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1992년 첫 출간)이 개정 출판되었다. 융 학파의 심리학자인 클라리사 에스테스(Clarissa P. Estes)가 쓴 이 책은 늑대와 여걸(女傑)의 하나로 해석될 수 있는 평탄치 않은 운명을 밝히고 여성의 야성(野性)을 회복하는 방법을 제시한 책이다. 가부장적 가치관을 지닌 전통적 심리치료 이론들과 차별적인 여성주의 심리학의 필요성을 역설한 미리암 그린스팬이 그런 것처럼 “융 계통의 심리학자겸 이야기꾼”인 에스테스는 기존의 심리학 이론 대신 융 심리학의 여걸 원형 연구에 근거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야기꾼’이라는 말을 입증하듯 에스테스는 ‘푸른 수염’, ‘야성의 어머니 바바 야가와 바살리사’, ‘마나위’, ‘아눌룩과 오룩’, ‘미운 오리새끼’ 등 여러 이야기들을 융 학파의 원형 이론으로 해석해 낸다. 에스테스가 말하는 여걸이란 여성 본연의 본능, 길들여지지 않은 여성을 함께 의미한다. 그리고 야성은 여성으로 하여금 창조력을 발휘하게 하고 삶의 에너지로 이어지게 하는 힘이다.

‘길들여지지 않은‘이란 말은 파괴적이거나 부정적인 것을 뜻하지 않고 ’’자연스런‘, ’피조물이 본연의 건전한 한계를 지켜나갈 수 있는‘ 등을 뜻하는 형용사이다. 에스테스에 의하면 건강한 여성은 늑대와 아주 비슷해 활력이 있고 힘과 생기가 넘친다. 또한 자기 영역을 잘 지키고 창의적이고 충직하다. 물론 야성은 사회규범 포기나 인간성 상실 등과 무관한 현명함을 특성으로 지닌다. 에스테스는 말한다. 우리(여성) 각자가 여걸의 존재를 증명하며 전체로서의 여걸의 처지를 반영한다고. 그런데 세계의 여러 동화나 전설, 설화들은 변형되고 왜곡된 채 전해지고 있다는 지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기에 에스테스처럼 그 이야기들을 꼼꼼히 연구해 패턴을 발견하고 사라진 부분들을 재구성해내는 능력이 중요하다. 에스테스는 여걸을 이해하는 일은 끊임없는 과정이고 필생(畢生)의 과제이기에 자신의 책은 아직도 진행 중인 작업이라고 규정한다.

에스테스는 여성의 영혼과 늑대의 영혼이 만나는 ’라 로바‘ 이야기의 라 로바의 집을 정신과 본능이 섞이고 여성의 깊은 생명이 일상적인 삶을 만들어내는 곳이라 설명한다. 그리고 여성의 명상(冥想)은 죽거나 찢겨나간 자아들을 불러 모으는(되살리는) 작업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 이 이야기로써 알 수 있는 것은 복원과 회복의 중요성이다. 에스테스의 명상 특히 여성의 명상에 대한 정의 만큼 인상적인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에스테스는 여성 속에 깃든 남성적 에너지 또는 힘을 의미하는 아니무스를 다리(교량)의 일종으로 설명하며 그것이 강하고 큰 여성일수록 더 쉽고 능률적이고 멋지게 자기의 생각을 실현하고 창조적인 일을 해낸다고 말한다.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은 창조 이전의 상태의 심리차원으로 천적(天敵)을 내려 보내 더 좋은 형태로 다시 태어나게 함으로써 창조의 작업에 참여하는 여성에 대한 정교한 서술이 돋보인다, 에스테스의 이론은 정신분석학과 여러 면에서 차별적이다. 꿈만 해도 그렇다. 꿈을 정신질환으로 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달리 에스테스는 정치의식이 높고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여성들이나 여권 운동가들이 괴이한 꿈을 많이 꾸며 깨달음에 이르기 직전 꿈을 많이 꾼다고 본다. 에스테스가 강조하는 것은 번개 같이 빠른 통찰력과 감각 및 지혜를 의미하는 직관의 힘이다. 에스테스에 의하면 직관은 이성과 무관한 희한한 기벽(奇癖)이 아니라 진정한 영혼의 목소리이고 가장 이로운 존재이다,

에스테스에게서는 심리와 사회 현실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바람직한 균형을 유지하는 점이 돋보인다. (어머니의) 친절함은 (딸의) 야성을 용인할 수 있지만 야성은 지나친 달콤함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는 에스테스의 진의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해당하겠지만)에게 독립심과 개척 정신을 요구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친절함과 (딸의) 야성 사이의 갈등은 평범하지 않은 여성을 박해하는 사회에 서 지배계급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과 자기 아이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어머니 콤플렉스와 함께 생각해볼 이슈이기도 하다. 에스테스는 여성의 본능과 야성성을 되찾은 사람은 자신을 유혹하는 것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고 말한다. 필요한 것은 어머니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야성적인 내면의 어머니를 되찾는 일이라는 에스테스의 답은 현명하다.

당연하지만 여성적 본능을 인정하는 세계에서는 외모보다 생기, 민감함, 인내력 등을 훨씬 더 소중히 여긴다.(본능은 의식과 잘 결합될 경우 인간을 전인적인 존재로 이끌어줄 내면의 힘이다.) 에스테스는 다친 본능을 회복하기 위해 마음껏 뛰고 소리치고 원하는 것을 차지하라고 조언한다. 이 부분에서 새길 것은 우리가 특별한 심리의 안식처를 준비하면 신적인 존재, 창조적인 힘, 영혼의 원천이 어느덧 알고 찾아와 깃든다는 원형심리학의 논리이다. 에스테스는 아니무스가 여성의 내면에 깃든 남성적 영혼의 힘이라는 융 심리학의 전통과 달리 그것이 낯설고 남성적인 힘이 아니라 친숙하고 여성적인, 물론 부정성을 띠는 힘이라고 정의한다.

에스테스에 의하면 영혼 - 자아인 여걸이 예술가라면 아니무스는 그 예술가의 팔이다. 에스테스의 논리는 신비주의적 모호함의 색채를 띠기도 하지만 명상의 동기를 스스로 찾아내고 예술적 창조력을 길어올리는 데에 유용하다. 에스테스의 조언이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될 곳은 예술 분야인 듯 하다. 물론 예술과 창의적 삶, 그리고 여걸의 삶은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에스테스가 이야기를 새로 읽어내는 것이 지난한 과정이었던 것에서 보듯 자신의 무의식과 내면, 그리고 삶을 잘 그리고 창조적으로 읽어내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성적(性的)인 것을 성(聖)스러운 것으로 인식하는 에스테스는 본능에 충실한 삶을 제시하는 전사 같게 여겨진다.(융은 성적인 문제로 자기를 찾아온 이들이 대개 영혼이나 정신에 문제가 있었다고 말한다.)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을 읽으며 조셉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떠올렸다. 우리에게는 고난과 역경을 이기는 신적 의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놀랍도록 희박한 확률로 태어난 우리는 이미 신적 존재들이지만 그 만큼 뛰어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드물다. 무기력에 길들여진 야성적 자아는 회복되어야 한다.

덧붙이자면 늑대들은 최악의 상황을 만나도 효과적이고 유연하게 대처하며 어떤 재난이 닥쳐와도 당황하지 않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나 동료와의 관계를 잃지 않는다. 또한 삶/ 죽음/ 삶이라는 운명의 주기를 품위 있게, 유연하게 살아낸다. 가능한 한 배우자의 곁에 머물며 오래오래 보람 있게 살고자 한다.(152 페이지) 늑대들은 생존에 필요한 때만 사냥을 한다. 늑대에게 정상적인 패턴이 느슨해지는 것은 이들에게 질병이 돌았을 때 뿐이다.(242 페이지) 늑대들은 위험하거나 즐거운 일이 생기면 잠시 동안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온 정신을 집중한다.(306 페이지) 늑대는 자기 영역을 침범하는 존재의 뒤를 그림자처럼 좇는다. 번개처럼 나타났다 연기처럼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면서 침입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390 페이지)

서두에서 늑대로 인해 생태계가 회복되었다는 말을 했지만 그것은 늑대가 그 자체로 미덕을 지닌 이상으로 결손된 고리가 복원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야성 회복의 필요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에스테스는 이야기가 지닌 치유의 힘을 언급하며 이야기를 들려줄 때는 시간, 장소, 듣는 이의 여건, 내용 등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야기에는 부모와 조부모는 물론 조상신이 들어있기까지 하다는 에스테스의 말은 원형의 위상을 잘 말해준다. 독자 여러분이 직접 이야기를 경험하기를, 피와 눈물과 웃음으로 이야기를 꽃피우고 그것과 더불어 활짝 피어나기를 바란다는 에스테스의 말을 기억하고 활용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