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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唯識) 불교의 어려움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렇기에 심리학을 전공한 스님이 유식에 대해 설명하는 책은 어떤 희열을 전해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만하다. 서광(瑞光) 스님의 ‘치유하는 유식 읽기’는 바로 그렇게 심리학을 전공한 저자가 철학 및 종교의 범주에서 연구가 이루어져온 유식을 심리치유적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한 책이다.

중요한 것은 심리적 증상의 뿌리를 보는 것이다. 이는 나를 이해하고, 타자를 이해하고 나아가 나와 타자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조건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된다. 유식의 정확한 명칭은 ‘유식 30송’에서 유래했다. ‘유식 30송’은 4 - 5 세기 인도의 바수반두(세친世親)가 불교수행의 핵심을 체계화하고 완성한, 대승불교 심리학의 대표 교재이다. 저자는 말한다. 각자의 마음이 이 수업의 주교재이고 자신의 책은 부교재라고.

저자에 의하면 자각이 곧 치유라는 것을 알면 공부가 훨씬 더 수월해질 것이다. 스피노자는 비슷하지만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했다. 스피노자는 정념(情念)의 원인을 알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히 알 수는 없으며 원인을 안다고 해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원인을 알려고 하는 동안 만큼은 정념에서 자유롭다는 말을 했다.(가라타니 고진 지음 ‘언어와 비극’ 275 페이지)

어떻든 마음을 주교재로 삼는 방법은 무엇인가? 1) 비교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것, 2) 마음을 직면하는 것, 3) 겸손하고 솔직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ego를 작동시키지 않는 것), 4) 애쓰고 무리하지 않는 것 등이다. 저자는 불교 교리 공부는 수단일 뿐으로 인연이 닿는 것 또는 지금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당장 도움이 되는 가르침을 우선적으로 찾고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유식 30송은 고통받는 중생의 마음 작용과 기능, 구조에 관한 설명과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과정, 그리고 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마음구조와 작용에 대해 가장 완벽하게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책이다.(36 페이지) 중생이란 자기중심적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자기중심적 행동은 고통을 유발한다. 유식은 생로병사라는 명백한 고통보다 무상(無常)함으로 인한 고통 특히 자기중심적 태도에 의한 고통을 치유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오직 알 뿐임을 의미하는 유식(唯識)은 우리는 모두 각각 다르게 안다는 의미를 지닌다. 각각 다르게 아는 것은 각자 에고 및 경험에 비추어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엇인가 경험할 때 자신의 내면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각자 다르게 즉 불완전하게 아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헤아리면 이해심에 의한 소통이 이루어진다.

내 명상 스승은 상대를 자비심으로 대하고, 상대 역시 오랜 축적된 성향에 따라 행동한다는 통찰을 하고, 자기의 마음을 보고,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지혜로 상황을 대할 것을 가르치셨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 상대가 그렇게 이해했다, 경험했다는 사실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유식을 바로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 중관(中觀)이 부처의 마음에 초점을 둔다면 유식(唯識)은 중생의 마음에 초점을 둔다는 차이가 있다. 관건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대하고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저런 경전을 예로 들어 유식을 설명한다. 내게 필요하지 않은 인연은 오지 않는다는 ‘대승기신론‘의 가르침을, 저자는 상대와는 무관하게 기뻐하거나 분노하는 자신의 유식 작용을 들어 설명한다. 경험을 하고, 알고 반응하되 그 경험이나 앎에 집착하지 말고(머물지 말고) 마음을 일으키라는 말을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으로 설명하는 것도 그렇다. 우리는 무엇을 경험하는 순간 소유권을 투사(投射)하고 집착한다.

저자는 마음의 구조와 작용을 설명하는 초기불교 시스템으로는 윤회와 무아의 가르침을 동시에 잘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하며 8식인 저장식(貯藏識: 아뢰야식)의 필요성을 논한다. 8가지 식이 모두 의식 영역에 머물러서 지각할 수 있으려면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어야 한다. 경험하는 자와 경험되는 대상이 나뉘는 곳에 마음이 존재한다.(59 페이지) 물론 주체와 대상은 연기적으로 상호작용한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은 모두 연기(緣起)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상호의존적인데 이원적으로 분리해서 단절하고 경계하는 것이 우리이다. 우리는 항상 여지(餘地) 즉 공간을 남기고 ’절대’의 딱지를 붙이지 말아야 한다. 앎의 시작은 곧 무지의 시작이라는 말이 이해가 된다. 범부들은 그렇게 해왔고 그렇게 하고 있고 깨닫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저장식은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깊은 무의식의 영역이다.

저장식의 특징은 무의식인데 억압된 것인 정신분석에서의 무의식과 달리 그 자체로는 선도 아니고 불선도 아니다. 저장식이 조건을 만나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으로 드러날 때 선, 불선의 판단 대상이 된다. 우리는 흔히 우주의 역사 138억년, 지구의 역사 46억년, 생명의 역사 38억년,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 20만년 등의 말을 한다. 그리고 우리 몸에 담긴 유전정보의 역사는 생명의 역사인 38억살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전생, 현생에서 내가 경험한 것들이 저장되어 있고 폭포수처럼 흐르고 있다가 인연과 조건이 맞으면 불쑥 튀어나와 영향을 미칩니다.”(73, 74 페이지)란 저자의 말을 이런 관점에서 음미할 만하다.(단세포 생물이었을 태초의 생물체가 지금의 복잡한 사람과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할 경우 생각할 수 있는 대안은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 20만년이다.: 송경화 지음 ‘불량 엄마의 생물학적 잔소리’ 참고)

오온(五蘊)은 다섯 감각기관(五識)과 의식(意識: 六識)이 대상을 만났을 때 발생하는 반응과 경험을 말한다. 우리는 그런 경험의 과정을 자아라 믿고 집착하는데 이를 아집(我執)이라 한다.(정신분석에서는 그런 착각, 집착을 동일시라 한다.) 윤회의 주체는 7식인 마나식이다. 저자는 7식을 자아의식이라 부른다. 오염된 자아의식은 저장식을 자아로 취하고 집착한다. 자아의식은 저장식을 대상으로 발생하는데 경험이 저장되는 것을 자기라고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중요한 점은 자아의식은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수행의 의지를 내는 것도 자아의식이 있기 때문인 것을 보면 그런 점을 알 수 있다. 서양 심리학에서 마나식에 가장 가까운 개념이 ego이다. ego가 작동하지 않으면 업이 작동하지 않는다. 왜곡하지 않고 대상을 경험한다는 의미이다. 마나식이라 불리는 자아의식은 저장식이 그렇듯 무의식이고 선과 불선이 아닌 중성의 특성을 갖는데 중성인 이유는 어떻게 작동할지 몰라 그런 것이다.

자아의식이 저장식과 다른 점은 번뇌에 덮여 있어 마음을 어지럽히고 깨달음을 방해한다는 점이다.(88 페이지) 우리는 이론적으로는 내 몸이 ‘자아’가 아님을 알지만 실제로는 자아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나의 생각이나 의견도 자아가 아니다. 경험에 소유권을 발동시키는 것을 경험에 집착한다고 하고 심리학 용어로는 투사(投射)한다고 말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느낌, 기억도 순수한 내 것이 아니다. 무엇이든 항상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다.(94 페이지)

비교해서 일어나는 열등감, 우월감은 다 아만(我慢)이다.(96 페이지) 저자가 경계할 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만(我慢), 아애(我愛), 아견(我見), 아치(我癡) 등이다.(아애는 자기중심적 사랑이다. 아견은 자아의식을 말한다.) 아치는 자기에 대한 무지를 말한다. 우리는 무의식 차원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한다. 영원히 살 것이라는 말을 최면처럼 자신에게 거의 매일 속삭이듯 말한다는 한 자연과학자(뇌과학자)가 생각난다.

저자는 자각 없이 경험을 하면 할수록 무지를 증장(增長)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말한다.(99 페이지) 생각 없이 배우는 것은 허망하다(학이불사즉망: 學而不思則罔)는 공자의 말이 생각난다. 저자는 감정과 자아를 분리해 볼 것을 주문한다. 그것을 탈동일시라 한다.(참고할 것은 자동으로 굴러가는 반응들을 전부 다 생각하고 의식하면서 행하는 반응으로 되돌려버리는 탈자동화이다.: 배철현 외 지음 ‘낮은 인문학’ 참고)

감정 중 가장 강한 것이라 할 화(火)에 휩쓸렸을 때 그것을 직접적으로 억압하거나 조절하는 것은 백발백중 실패로 끝나게 된다. 이때 몸(또는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뇌가소성(可塑性)과 마음이 뇌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 불교의 명상수행과 뇌과학의 만남에 의해 입증되면서 명상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107, 108 페이지) 무아(無我)는 자아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아의식이 작동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번뇌장은 정서적 장애(아집我執 즉 자아집착)이고 소지장은 인지, 지각, 사고적 장애(법집法執 즉 대상에 대한 집착)이다.(불교에서 말하는 법은 Dharma와 dharma가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법은 dharma로 분해할 수 없는 최소단위를 의미한다. 설일체유부는 아공법유, 유식은 아공법공을 주장한다.: 한자경 교수 지음 ‘불교의 무아론’, 이정우 외 지음 ‘문명이 낳은 철학 철학이 바꾼 역사 1’ 참고)

번뇌의 장애(障碍)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공(我空)해야 즉 나를 비워야 하고, 소지(所持)의 장애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법공(法空)해야 즉 너를 비워야 한다. 비운다는 것은 나와 너가 소통하고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다. 경험이 저장되는 것을 자아라 느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했는데 저자에 의하면 진정한 나는 불성(佛性), 진여(眞如)이다.(113 페이지) 저자는 바른 자세를 유지한 채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한다.(115 페이지) 이는 몸(또는 호흡)을 볼 때 유의해야 할 지침이다.

자아의식은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 등의 순서로 발생한다. 이는 불건강한 경우이다. 촉은 감각기관과 대상의 접촉을 말한다. 작의는 감각대상을 마음에 취하는 요인을 말한다. 수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느낌,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상은 대상을 변별하는 마음을 말한다. 사는 마음이 대상으로 이동하는 의도나 주의를 말한다. 반면 앎의 과정에 의지, 관점의 전환, 알아차림, 선정(禪定), 지혜(智慧)의 작용이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한 경우이다.

제8식인 저장식(아뢰야식)과 제7식인 자아의식(마나스식)은 아라한과에 가야 알아차릴 수 있다. 유식 수행의 출발점은 감정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이다.(126 페이지)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려 불건강하고 공격적인 행동들을 하게 된다. 유식을 공부함으로써 알게 되는 사실은 세상과 타자, 나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환(幻)에 좌우되어 사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항상 선(善)한 심리 상태에 있거나 불선(不善)한 심리 상태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선한 심리 상태와 불선한 심리 상태가 절대 동시에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렇다. 물론 마음은 찰나적으로 선과 불선의 상태를 너무 빠르게 오간다. 이 때문에 선과 불선의 상태가 동시에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가 자신의 다른 저서인 ‘나를 치유하는 마음여행’에 소개한 감각 조율, 감정 조율, 생각 조율, 기억 조율 등의 네 가지 조율법을 보며 다음의 구절을 떠올렸다. “비록 출구가 없는 상황 속에 갇혀 있다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그 상황을 존재의 영원한 질서라고 단정할 권한이 없다.”(김인환 지음 ‘상상력과 원근법’ 253 페이지)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받은 남동생과의 차별을 섭섭하게 생각해 어머니를 향한 무의식적인 미움과 원망감을 가진 한 여성의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여성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따뜻한 보살핌과 돌봄보다 특정 순간의 섭섭한 감정을 아주 강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맥락이 다소 다르지만 통하는 바가 있다. 특정 순간, 상황을 존재의 영원한 질서라고 단정해서는 안 되는 것은 특정 감정에 고착되어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통스러워 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저자는 유식심리학이 유식무경(唯識無境)을 주장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일체유심조를 주장한다는 이야기는 모두 오해라 말한다.(146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유식무경은 유식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지 유식 자체가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아니다. 유식은 “파도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바닷물과 바람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如濤波依水: 15송)”란 말을 통해 외부 대상을 분명히 긍정한다.

유식무경은 우리가 주관적으로 경험하거나 내면적으로 상상하고 착각한 모양이 실제로 바깥 현상에 그대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지 밖에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식(識) 역시 주관적으로 파악하고 내면적으로 상상되는데 이 경우에는 무식(無識)을 써서 무식무경이라 하지 않는 것은 특별하게 여겨진다.(저자가 말했듯 유식이란 우리는 각각 다르게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에 의하면 중관(中觀)은 그릇된 생각과 견해를 치유 대상으로 하고 유식(唯識)은 그릇된 생각과 견해 뿐 아니라 불건강한 정서, 감정도 중요한 치유 대상으로 삼는다.(147 페이지) 유식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가 있고 없는지 여부가 아니라 대상을 보고 일으킨 이미지, 영상, 관념, 신념, 판단, 이해 등이 지극히 주관적인 이해이고 앎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유식의 근본 목적은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알고 경험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깨닫지 못한 탓에 자기의 견해나 믿음을 강조하는 사람들, 그로 인해서 상처받고 상처를 주는 사람들을 치유하고자 하는 것이다.(148 페이지)

유식은 우리의 경험은 물처럼 흐르고 찰나생멸하는데 기억은 편집, 조작, 퇴색되고 오염된다는 것을 말한다. 기억이 편집, 조작, 퇴색되고 오염된다는 것은 뇌과학의 주장이기도 하다.(표현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유식은 생각이 멈추면 즉 자아의식이 작용하지 않는다면(탐욕심이 끊어지면) 선정(삼매)에 들 수 있음을 가르친다. 저장식(8식)과 자아의식(7식)은 아라한과를 성취한 경우에 알 수 있(다고 하)지만 ‘감정, 정서 수준으로 드러나면’(말이나 행동, 생각으로 드러나면) 평범한 사람들도 알 수 있다.(150 페이지)

욕망이나 화 자체를 억압하고 막기는 쉽지 않다. 그렇게 하다가는 도리어 욕망의 대상이나 화나는 대상을 향해서 나는 화가 나지 않는데 상대가 나를 이렇게 화나게 만든다는 식으로 자신의 화나 욕망을 합리화할 수 있다.(151 페이지) 대상이 없이 느끼거나 생각할 수 없기에 우리의 느낌이나 생각에는 이미 대상이 포함되어 있다.(159 페이지) 인연(因緣)이란 말이 알게 하듯, 대상에 반연(攀緣)하여 느낌과 생각이 일어난다는 설명이 말해주듯 나의 느낌, 나의 생각이라고 주장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159 페이지)

우리의 앎과 경험이 찰나적으로 발생, 소멸하는 것은 잘 설명이 되지만 저장이 되고 그것으로 인해 어떻게 윤회하는지는 오온, 십이연기, 사성제 등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 유식은 마음의 기능을 6식(분류, 범주화), 7식(자아의식), 8식(저장식)으로 세분화한 것이다. 저장식은 종자식이라고도 하는데 조건이 맞아 밖으로 드러날 때 이전 모습과는 다르게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이숙식(異熟識)이라 한다. 감정 속에는 항상 자아의식이 숨어 있다. 감정을 통해 자아에 대한 집착, 고집 등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168 페이지)

무경(無境)이 우리가 주관적으로 경험하거나 내면적으로 상상하고 착각한 모양이 실제로 바깥 현상에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 무아(無我) 역시 우리가 나라고 믿는 그런 나란 존재는 없다는 의미이다. 느낌과 생각 등이 대상을 반연하여 생기듯 나 역시 너를 의지해 존재한다. 불교는 나에 대한 집착이 괴로움의 뿌리이기 때문에 무아를 강조한다. 나란 존재는 우리들이 스스로에 대해 갖는 자아상일 뿐이지 객관적 실체가 아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일체 만물은 연기적 존재이기 때문에 상호의존적인데(의타기성인데) 여기에는 계산하고 따지고 집착하는 성질(변계소집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 자아의식이 개입되지 않는다면 원성실성이 된다.(183 페이지) 저자는 우리는 어떤 것을 경험할 때 한쪽 극단만을 보게 되므로 반대 극단의 무의식을 동시에 알아차리려는 의도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185 페이지) 우리가 불교 수행을 하는 것은 좀 더 행복하고 자유롭기 위해서인데 자각이나 중도적 태도가 없을 경우 수행을 열심히 할수록 ‘내가 한다’는 아만심을 더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표상(表象)은 마음 밖에 존재하는 사물의 모양이고, 심상(心象)은 마음 안에만 존재하는 생각이 만들어낸 모양이다. 표상은 우리의 마음상태에 따라 외부 대상에 마음을 투사해 보는 것이다.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할 경우 뱀은 없지만 착각의 단초가 된 새끼줄은 실제 존재한다. 심상은 전적으로 생각이 만들어낸 모양이다. 무아(無我)나 공(空)은 관계에서 고통하고 갈등하는 우리들이 어떻게 서로 협력하고 이해하면서 상생할 수 있는지에 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190 페이지)

중요한 것은 알고 보면 무아나 공이란 것도 생각이나 신념, 관념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이다.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념적 분별을 하기 위해서 하는 논의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불교 수행의 궁극적 목적 가운데 하나는 고통을 여의고 기쁨을 얻는 것(이고득락: 離苦得樂)이다. 깨달음은 궁극의 목표가 아니다. 사물에 이름을 붙여 집착하는 것은 표상에 집착하는 것이고, 관념에 집착하는 것은 심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둘 다 부정적이고 바람직하지 않다.

저자는 사랑도 이름이고 우리가 만들어낸 개념이기에 사람의 인격에 따라 천차만별의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이를 보며 생각하는 것은 성관계는 없다는 지젝의 말이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무아(無我)이지만 유식불교는 ‘나’를 인정해준다.(198 페이지) 물론 중생이 있다고 느끼는 ‘나’를 인정해주고 그것이 어째서 진짜 ‘나’가 아닌지를 설명한다. 유식의 의미는 주체와 객체는 없고 그냥 앎만 있다는 것이다. 주체와 객체가 어우러져 생성되는 앎만이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아프지 않으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몸을 의식하지 않는다. 몸을 의식하는 것은 아픈 부위가 있다는 의미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이 부분을 읽었다. 1 ~ 25송은 중생의 마음의 발생과 작용을 이론적으로 설명한 노래(게송)들이다. 26 ~ 30송은 실천방법론에 대한 설명을 해놓은 노래들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중심적인 면과 타자중심적인 면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저자의 말을 들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적절하게 나를 내세우고 그런 만큼 상대를 배려한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나를 모르는 것일까?

유식 27송은 수행으로 신통력을 얻거나 신비체험을 하는 것은 유식의 뜻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가르친다.(217 페이지) 저자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은 세속적 가치들이고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근본 가치, 시공간을 초월한 초세간적 가치를 깨닫기 위해 노력할 것을 주문한다.(224 페이지) 본질적으로 동일하지만 현상적으로는 여전히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수행자가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 생각에만 붙잡혀 있으면 비현실적이 되는데 즉 현실을 모르고 순진한 것인데 이는 더 닦을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식 29송은 우열에 의한 차이가 아니라 조건과 상황에 따른 다양성을 아는(또는 일체 현상의 본질적 동질성과 드러난 현상의 차이를 분별할 줄 아는) 분별지(分別智)를 갖출 것을 주문한다.(228, 231 페이지) 진공묘유(眞空妙有)란 무분별지와 분별지를 동시에 작용시킴으로써 차이가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묘한 관찰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238 페이지) 신호등의 빨강, 파랑, 노랑 신호는 전체의 가치는 동일하지만 기능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통해 본질적으로는 전혀 차이가 없지만 현상적으로는 차이가 있음을 의미하는 진공묘유를 비유적으로 알 수 있다.

저자는 나와 너의 분별이 없는 것을 태양이 만물을 성장시키면서도 스스로는 만물을 성장시킨다는 의식이 없는 것과 유사한 것으로 설명한다.(240 페이지) 이는 당나라의 어느 선사의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한 선사가 절땅을 부쳐먹는 사람을 살피러 가려고 마음먹었는데 그 경작자로부터 음식을 푸짐하게 대접받게 되었다. 자신이 올 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는 선사에게 그는 토지신이 알려주었다는 말을 한다. 선사는 무심공부를 하지 못해 귀신에게 들켰다고 반성을 했다고 한다.(신규탁 지음 ‘선사들이 가려는 세상’ 참고)

본문에도 나오지만 “불교를 공부한다는 것은 자신을 공부하는 것이다. 자신을 공부한다는 것은 자신을 잊는다는 것이다. 자신을 잊는다는 것은 모든 것들과 친숙하게 된다는 것이다.”란 도겐 선사의 말도 생각할 만하다. 이치를 깨달았다고 해서 습관적 에너지가 바로 극복되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고통의 원인을 자각하고 원인을 알았다고 해서 그것을 소멸시킬 도를 닦지 않으면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감정을 온전하게 자각하면 그 밑바닥에 있는 감정의 뿌리인 자아의식(ego: 제7식)을 만나게 된다.(250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자신의 감정을 놓치지 않고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감정이 연극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오고, 자신의 감정이 문득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251 페이지) 이를 어빙 고프먼의 ‘자아 연출의 사회학’의 요지(要旨)에 비추어 생각해 볼 만하다.

저자는 무분별지에서 분별지로 갈 것을 가르친다. 깨달음을 바탕으로 현실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송나라의 한 선사가 남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산은 산 아니요 물은 물 아니요. 산은 물이요 물은 산이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란 게송이 떠오른다. 유식 수행의 최종 목표는 전식득지(轉識得智)의 성취이다. 이 단계에서 오감감각은 성소작지(成所作智)가 된다. 제6식은 묘관찰지(妙觀察智)가 된다, 자아의식(7식)은 평등성지(平等聖智)가 된다. 저장식(8식)은 대원경지(大圓鏡智)가 된다.

육도윤회(六道輪回) 즉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천국, 인간 등을 떠도는 것은 그에 합당하는 심리상태가 있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지옥은 공격성, 불안, 공포, 폐쇄공포증 등을 갖는 상태이다. 아귀는 지칠 줄 모르는 끝없는 욕망의 심리 상태를 말한다. 축생은 어리석음, 그리고 본능적이고 충동적(성욕, 식욕)인 상태를 말한다. 아수라는 질투하고 경쟁하는 일에 고도로 몰입된 편집증, 망상증적 심리상태이다. 천국은 지복, 희열, 환희 등의 상태이다. 인간은 자아 추구를 향한 갈망, 열정이 특징인 상태이다.

불교는 6도 중 어느 한 영역에 국한하지 않고 이들 정신적 문제들을, 서로 윤회하는 고통의 수레바퀴로 인식함으로써 인간의 고통을 보다 근본적이고 전체적으로 다룬다.(265 페이지) 정신치료와 불교 명상을 통합하여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정신과 의사 마크 엡스타인은 서양의 심리치료와 육도윤회의 가르침을 비교해 보여주었다. 프로이트는 축생도에 중점을 두고, 분석심리학자들은 불안과 공격성이 특징인 지옥도에 중점을 두고, 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은 천국에 중점을 두고, 자아심리학자들은 인간도에 중점을 둔다는 것이다.

영국의 심리학자 도널드 위니컷은 대상관계이론을 통해 성인이 세상과 관계하는 방식은 그가 어릴 때 부모와 맺은 관계방식이 내면에 형성된 틀에 의한 것이라는 말을 했다. 인간(단계)만이 고통을 자각해 수행의 염(念)을 낼 수 있다. 그렇기에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는 일차적 노력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의 심리 상태를 인간 마인드로 가져오는 것이 중요하다.(270 페이지) 세상을 보면 인간의 모습을 한 채 수시로 축생, 아귀, 지옥 귀신 등이 되는 사람들로 넘친다. 우리는 삼차원 공간에 제한된 몸과, 시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마음 사이에서 분열된 존재이다. 마음을 몸에 붙여두는 것이 필요하다.

소가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초식남을 생각해 볼 만하다. 초식남은 초식만을 하는 남자가 아니라 자신의 영역에서 좀체 벗어나지 않는 소극적이고 폐쇄적인 남자이다. 마음이 몸을 떠나지 않고 그때그때 일어나는 몸의 감각을 알아차리면 부정적인 상태에 빠지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다.(282 페이지) ’치유하는 유식 읽기‘는 불교, 특히 유식불교의 가르침을 심리학 지식에 근거해 쉽고 리얼하게 설명한 좋은 책이다. 여러 참신한 해석 가운데 유식과 무경의 의미를 바로 알게 한 것은 의미가 크다. 이론적 배움을 함께 하며 수행에 전념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