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이래 서현 교수는 인문학적 건축가로 불려왔다. 그의 신작 ‘빨간 도시’는 독특하다. 오르한 파무크의 빨강에 착안한 이 책은 순수의 비현실성을 일깨운다. 파무크의 빨강이 숭고와 죄의 혼재를 상징한다면 서현 교수의 빨강은 획일적 가치와 이분법적 사고의 지양을 의미한다. 파무크의 빨강이 저자를 통해 창조적으로 재사유된 셈이다.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를 통해 저자는 건물이 지어지는 과정을 물리적 자원과 당사자들의 이해관계가 연관되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정의하며 그럼에도 그런 구체적 현실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건축의 의미를 믿는다는 말을 들려준 바 있다.

이번 책에서 저자의 그런 문제의식은 건축가의 작업을 도시와 자연 사이에 존재하는 넓은 스펙트럼을 찾아나가는 것으로 규정하는 데에서 더욱 구체화한다. 빨간 도시는 그런 넓은 스펙트럼과 관계된 긍정적 도시를 뜻한다. 빨간 색이 긴 세월 동안 우리에게 낙인과 금기의 색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그런 변화가 주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서현 교수에게 건축가는 인간 중심의 창의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역동적 주체이다. 천시(天時)와 지리(地利)의 중재자인 인화(人和)의 담당자인 셈이다.

‘빨간 도시’는 인간 중심의 도시를 위한 저자의 대안을 만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자연과 도시의 가치 사이에서 틈새를 갖추지 못한, 서울 중심의 발전이 낳은 기형적 주거공간인 아파트, 병영(兵營)을 닮은 학교, 일탈적 만남을 매개하는 러브호텔, 비정상적 의식(意識/ 儀式)을 담아내는 예식장과 장례식장이라는 공간, 시민을 압도하는 권위적 건물의 상징인 관공서, 서가와 열람실의 위상이 역전된 공공 도서관, 접근성면에서 낙제점인 미술관 등은 인간 중심의 도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지양해야 할 건축물들이다. 물론 작가에 맞춰 건물을 지은 환기미술관의 획기성이나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 자리한 플라토 미술관 등의 파격은 기대에 값하는 자산이다.

반면 유니세프의 아동친화도시 사업을 시작한 도시, 차가 아닌 보행자가 우선시 되는 도시, 도시 전체가 문화 도시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 세워진 도시 등 저자가 소개하는 외국 도시들의 사례는 부러움을 자아낸다. 로테르담, 크라이스트처치, 릴 등으로 불리는 그 도시들은 근대적 합리성의 도시들이다. 그렇지만 “어느 곳에서나 문제는 있고 해결해야 한다.“(202 페이지)는 저자의 설명에 유의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자연은 선이고 도시는 악이란 이분법“이며 “개발은 이기적이고 보존은 이타적이라는 도식적 사고는 근거 없고 섣부르다.”(141 페이지)는 저자의 설명 역시 그렇다. 저자는 건축의 물음은 근본적이며, 건축가가 되려면 상상력과 논리적 설득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건축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존재”하며 ‘건축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은 건물이 일상의 소비재가 아니고 다음 세대를 위한 문화적 환경이라는 가치관’이라고. 또한 “도시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의 공간이 아니고 차분하게 오늘을 사는 시민의 삶의 터전이어야 한다.”고. 저자는 인간을 지향하고, 시간을 사유하고, 공간을 다루는 인문학적 지식인이다. 건축가 서현의 난독일기라는 부제를 가진 ‘또 한 권의 벽돌’이 인간, 시간, 공간, 그리고 시간, 다시 인간이라는 챕터들로 구성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건축가가 공원을 설계하는 데 철학자가 이론적 배경을 마련해주며 해체주의 건축을 탄생시키는 것이 유럽의 힘이라고 강조하는 저자는 철학과 건축의 상관성을 역설하는 철학 박사/ 건축학 박사인 브랑코 미트로비치를 연상하게 한다. 

‘빨간 도시’는, 건축은 기법이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창의적 상상력과 관계된 인문적 가치임을 알게 해주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건축가는 음악과 미술, 시와 소설을 두루 감상하고 종교와 철학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추체험하듯 했다. “나는 빨강이어서 행복하다!...나는 숨기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섬세함은 나약함이나 무기력함이 아니라 단호함과 집념을 통해 실현된다. 나는 나 자신을 밖으로 그려낸다...나를 기다리는 여백을 나의 의기양양한 불꽃으로 채우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내 이름은 빨강’ 1권 중에서) 빨강의 의미를 이렇게 음미해 본다. 새로 만들어 나가야 할 도시에 ‘빨간 도시’는 중요한 참고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