는 굴드의 연구 전체를 관통하는 역사적 변화의 속도, 자연 질서의 구조적 기반, 역사의 우연적 성격, 자연과정의 다층적 특성 등을 살핀 장들이다. 후반부는 생물학적 결정론에 대한 굴드의 비판 및 휴머니즘 존중, 굴드가 보인 인간 조건에 대한 평가 등을 다룬 장들이다. 굴드가 생물학적 결정론을 비판한 것은 인간의 서열이나 위계를 자연적인 것으로 돌리는 데 이용되는 문화적 편견을 폭로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굴드는 "과학을 엘리트의 손에 배타적으로 맡기기보다 대중에 개방해 지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지식 있는 시민 층을 구축하려는 마르크스 전통과 학자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굴드는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모든 형태의 식민주의와 억압에 반대하는 정치적 좌파의 전통에 섰던 휴머니스트 과학자였다. 내게 굴드는 늘 리처드 르원틴과 함께 고려되는 과학자이자 진화를 진보가 아닌 다양성의 증가라 정의함으로써 인간우월주의의 오류를 불식시키느라 애썼던 휴머니스트로 기억된다.

굴드는 다윈을 누구보다 칭송했지만 진화에 대한 다윈의 이해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했다. 굴드는 현대 종합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현대 종합설은 진화의 과정이 무작위적인 돌연변이에 의한 새로운 유전자의 공급과 환경에 적합한 형질의 자연선택, 유전적 부동과 유전적 흐름의 공동 작용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주장한다. 물론 다윈은 종의 변화를 전제한 반면 멘델은 다윈과 정반대로 유전적 특징의 존속을 주장했다(위르겐 브라터 지음 ‘산책로에서 만난 즐거운 생물학’ 151 페이지)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굴드는 행위능력(agency), 효력(efficacy), 범위(scope) 등의 세 주요 주제를 제시했다. 이 세 주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더 큰 세계관에 복합적으로 통합되어 있다. 1장에서는 동일과정설과 격변론의 관계가 해명된다. 동일과정설은 지질학적 변화 속도가 동일하게 느리고 점진적이고 끊임없으며, 격변하거나 발작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격변론은 지구의 역사 과정에서 몇 차례 되지 않는 격변적 사건들이 현재의 지질학적 세계의 주요한 측면을 이룬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다윈(Charles Darwin: 1809 - 1882)의 스승이었던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 1797 - 1875)은 동일과정설의 대표 제안자이다. 저자들은 동일과정설/ 격변론을 종교/ 과학의 구분으로 이해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 설명한다. 신학자들과 방법론적으로 결별한 라이엘은 종교적 신앙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과학적 판단을 그의 종교적 신념으로부터 보호하지도 않았다. 라이엘의 영향을 받은 다윈이 지질학적인 극적 변화의 시기를 설명하고 새로운 종들의 순간적인 출현 이후에 나타난 소수의 전 지구적인 대량 멸종의 실재를 부인하기 위해 화석 기록의 불완전성을 언급(47 페이지)한 사실은 다소 충격적이다.

한편 다윈이 갈라파고스 제도(諸島)에서 진화론자가 아닌 창조론자의 방식으로 핀치(finch) 표본을 수집했다는 사실(60 페이지)은 흥미롭다. 스튜어트 카우프만도 이에 대해 한 마디 한다. “다윈은 야생에서 무수히 많은 사례를 관찰함으로써 변이를 수반한 유전(遺傳)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다시 만들어진 신’ 83 페이지) 다윈의 설명은 질서와 조화, 연속성 등을 생물학적으로 표현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구에는 희귀하지만 일부 외계 천체에는 풍부한 이리듐 층이 백악기 제3기 경계에 해당하는 전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발견된 지질학적 사실과, 빙하가 녹은 물로 인한 단 한 차례의 대홍수로 일거에 형성된 용암 지대의 존재 등이 점진주의의 오류를 증명한다.

점진론에 대한 선호는 부분적으로는 느리고 예측 가능한 변화를 지지하며 극적인 역사 변화가 이따금씩 짧은 혁명적 순간에 일어난다는 관념을 반대하는 사회지배층의 이데올로기에서 기인한 편견을 반영한다.(50 페이지) 굴드는 단속평형론(斷續平衡論)을 주장했다. 단속평형론은 방향성 없는 사소한 변화만이 있는 긴 정지기가 빠른 변화가 일어나는 짧은 기간에 의해 단속(斷續: 끊어졌다 이어졌다.)됨을 말한다.

"굴드는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 서서 현재의 세계가 필연적이지 않으며 미래가 열려 있다는 가능성에 우리가 눈뜰 수 있도록 도와준다."(53 페이지) 굴드는 과학 이론의 결정적인 특징인 수학적 공식화를 선호하는 물리학자들의 경향성에 반대했다. 굴드는 시공간적으로 불변하는 원리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흐름을 사려 깊게 통합하는 동시에 대부분의 구조적 힘이 역사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56 페이지)

굴드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취한 방법론을 대비하는 것이다. 자연학의 세부 영역에 거의 관심이 없었던 플라톤은 과학을 수학으로 환원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중요한 실체이자 실재의 원천으로 물질적 사물을 믿었다. 앞서 창조론자의 방식을 이야기했지만 플라톤주의자들에게는 많은 표본이 필요하지 않으며,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게는 경험 세계 속에 존재하는 다양성의 근본적 실재를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표본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시사적이다.

갈라파고스에서 수컷 한 마리와 암컷 한 마리씩만 수집한 다윈은 창조론자의 방식을 택한 플라톤주의자였다. 굴드는 다윈주의는 수학 공식이나 연역적으로 도출된 명확한 진술의 집합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저자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패러다임이 모두 우리에게 저마다 고유한 통찰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68 페이지) 아리스토텔레스 - 다윈주의주의가 변이에 초점을 두는 사람들에게 통찰력을 제공한다면 플라톤 - (웬트워스) 톰프슨주의는 초시간적인 규칙성에 초점을 두는 사람들에게 통찰력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웬트워스 톰프슨(Wentworth Thompson: 1860 - 1948)은 스코틀랜드의 생물학자, 수학자이다. 굴드는 평생 자연선택이 진화적 변화를 일으키는 주된 동력이고 생물의 거의 모든 특징을 적응의 결과로 해석할 수 있으며, 그러해야 한다는 현대 종합설의 핵심적 가정을 비판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굴드는 사슴의 큰 뿔이 과시용 또는 구애의 수단으로 쓰였을 것이라는 일반론과는 달리 그것은 단지 뿔이 몸보다 더 빨리 자랐을 뿐이라는 줄리언 헉슬리(Julian Huxley: 1887 - 1975)의 상대성장(allometry)론을 긍정했다.(줄리언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를 쓴 올더스 헉슬리의 형이다.)

굴드는 기능주의 비판을 관점으로 취했다. 굴드는 스팬드럴(spandrel)을 이야기한다. 원래 건축물의 아치 사이에 형성된 빈 곳을 의미하는 스팬드럴은 의도와 무관하게 만들어진 부산물을 뜻하는 쪽으로 의미가 전화(轉化)했다. 굴드에 의하면 수학적 계산을 수행하기 위해 설계된 컴퓨터가 비디오 게임을 위해 사용될 잠재성을 갖듯 사람의 정신도 자연선택이 직접 만들어내지 않았던 수많은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다.

굴드는 열린 마음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전통의 통찰을 모두 인정함으로써 진화론에 대해 좀 더 다원론적인 견해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86 페이지) 굴드는 역사의 본질이 진보를 향하고 있으며 현재의 상황이 불가피하다고 가정하는 편향을 주되게 비판해왔다. 굴드는 긴 시간 척도에서 보면 생명의 역사에는 방향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다윈은 진화에 어느 정도의 진보는 있을 것이라 주장했지만 역사의 진보에 그런 관념을 적용하는 데는 회의적이었다.(98 페이지)

타당한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인간을 탐구하는 과학이 자연과학에서의 실험실 상황을 흉내냈을 때 그것은 인간적 삶의 현실을 결정적으로 왜곡하게 된다.”(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285 페이지)는 글을 생각했다. 굴드는 우리가 생명의 테이프를 되감아 재생한다면 지금과 다른 역사가 전개되었을 것이고, 그 역사에서 인간이나 심지어 인간과 특별히 비슷한 그 어떤 생물도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거의 확실하다고 말했다.

진화과정은 내재적인 것(대물림된 구조적 제한)과 외재적인 것(환경적 선택압) 사이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이다. 그것은 생물의 개체발생이 유전자와 환경 사이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인 것과 마찬가지이다.(105 페이지) 굴드는 우연적 수렴(contingent convergence)란 개념을 주장했다. 굴드는 진화가 단순한 상태에서 복잡한 상태로 진보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는 가정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굴드는 생명의 역사란 향상이 아니라 다양화의 한 과정이라는 말을 했다.

굴드는 생물이 오직 우연의 과정으로만 진화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굴드는 생물이 국지 환경에 적응하게 만듦으로써 자연선택이 특정 계통을 더 단순하거나 복잡하게 만들 가능성이 대략 같다는 점을 지적했다. 특정 환경에서는 선택압이 단순한 생물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고, 다른 환경에서는 복잡한 생물에 더 유리할 수 있다.(110 페이지) 저자들은 눈은 수렴 진화(收斂進化: 계통적으로 관련이 없는 둘 이상의 생물이 적응의 결과 유사한 형태를 보이는 현상)의 좋은 예이지만 수렴의 우연한 특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이기도 하다고 말한다.(114 페이지)

굴드는 중요성을 필연성과 등치시키는 경향을 비판했다. 무엇인가가 중요하다고 해서 그것이 출현하게끔 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 굴드의 주장이다. 굴드는 자연계가 인간의 갈망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애썼다. 굴드는 자연이 그 속에 인간의 의미를 배태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낙담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우리가 스스로의 목적을 찾을 수 있도록 힘을 준다는 점에서 해방적이라고 생각했다.(120 페이지)

저자들은 사회를 단순히 개인들의 주관적 경험의 결과로 간주하려는 환원주의적 경향을 문제적이라 주장한다. 저자들에 의하면 편협한 환원주의의 폐해는 자연과학에 그치지 않고 사회과학에도 미치며 사회 속에 나타나는 일반적 경향에까지 바람직하지 않은 영향력을 미친다.(128, 129 페이지) 편협한 환원주의는 사회과학에서든 자연과학에서든 복잡하고 동역학적인 체계의 창발적 특성을 기술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이다.

굴드는 오직 유전자 중심 선택에 초점을 맞추는 현대 종합설과 그 밖의 주장에 포함된 편협한 환원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진화적 활동이 여러 수준에서 일어난다고 주장했다.(139, 140 페이지) 굴드는 우리의 이념적 헌신과 지적 성실성이 반드시 제기해야 할 질문을 해야 한다고 경고하지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까지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직 이성에 근거한 분석만이 답을 줄 수 있다.(145, 146 페이지)

5장에서 저자들은 의도적인 부정행위와 연구자들의 편향에서 비롯되는 왜곡을 다룬다. 편향에서 비롯된 왜곡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우리는 그 누구도 사회적 맥락에서 스스로 완전히 벗어나 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물화(物化: reification)란 개념을 소개한다. 물화란 편향에 따른 것이든 의도적인 것이든 추상적인 것을 실재하는 것처럼 다루는 과정을 말한다,(152 페이지) 연구자들은 선험적 확신과 통계 처리 과정에서의 창작으로 왜곡을 저지른다.

굴드의 조사에 따르면 생물학적 결정론자들이 저지르는 가장 일반적인 실수는 모호한 증거를 자신들의 선험적 확신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의 경향이 중심을 이루었다.(생물학적 결정론자들은 뇌 크기가 지적 능력이 비례한다고 주장한다.) 좋은 의도를 가진 연구자들도 자신들의 선입관을 지지하는 증거를 찾고 자신의 생각에 반대되는 증거를 무시하고 모호한 정보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다.(154 페이지)

저자들은 에른스트 헤켈이 내세운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주장을 언급한다. 개체가 배아(胚芽)에서 성체로 발생하는(개체발생) 과정에서 진화 역사상 성체의 모든 단계를 거친다(계통발생)는 이 주장은 오늘날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으로 진화에 진보적인 본질이 있다고 가정한 결과였다. 굴드는 인종 간의 평균 두개골 크기가 체계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은 확고하게 입증된 바 없으며 뇌가 정상적으로 발달하지 않은 극단적 경우를 제외하면 한 종에서 두개골 크기가 지능과 상관관계가 있다는 증거도 거의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진정한 의미에서 객관적일 수 없지만 우리 자신의 선입관을 인식하고 사려 깊고 성찰적인 자기비판을 통해 이상(理想)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는 지적은 희망을 갖게 한다. 생물학적 결정론에 대한 비판은 굴드가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로 평생 진지하게 몰입했던 주제 중 하나이다. 굴드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리처드 르원틴은 자연계를 기술할 때 은유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것에는 위험이 따른다는 경고를 했다. 어떤 은유는 그 자체의 힘 때문에 물화로 이어지고 그것은 여러 영역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생

물학적 결정론자들은 사회적 불평등을 유전적으로 결정된 차이의 발로로 본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 변화를 이 세계의 고유한 질서를 거스르는 것으로 간주한다. 내게 굴드는 리처드 르원틴과 함께, 에드워드 윌슨, 리처드 도킨스 등에 반대되는 진영에 자리한 과학자이다. 윌슨은 ’사회생물학’을 통해 성별에 따른 노동분화를 뒷받침하는 생물학적 소인(素因)이 있음을 주장한 학자이다. 윌슨이 견지한 입장을 본질주의적 관점이라 한다. 결정론자들은 생물학을 사회 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한다. 생물학을 사회적 무기로 이용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들은 주류 엘리트 집단과 이해관계를 같이 한다.

굴드와 그의 동료들은 생물학과 문화의 연결을 평가하기 위해 변증법적 접근 방식을 제공하고 동시에 생물학적 관계의 역동적 성격을 부각시킨다.(167, 168 페이지) 리처드 르원틴, 스티븐 로즈, 레온 카민 등은 인간의 속성을 생물학으로부터 풀어낼 수는 없지만 생물학으로 속박할 수도 없다는 말을 했다.(174 페이지) 저자들은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두 가지 개념적 오류는 편협한 환원주의와 지나치게 확장된 적응주의를 고수한다는 점이라 설명한다.(175, 176 페이지)

저자들의 설명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창발성은 환원주의의 반대이고, 변증법은 결정론의 반대라는 점이다. 물론 저자들은 “변증법적 접근 방식은 환원주의와 대립된다.”고 말한다.(180 페이지) 저자들에 의하면 DNA가 생명을 창조하지 않았고 생명이 DNA를 창조했다. 또한 DNA가 단백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백질 효소들이 DNA를 만든다. 르원틴은 유전자가 자기 복제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유전자에 신비스러운 힘을 부여하는 것이며 마치 유전자가 몸 안의 일반 물질들보다 우위에 있는 것처럼 간주하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183 페이지)

유전자는 아무것도 만들 수 없고 전체 세포만이 자기 복제를 위해 필요한 모든 기구를 포괄할 수 있다.(181 페이지) 생물의 진화적 발생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삶의 어떤 순간에 있든 그 생물은 발생의 역사가 만들어낸 독특한 결과이며 그 역사는 그 생물의 내적 힘과 외적 힘이 상호작용을 하고 결정을 한 결과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183 페이지) 생물체는 유전자와 환경 사이에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동시에 생물은 자신을 구성할 뿐 아니라 환경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능동적인 힘이다.(185 페이지)

저자들은 미리 예정된 것들은 아무것도 없으며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생물들은 보다 큰 세계의 특성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니치(niches: 생태적 지위)를 창조한다고 말한다.(187 페이지)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미리 정해진 진리는 아무것도 없으며 저자들은 기존 지식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새로운 지식을 만든다는 내 지론(持論)을 떠올렸다. 전체가 그렇지만 특히 니치 부분은 유기체적이고 생명친화적인 철학의 뉘앙스를 강하게 띠는 한편 과학적으로 엄밀하기까지 해 희열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단순한 환원주의적 방식으로 세계나 사회를 이해할 수 없으며 현재의 단순한 역사적 맥락에서 특정한 창발적 특성들을 이해해야 한다.”(189 페이지) 저자들에 의하면 자연선택은 적응으로 이어지지만 그것이 진화적 변화를 낳는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190 페이지) 저자들은 선택압이 모든 생물들을 빚어 낸다고 해서 모든 생물들이 역사적으로 취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지는 않는다고 설명한다.(196 페이지)

굴드는 자연과 인류 역사는 우발성(happenstance)에 의해 압도적으로 지배되는 가능성의 지평을 이리저리 헤매는 과정이었다고 주장했다.(202 페이지) 굴드는 진화 과정이 비유적인 의미에서 사다리가 아니라 관목(灌木)과 같다는 점을 강조했다. 관목은 들뢰즈의 리좀(뿌리줄기)을 연상하게 한다. 굴드는 4만년의 최근까지 최소한 세 가지 사람 종이 공존했을 것이라 지적했다. 유럽의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 아프리카에서 퍼져나간 호모사피엔스 등...

인류학자 이상희 박사는 현생 인류의 DNA에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의 DNA가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데니소바인의 DNA에도 네안데르탈인의 DNA가 17 퍼센트 포함되어 있다고, 세 종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복잡한 관련을 맺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한다. 데니소바인은 현생 인류나 네안데르탈인과 아주 가까운 것으로 밝혀진 제3의 인류이다.(2015년 9월 출간 ‘인류의 기원’ 240 페이지) 그동안 축적된 증거는 오래전 굴드의 예견이 정확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현생 인류는 진보의 선형적 행진이 만들어낸 산물이 아니라 운이 좋아서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호미닌의 덤불에 있는 하나의 작은 가지에 불과했다. 우리 선조들에게 보다 큰 뇌를 향한 천성적인 진화적 추동력은 없었다는 것이 분명하다.(203 페이지) 저자들은 질적인 불평등이 위계적 불평등을 뜻하지 않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207, 208 페이지) 굴드는 과학과 인문학이 모두 위대한 전통이며 각기 독립적인 영역을 갖지만 경계를 접하고 서로를 보완해준다고 주장한다.(211 페이지)

저자들에 의하면 과학은 왜 그러한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뿐 그러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214 페이지) 과학과 인문학의 상호작용은 비판적 성찰과 억제를 요구한다. 굴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가치와 도덕을 자연에 부과해서는 안 되며 자연에서 인간의 도덕이나 가치를 이끌어내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고 경고한다.(215 페이지) 굴드는 예술을 포함하는 인문학과 과학이 합법적이고 분리된 영역을 갖지만 둘 사이의 경계가 완고하게 지켜져서는 안 된다는 미묘한 입장을 취했다.(227, 228 페이지)

굴드는 고전적인 다윈 진화론이나 신다윈주의의 현대 종합설이 갖는 통찰을 기각하거나 배격하지 않았다. 굴드는 진화론을 확장했다. 굴드는 진화의 특성이 진보라는 가정은 인간의 갈망을 투영한 것이며 자연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는 우리의 능력을 저해해왔다고 지적했다.(233 페이지) 진화는 결정론적 과정이 아니라 창발적 가능성들에 의해 만들어진 방향 없는 방랑과 같다. 굴드는 자연에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침울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로 인해 자유로워져 의미와 도덕성이 인간의 과제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고 말했다.(234 페이지)

이는 자유, 영혼불멸성, 신 존재 등은 존재를 증명할 수도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할 수도 없지만 실천이성적으로는 요구된다고 말한 칸트를 연상하게 한다. 인간의 개념인 미학적, 도덕적 진리는 자연 속에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점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굴드의 다른 말 역시 그렇다. 굴드는 인간은 사악하거나 파괴적인 종이 아니며 의도적으로 이 세계에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니며 오히려 구조적 복잡성의 얼개 속에 들어 있는 거대한 비대칭성이 수 세기에 걸쳐 구축한 것을 순식간에 파멸시킬 수 있게 만든다는 주장을 한다.(238 페이지)

굴드는 거의 모든 복잡계의 작동 방식에 거대한 비대칭성이 있으며 그 비대칭성이 인류 역사의 파괴적 사건들의 강도와 응용과학 지식의 충격적인 상관관계를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237, 238 페이지) 이 글이 실린 ‘거대한 비대칭(The Great Asymmetry)’을 읽을 필요가 있다. 상당히 흥미로운 한편 헤아려 보아야 할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의식(意識)을 우연의 산물이라 본 굴드는 파괴의 능력도 자연선택에 의한 것이 아닌 부산물이라 설명했다.

굴드의 ‘거대한 비대칭’은 피터 왓슨의 ‘거대한 단절(The Great Divide)’,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 등을 생각하게 한다. “수많은 주제와 주장을 가로지르는 다양하고 풍부한 연구를 수행”한 굴드의 글을 이해하는 것은 벅찬 일이다. 굴드는 비판적 물음을 제기하려면 대담한 주장과 연구가 중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242 페이지) 과학과 인문학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자리매김했던 굴드를 보며 에른스트 페터 피셔를 떠올리게 된다. 피셔는 수학, 물리학, 생물학 등을 전공한 학자로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허무는 글쓰기로 유명한 학자이다.

그는 생존 저자이기에 상당한 시간에 걸쳐 접할 여지가 있지만 굴드는 고인이 된 지 오래이다. 굴드가 직접 인용하지 않은 것들과 그의 글을 이해하는 데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지 확정지을 수 없는 것들까지 포함해 자연과학, 철학, 인문학 등을 폭넓게 읽어야 할 것이란 생각을 한다. 책을 읽고 나니 자연과학보다 사회학 책들이 먼저 읽고 싶어지는 것이 묘하게 느껴진다. 굴드 만큼 뛰어난 두 저자에게 박수를 보낸다.(원래의 내 스타일이 그렇지만 ‘과학과 휴머니즘’은 특히 간략하게 언급할 수 없는 무수한 핵심 개념들로 인해 글을 길어지게 한 책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