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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인문학’은 2013년 7월 이후 2015년까지, 미국의 사회비평가 얼 쇼리스가 시작한 클레멘트 코스(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교육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대학 수준의 인문교육)로부터 단서를 얻어 ‘성 프란시스 대학’이란 이름으로 교소도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법무부와 함께 인문학 교육을 실시한 서울대학교의 여덟 교수들의 강의들을 모은 책이다. 서문을 쓴 배철현 교수(종교학과)는 교도소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 착안해 우리 모두는 교도소와 같은 동굴 안에 오만과 편견이란 족쇄로 결박된 수용자라는 플라톤의 말을 전한다.

플라톤은 타자가 만들어놓은 이데올로기를 성급하게 자신의 것으로 상상하고 무비판적으로 쫓는 삶의 모습을 에이카시아(eikasia)라 불렀고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것들이 허상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아채고 과거와의 급격하면서도 거친 결별을 한 상태를 피스티스(pistis)라 불렀다. 서문을 쓴 배철현 교수가 첫 강의로 나섰는데 제목은 ‘당신의 마아트는 무엇인가‘이다. 마아트는 우주의 균형이자 원칙일 뿐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구성원들의 조화, 개개인의 삶에 있어서 일생 동안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개인의 최선(最善), 노력의 과정을 말한다.

자신에게 맡겨진 교유한 미션을 찾는 소명(召命)을 따지는 기회인 심판을 인류역사상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작품이 이집트의 ’사자(死者)의 서(書)‘이다. 배철현 교수는 자신의 마아트가 무엇인지 고민해볼 것을 권한다. 배철현 교수는 우리가 인문학적인 소양을, 남을 이기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두 번째 강의는 강성용 교수(인문학 연구원 부교수)의 ’생각에 대해 생각하다‘란 강의이다. 강성용 교수는 까르마(業) 이야기를 하며 고대 인도인들의 사유방식에서는 생각이 너무 중요했다고 말한다.

고대 인도인들은 생각으로 짓는 죄와 행동으로 죄를 짓는 죄를 같은 것으로 보았다. 까르마를 짓는 것으로 우리는 불교에서 신(身), 구(口), 의(意)를 든다는 것을 안다. 까르마를 짓지 않는 것은 결국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이다. 행복이라 하면 세속적인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그 안에 해탈도 들어 있다. 강성용 교수는 행복을 이루는 방편으로 요가를 든다. 그런데 현재 요가의 절반은 사실상 인도 전통이 아닌 기독교 전통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이 진기하게 여겨지기까지 한다.(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배할 당시 기독교적 요소가 섞여 들어간 것이다. 비틀스는 요가가 전세계적으로 알려지는 데에 큰 몫을 했다.)

요가는 몸을 다스리는 것을 통해 마음을 수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강성용 교수는 우리가 하는 굉장히 많은 일들이 자동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며 자동으로 굴러가는 반응들을 전부 다 생각하고 의식하면서 행하는 반응으로 되돌려버리는 것을 탈자동화라 설명한다. 초기 불교 수행을 할 때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것이 걷기 명상 즉 동작을 천천히 의식하며 알아차리며 발을 옮겨놓는 것인데 이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우리 머릿속의 생각에 제동을 거는 의미가 있다. 우리가 의식해야 하는 것은 내 마음, 몸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의미의 무아(無我)이다.

3강은 김헌 교수(인문학 연구원 HK 교수)의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부제: ‘일리아스’에 담긴 삶의 의미)이다. 레이몽 크노는 “모든 위대한 문학작품은 ‘일리아스’이거나 ‘오딧세이아’”란 말을 했다. 모든 위대한 문학작품은 이 두 작품을 어떤 방식으로든 베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전자는 처절한 전쟁(트로이아 전쟁)이야기이고 후자는 오딧세이아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겪는 모험 이야기이다.(오딧세이아의 아내는 페넬로페이고 아들은 텔레마코스, 오딧세이아가 자신의 아들을 맡긴 사람은 멘토이다. 페넬로페는 구혼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낮에 천을 짜고 밤에 풀어버리는 행동을 되풀이함으로써 실종된 남편을 저버려야 하는 재혼의 날을 지연시켰다.)

“문학작품이 인생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우리 인생 역시 싸움 아니면 모험이라는 말”이 된다. 트로이아 전쟁은 트로이아의 왕자 파리스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가 눈이 맞아 발단이 되었다. 메넬라오스는 격렬한 분노에 휩싸여 형 아가멤논과 함께 그리스 연합군 10만명을 모아 트로이아를 공격한다.) 3강은 '일리아스‘의 중요 줄거리를 요약한 강의이다. 파리스는 불화(不和)의 여신 에리스로부터 유래한 ’가장 아름다운 여성에게’ 전하라는 사과를 받을 주인공을 선정하라는 제우스의 미션을 받아들여 제우스의 아내 헤라, 지혜의 여신이지 전쟁의 여신인 아테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등 세 여신 가운데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건넸다.

돈과 권력, 싸움의 기술 등을 포기하고 아름다운 여인과의 사랑을 택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시민들을 상대로 한 강의에서 ‘일리아스’의 최고의 영웅이 누구냐는 김헌 교수의 질문을 받은 한 분이 뜻밖에도 파리스를 지명했다는 사실이다. 파리스는 스파르타의 왕비와 눈이 맞아 달아난 바람둥이 왕자이다. 파리스가 권력이나 강한 힘, 지혜 등보다 사랑을 택한 것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고 조국을 10년 동안이나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한 끝에 멸망에 이르게 한 파리스의 사랑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한 선택이라 말하는 것은 지극히 편향적이다.

김헌 교수는 애증, 분노, 이런 극단적인 감정의 종말이 결국은 죽음이라는 것이 이 위대한 시인이 남긴 위대한 작품의 전언이 아닌가 싶다고 말한다. 홍진호 교수(독어독문학과)는 4강 ’기억, 미래를 만드는 과거’에서 독일인에게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논한다. 이 강의는 히틀러(나치 독일)의 만행으로 인한 아프고 부끄러운 과거에 관한 강의이다. 당시 독일은 히틀러의 압제에 침묵했다. 이본 셰라트의 ‘히틀러의 철학자들’이 말해주듯 철학자들은 정치의 도구가 되었다.

특기할 사실은 1970년 폴란드 유태인 희생자 기념비 앞에 무릎을 꿇은 빌리 브란트 독일 수상의 용감한 행동이었다. 당시 그의 방문은 계획에 없던 돌발적인 것이었다. 홍진호 교수는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잘못은 반복된다고 말한다. 독일의 과거청산 노력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50년이 지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인상적인 것은 필자의 전공인 독일문학의 주요 문인 중 하나인 귄터 그라스를 소환한 것이다. 그라스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로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을 하던 좌파의 진보적 인사였다.

그런데 그가 79세이던 2006년에 발표한 자서전인 ‘양파 껍질을 벗기며’가 논란을 낳았다. 이 책에는 그라스가 17세이던 때에 악명 높은 히틀러의 친위대인 SS에 속했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라스의 경력은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신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장편 소설) 역시 그라스의 경력과 같은 의미로 수렴하는 사건을 다룬 책이다. 필자는 ‘책 읽어주는 남자’에 대한 몇몇 엇갈리는 해석과, 독일 사람들과 다른 나라 사람들의 다른 반응을 덧붙인다. 그들은 서로 다른 과거, 공유되지 않은 기억을 가졌기 때문이다.

김현균 교수(서어서문학과)는 5강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에서 라틴 아메리카를 어떻게 볼 것인지를 논한다. 김현균 교수는 친숙함은 인식의 장애라는 카렐 코지크의 말을 예로 들며 새로운 인식,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 따라 라틴아메리카의 사례를 살펴본다. 이 장에서 필자는 입장의 상이함에 따른 서로 다른 생각의 사례들을 논한다. 필자는 “그대들은 자신의 오리엔탈리즘을 세워보거라”란 고은 시인의 말을 소개한다. 여기서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이란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우리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말한다. 그런데 그냥 자신만의 관점이라고 하면 좋았을 텐데 왜곡된 관점 또는 편견을 의미하는 오리엔탈리즘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좀 아쉽다.

필자는 ‘슬픈 열대’를 통해 서구인들의 이국취향을 강하게 비판한 레비스트로스도 피상적인 관찰로 원시부족사회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 형성에 일조했음을 지적한다. 최근 이상희 박사의 ‘인류의 기원’과 알폰소 링기스의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를 통해 식인종 전설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을 접했는데 필자는 콜럼버스가 ‘항해록’에서 식인종에 대해 언급했음을 지적한다. 필자와 두 책(‘인류의 기원’과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의 차이는 두 책이 식인종 이야기는 과장, 왜곡된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반면 필자는 “오직 식인 풍습만이 우리를 단결시킨다.”는 말로 식인종이 무엇이 문제냐는 항변을 한 1928년의 브라질 작가이자 문화운동가인 오스바우스 지 안드르지의 사례를 전함으로써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열어놓았다는 점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식인풍습의 긍정적 형태를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을 했다. “식민지 정복에 나섰던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가서 (원주민들을) 고문하거나 노예사냥을 자행했던 모든 곳에 식인풍습이 존재했다고 증거도 없이 단언했다.”(‘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 211 페이지) “식인종에 대해 기록한 사람 중 누구도 자신이 직접 봤다고 기록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웃 부족의 이와 같은 증언(”우리는 그런 짓을 하지 않지만 숲 저쪽에 있는 놈들은 무지막지한 식인종들이다. 나도 잡아먹힐 뻔했는데 용감히 빠져나왔다.“)은 식인종에 대한 인류학적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인류의 기원’ 27, 28 페이지)

필자에 의하면 식인종 선언의 핵심적 내용은 음성적 유사성에 착안해서 “사느냐 죽으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question”)라는 문장을 절묘하게 패러디한 “투피족이냐 투피족이 아니냐, 그것이 문제로다(Tupi or not Tupi, that is the question”)라는 문장에 함축되어 있다. 햄릿의 실존적 고민이 들어있는 문장을 패러디하는 과정 자체가 서구 문화를 비판적으로 전유해 새로운 문화를 빚어내는 방식의 좋은 예시가 되는 셈이라는 것이다.(투피족은 브라질 토착민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에 투피 카와히브족이 나온다.)

장재성 교수(불어불문학과)는 6강 ‘우리가 추구할 가치는 무엇인가’에서 서양문명의 두 양상인 로고스와 엑소더스를 다룬다. 필자는 대문자로 쓴 로고스는 기독교의 로고스이고, 소문자로 쓴 로고스는 그리스적인 로고스라 설명한다. 기독교에서는 대문자 로고스가 신적 로고스와 인간적 로고스를 모두 의미한다. 요한복음 1장 1절인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은 “만물의 근원에 신적 로고스와 인간적 로고스의 특성을 동시에 지니는 예수가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기독교적 로고스에 따르면 세상에는 빛과 어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빛만 존재한다. 어둠은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 없는 상태이다.

빛이 있을 뿐 어둠은 없다는 말로부터 선(善)이 있을 뿐 악(惡)은 없고, 삶이 있을 뿐 죽음은 없다는 말이 도출된다.(물론 어둠은 빛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는 말로 어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의아하다. 어둠은 빛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는 식의 말을 따뜻함과 차가움의 관계에 적용해보자. 즉 차가움이란 실체는 없고 따뜻함이 없는 상태일 뿐이라는 말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차가움이라는 실체가 있어 차갑거나 따뜻함이 부재해 차갑거나 차갑다는 점에서는 하나이다. 물론 신적 속성인 빛, 선, 삶만이 실체이고 죽음은 영원한 삶으로 가는 통과의례라 주장할 것이다.)

필자는 흔히 헬레니즘과 기독교는 상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두 가지가 다르다고 말하는 이유는 헬레니즘은 철저히 개인의 사고의 자유를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지만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가 하나의 종교로 공인한 순간부터 공인된 것 외에는 모두 이단이 되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이다.(249 페이지) 필자는 헬레니즘의 창시자 알렉산드로스와 기독교의 창시자 예수의 행동과 사상의 핵심을 떠남의 코드인 엑소더스로 풀어낸다. 알렉산드로스는 신이 되기 위한 자아를 찾아서, 그리고 자신을 신으로 모실 타자를 찾아서 그리스를 떠났고, 예수는 인류의 구원자로서의 자아를 찾아서, 그리고 구원의 대상자인 타자를 찾아서 천국을 떠났다.(250 페이지)

필자는 알렉산드로스가 그리스 전역을 정복한 후 왜 동쪽으로 갔는지를 물으며 이는 사도 바울이 서쪽으로 간 것과 재미있는 대비를 이룬다고 설명한다. 칸트가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예수는 고향 유대 지역을 벗어난 적이 없다. 이는 바울의 행보와 대조적이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당시 최고의 문명국이었던 그리스와 로마에 기독교의 씨를 뿌린다. ‘사도행전’ 16장 6 - 7절에서 바울은 의외의 말을 한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바울은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아 동쪽으로 못 가고 서쪽인 트로이로 간다.(261 페이지. 3강의 필자인 김현 교수는 트로이는 영어 표기, 트로이아는 그리스어 표기라 말하며 트로이아란 표현을 사용한다.: 81 페이지 이후) 바울이 로마 선교를 택해 기독교를 전 세계 종교가 되게 한 것으로부터 신자유주의 혁파의 실마리를 얻고자 하는 흐름이 있는데 사도행전 구절을 보면 바울이 동쪽으로 가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 하지만 환상으로 마케도니아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본 바울이 그것을 터키 서쪽의 그리스 땅으로 가라는 것으로 해석한 부분은 이야기 거리를 제공한다.

가령 바울을 급진 정치철학자로 여기는 관점(2013년 출간 맹정현, 서동욱 외 지음 ‘싸우는 인문학’ 수록 서동욱 씀 18장 사도 바울은 왜 급진 정치철학자로 각광받는가‘ 참고)은 그렇기에 단편적이다. 덧붙여 바울이 예수의 메시지를 관념화시켰다는 말 역시 재고되어야 한다. 바울은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아(이 역시 직접 육성으로 들은 것이 아니라 상징으로 계시된 바를 해석한 결과이기에 오독, 또는 오해와 전적으로 무관할 수 없지만...) 자신이 본 환상으로 마케도니아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그리스 땅으로 가라는 말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로 갔을 뿐이다. 물론 예수의 바람(또는 명령)과 바울이 예수의 메시지를 관념화시킨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필자는 요한복음 1장 9, 10절(“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을 예수의 진정한 첫 번째 엑소더스라 설명한다. 필자에 의하면 그것은 죄에서 떠나고 죄의식에서 떠나라는 의미의 엑소더스이다. 필자는 그것을 예수의 정언명령(定言命令)으로서의 엑소더스로 풀이한다. 필자는 또한 ’육신(장막)에서 신의 왕국으로’를 최후의 엑소더스로 풀이한다. 바울, 베드로 모두 사람의 몸을 장막으로 표현했다. 박찬국 교수(철학과)의 7강 ‘당신은 어떤 삶을 살 것인가‘는 에리히 프롬의 사상을 통해 삶의 본질을 해명한 강의이다.

프롬은 삶의 양식을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으로 나누었다. 소유양식이 많이 소유한 만큼 삶이 풍요롭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고 존재양식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하면서 그 실현에서 기쁨을 느끼는 삶을 말한다.(278 페이지) 프롬은 서로 대립각을 세우는 두 가지 사조(특히 실존주의와 마르크시즘)를 모두 수용하면서 종합하려 했다. 프롬은 소외이론으로 대표되는 마르크스 사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실존철학 역시 매우 높이 평가했다. 실존철학은 인간 개개인은 사회구조로 환원될 수 없는 독자성을 갖는다고 본다. 이를 설명하며 필자는 복지가 아주 잘 되어 있지만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는 스웨덴 같은 나라를 예로 든다.

이 부분을 보며 생각하게 되는 것은 복지가 너무 잘 되어 사람들이 동기(動機)를 상실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죽음을 택하는 것이라는 해석은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프롬의 이론이 이에 답을 주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 개개인은 사회구조로 환원될 수 없는 독자성을 갖는다는 실존주의적 통찰이다. 프롬은 20세기의 여느 사상가들과 달리 종교, 특히 신비주의를 긍정적으로 수용했다. 마르크시즘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종교 특히 신비주의를 인류의 소중한 자산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프롬은 종교적 신비체험을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정신상태라 보았다.

신비체험이란 우리가 편협한 에고에서 벗어나 세계의 궁극적인 근원과 하나가 되면서 만물과 하나가 되는 우주적 사랑과 충만을 경험하는 것이다. 프롬은 마르크스주의, 실존철학, 종교적 신비체험과 프로이트 이래의 정신분석학도 크게 수용했다. 평생 현대인들의 병적인 삶과 병적인 사회구조를 치유하기 위해 고뇌했던 프롬은 사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행동가이기도 하다. 프롬은 선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사람으로 매일 한두 시간씩 참선을 했다고 한다. 프롬이 말한 존재양식이란 나르시시즘을 극복한 삶이다.(288 페이지) 프롬은 비유신적 휴머니즘을 자신의 신조로 삼았다.

프롬은 (한나 아렌트, 마르틴 부버처럼)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들의 국가 건립을 반대했다. 1926년 프롬은 장신분석의인 프리다 라이히만과 결혼하면서 정신분석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프롬은 프로이트와 달리 인간의 삶을 가장 강하게 규정하는 요인으로 성충동이 아닌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꼽았다. 이 부분은 도구 제작이나 사용을 위해서라기에는 너무 큰 인간의 두뇌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사회적 두뇌 이론(사회성이 높은 동물이 뇌도 크다는 이론)과 견줄 여지가 있어 보인다.

프롬은 스피노자가 그랬듯 삶을 통해 자신의 이론(존재 양식의 삶이 중요한 것이라는)을 보여준 철학자이다. 프롬은 한국은 물론 독일의 출판사들로부터도 인세를 제대로 지불받지 못했지만 담담히 받아들였는데 이는 자신의 책이 많이 읽히는 것이 중요하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에 따른 것으로 이 부분이 삶을 통해 자신의 이론(존재 양식의 삶이 중요한 것이라는)을 보여준 것에 해당한다. 그의 그런 삶의 모습과 특정 종교나 특정 이데올로기에 집착하지 않고 모든 철학과 종교에 개방적인 자세를 취한 것은 너무나 잘 조응(調應)한다.

다윈이 인간의 신체적 특성을 큰 두뇌, 작은 치아, 도구 사용, 직립 보행 등으로 들었는데 프롬은 인간의 근본적인 특성을 사유 능력으로 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유란 언어에 의하지 않고는 실현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도구나 언어 사용도 사유능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말한다.(293, 294 페이지) 중요한 것은 인간 이성의 오용(誤用) 또는 오만(傲慢)이 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갈등의 주요한 원인이라는 점이다. 프롬은 합일에의 열망, 초월과 창조에의 열망, 삶의 의미를 갖고 싶은 열망 등이 성욕이나 생존에의 욕망보다 훨씬 더 강하게 인간의 삶을 규정한다고 보았다.(296 페이지)

내 지론(持論)처럼 필자는 사름들은 신이나 정치 지도자를 위해 그것들을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자신을 위해 믿는다고 말한다.(298, 299 페이지) 필자는 기독교에는 권위주의적인 성격과 인본주의적 성격 양자를 함께 가지고 있는데 서로 모순되기에 우리는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말한다.(300 페이지) 프롬은 고독감, 무력감, 허무감을 극복하는 데는 항상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사랑은 물론 존중과 책임의식을 바탕으로 한 사랑이다. 프롬은 사랑과 지혜라는 인간의 능력을 성숙시키는 종교나 철학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허무감에서 벗어나게 하면서 삶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기독교나 불교를 믿는 사람도 사실은 신이나 부처에게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니 사실은 신이나 부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돈을 믿는 것이고 신이나 부처를 돈을 벌게 해주는 수단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303 페이지) 소유양식은 쾌감을 낳고 존재양식은 기쁨을 낳는다. 기쁨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올바른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고 쾌감을 느끼는 와중에도 자신의 삶이 공허하다며 잘못된 길에 빠져 있다고 느끼게 된다.(304, 305 페이지)

프롬은 존재양식의 삶을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 여섯 가지를 들었다. 1) 소유욕에서 벗어나는 것, 2)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 3) 과거에 대한 회한이나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 완전히 존재하는 것, 4) 자기 이외의 어떠한 인간이나 사물도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것, 5)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지만 다른 사람으로부터 속지도 않는 지혜로운 인간이 되는 것, 6)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수양하는 것 등이다. 마지막 지침은 사실 다섯 번째까지의 지침이 실행하기 대단히 어려운 것들이기에 덧붙인 메타적 지침이라 할 수 있다.

’신화 속에 담긴 삶과 죽음의 관계‘를 부제로 하는 유요한 교수(종교학과)의 8강 ’죽음을 성찰하고 그 너머를 바라보다‘는 동서양의 신화 속에서 건져낸 우리들 성장에 조건이 되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 강의이다. 미국 출신의 인도학자(Indologist) 웬디 도니거(Wendy Doniger: 1940 - )는 신화는 그것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는 어떤 사람들에게 공유되는, 신성한 이야기라는 말을 했다. 필자는 시간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기에 역설적으로 시간의 극복이라는 주제는 신화와 문학, 예술, 영화 등에서 반복해서 채용된다고 말한다.(316 페이지) 무의식 속에서 우리 모두는 자신의 불멸성을 확신한다는 프로이트의 말대로 많은 사람들이 실로 죽음을 초월한 영생을 갈망하며 살아간다.

어떤 신화든 결국 죽음이란 어떤 것이며, 왜 인간에게 죽음이 닥쳐오는지를 성찰하는 이야기이다. 필자는 우리 삶에서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누구나 이전의 존재와 결별하는 상징적인 죽음을 경험하고 전이의 단계에서 나름대로의 혹독한 시련을 감당하고 이겨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나만의 시련과 고난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극복하면 좋을 것이라는 의미이다.(356 페이지) ’낮은 인문학‘은 기획이 돋보인다. 인문학이란 이름으로 무게감과 거리가 있는 편성을 보이는 다른 많은 책들을 압도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