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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하고 어설펐던 갓 스물을 넘긴 내가 어떤 계기와 연유로 조성기 작가의 ‘라하트 하헤렙’을 읽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어쩌면 읽기는 출간 직후가 아닌 십년 공백 끝에 교회로 돌아가 청년회에 적(籍)을 둔 첫 해인 1989년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민음사 주최의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제 9회: 1985년)인 ‘라하트 하헤렙’은 선악과를 먹고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야훼가 그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한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최윤의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강석경의 ‘가까운 골짜기’, 고종석의 ‘기자들’, 한강의 ‘여수의 사랑’ 외에 이렇다 할 1980, 1990년대의 소설을 읽지 못한 내가 비교적 순수했던 1970년대의 기독교적 정서를 추체험(追體驗: 다른 사람의 체험을 자기의 체험처럼 느낌. 또는 이전 체험을 다시 체험하는 것처럼 느낌)하고 서울대학교 법대를 나와 전업 작가로 활동 하다가 ‘십일조는 없다’ 등의 책을 쓰는 등 목회자 직도 겸하고 있는 조성기 님에 대한 경의 표시로 그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2년 전의 일이다.(‘라하트 하헤렙’은 197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그런데 당연하게일 수도 있지만 내가 들은 것은 그 책이 절판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한 외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하지만 빛이 바랜 데다가 활자가 읽기 불편할 정도로 작아 확대복사를 해야 했다. 지난 7월 그렇게 가지고 싶었던 책을 빌려 복사본 형태로 갖게 되었지만 마음과는 달리 읽히지 않았다. 작품을 완성된 책의 형태로 가지고 있는 것과 복사본 형태로 가지고 있는 것이 읽기를 자극하는 정도면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읽기는 하루 하루 지연되었고 다른 책을 읽느라 잊고 지내던 중 최근 그 책이 지난 8월 개정판 형태로 재출간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근조절기(謹弔節期)‘ 등의 작품들을 제외하고 라하트 하헤렙만을 담은 개정판 책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리차드 도킨스의 ‘에덴의 강’을 중심으로 에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도킨스의 책은 "에덴에서 강 하나가 흘러나와 그 동산을 적신 다음 네 줄기로 갈라졌다.”는 창세기 2장 10절에서 유래한 ‘면면(綿綿)히 이어지는 생명의 강’을 이야기한 책이지만 그가 말하는 강은 '유전자의 강'이고 'DNA의 강'이었다.

도킨스의 이 용례(用例)는 에덴이란 곳이 실재하지 않고 비유나 상징으로만 받아들여진다는 메시지로 해석될 만하다. 하지만 최근 나온 브룩 윌렌스키 랜포드(Brook Wilensky Lanford)의 ‘에덴 추적자들(Paradise Lust)’을 보면 사정이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랜포드는 에덴 추적자들(Eden Seekers)이 에덴의 지도를 그릴 정도로 강박적이었다고 말한다. 특이한 것은 여러 에덴 추적자들이 각기 다른 곳을 에덴으로 특정(特定)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에 의하면 에덴은 북극과 몽골사막과 플로리다의 가장 오래된 지질층과 페르시아만 바다 등지에서 각기 발견된 잃어버린 낙원으로 기록되어야 할 곳이다.

에덴동산에 대해 기독교측은 “상징적인 의미로 우리 마음에 창설되었다기보다 실제로 이 지구상에 창설되었다고 믿어야 한다.”(이원희, 신현주 지음 ‘성서 속의 역사와 지리‘ 13 페이지)고 말한다. 이원희, 신현주 두 목회자는 에덴동산을 인류 최초의 문명 중심지인 티그리스와 유프라데스 강, 그리고 나일강의 중심지인 중동지역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누구도 자신있게 그 위치를 주장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 말하며 에덴동산이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은 노아의 홍수와 함께 멸망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창세기 3장 16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그런데 조성기 작가는 작품 속 인물인 조각병 성(成) 상병을 통해 한글개역 성경의 화염검이란 표현은 칼의 이미지가 더 강렬하게 부각되어 히브리어 뉘앙스를 살리지 못한 점이 있기에 불의 이미지와 칼의 이미지가 어우러지는 라하트 하헤렙을 제목으로 설정했다는 말을 들려준다. 라하트 하헤렙은 성 상병이 제대하는 주인공 신 병장에게 선물한 조각의 제목이기도 하다. 성 상병은 두루 휘도는 칼 모양의 불길로 인해 에덴동산이 동편에서부터 불타오르기 시작한 것은 아닌가 추측한다.

에덴 동산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나온다.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그것이다. 선악과는 야훼가 먹지 말라고 한 나무이고 생명나무는 그 명령을 어긴 아담과 하와가 먹지 못하도록 야훼가 라하트 하헤렙으로 지킨 나무였다. 그런데 성 상병의 말을 따르면 야훼가 에덴 동산을 지켰다기보다 불태웠다고 해야 옳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그 동산이 노아의 홍수와 함께 멸망했다는 두 목회자의 이야기와도 다른 해석이 된다. 중요한 것은 선악과가 범접(犯接)된 이후 생명나무에 대해 차단 조치가 취해졌다는 사실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고 난 이후 생명나무에의 접근이 차단되고 낙원에서 쫓겨난 것 곧 죽음을 맞이한 것은 섹스를 알게 된(유성생식을 하게 된) 이후 죽음을 맞이하게 된 인간을 떠올리게 한다. 과학저술가 도리언 세이건은 에덴동산 이야기를 하며 ”그러나 성경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섹스와 죽음에는 어떤 연결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말을 한다.(‘죽음과 섹스’ 147 페이지) 시인 이승훈은 기능이나 방향을 중심으로 불을 둘로 나눈 슈나이더에 의거해 에로티시즘, 태양, 물질적 에너지를 재현하는 지상의 불과, 신비주의, 순화 또는 승화, 정신적 에너지를 재현하는 천상의 불이라는 두 차원을 이야기하며 그런 특성에 의해 불은 물질적 파괴와 정신적 결정(結晶)을 상징하는 칼과 같은 양가적 의미를 소유한다는 말을 한다.(‘문학으로 읽는 문화상징사전’ 261 페이지)

이는 불 모양의 칼 또는 칼 모양의 불 즉 라하트 하헤렙의 이미지와 공명(共鳴)한다. ‘라하트 하헤렙‘에 나오는 인물의 하나로 조각칼로 나무를 깎고 다듬어 형태를 부여하는 성(成) 상병은 신 병장에게 투명체로 묘사한 예수의 육체 속으로 푸른 리가트 항구의 바다와 배들이 통과하도록 그림을 그린 살바도르 달리를 설명한다. 불길 같은 달리의 시선(視線)과 에트나화산의 분화구에 몸을 던진 엠페도클레스 등을 이야기하는 그가 예술적이라면 촛불을 불어 끄며 니르바나를, 웃는 듯 하면서도 그 웃음과는 무관하게 묘한 표정을 지어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제 정신이 아닌) 아름다운 동순에게 동정(童貞)을 바치며 소신공양(燒身供養)을, 군종병이 되기 전 맡았던 페치카 일을 하는 자신과 동료 사병들을 보며 조로아스터교(배화교: 拜火敎)의 신실한 신자들을 연상하는 신 병장은 종교적이다.

반면 촛불을 보며 여성의 음부를 연상하고, 사랑하는 정미를 생각하며 여체의 환상에 빠지고 동순에게 첫 사랑을 바치는 신 병장의 모습은 성(性)이라는 또 하나의 다른 통과제의를 다룬 부분으로 읽힌다. 이승훈 시인은 뜨거운 활력으로서의 불은 선(善)을 상징하고 파괴와 화재로서의 불은 악(惡)을 상징한다는 말을 한다.(‘문학으로 읽는 문화상징사전’ 262 페이지) 이 말을 증거라도 하듯 ‘라하트 하헤렙‘ 이 보여주는 불에 관한 묘사들은 다채롭고 양면적인 만큼 인상적이다.

군종 사병의 실화(失火) 때문에 전출 조치를 당하고 진급도 하지 못하게 된 뒤 강박신경증에 걸린 군목(軍牧)이 군종실(軍宗室)에 끊임없이 찾아와 불단속, 문단속을 제대로 했는지 체크하는 모습은 파괴와 화재로서의 불이 남기는 트라우마를 보여준다. 성 상병으로 하여금 ”어떻게 보면 그 불(에덴 동산의 불)은 정화의 불길이었네”라는 말을 하게 한 조성기 작가는 자신의 소설을 “군대를 중심으로 여러 불길을 통과하는 내 젊은 날의 초상인 셈”이라고 말한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은 “흔히 성장소설에는 이른바 입사식(initiation)이라는 것이 모티프로 등장하는데, 가정을 벗어난 주인공이 학교나 사회에서 이런저런 부조리와 직면하여 싸우면서 패배하거나 승리하게 될 때, 이에 수반되는 반성적 능력의 고양(高揚)이 성장소설의 진면목을 이룬다.“는 말을 한다.(’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111 페이지) 내가 지난 시절 ’라하트 하헤렙‘에 감동했던 것은 군대라는 낯선 공간에서 주인공 군종병이 취하는 성찰적 행위들과 기독교적 구원의 모색에 감정이입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28년(또는 24년)의 시간은 ’라하트 하헤렙‘이란 작품을 군대를 무대로 기독교적 구원을 모색하지만 결국 절망감을 확인하는 소설로 읽는 것을 넘어 반성적 능력의 고양과 ”해방이면서 상실“이고 ”자유면서 죽음“이며 ”정화이면서 심판“인 삶의 단면을 그린 통과제의적 소설로 보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신 병장은 예수의 삶을 살고자 목말라 한 시간들을 광기 어린 허비의 세월로 치부하며 자신은 감히 예수의 삶을 살아갈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자멸감을 느낀다.(198, 199 페이지)

’라하트 하헤렙‘은 사회 인류학자 에드먼드 리치(Edmund Leach)가 구조주의의 다섯 명제로 설정한 전체성(totality), 변형(transformation),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 매개항(mediation), 통과의례(initiation) 등 구조주의의 명제(’성서의 구조인류학‘ 참고)에 모두 들어맞지는 않는다. 하지만 통과 의례적 면모는 전형적으로 들어맞고 이항대립적 면모는 전형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이 작품이 사회(또는 가정)에서 군대로의 분리 의례와 주변적 상태, 그리고 통합 의례의 3단계를 보여주기 때문(통과 의례)이다.

또한 도나텔로라는 조작가의 ’막달라 마리아’라는 작품에 동순의 광기 어린 모습을 더해 습작을 하는 성 상병이 ”죽죽 찢겨져서 아래로 꿈틀거리며 치렁치렁 드리워진 속치마“를 ”아래로 치내리는 불길“이라 말하는 대목(172 페이지)에서 알 수 있듯 솟아오르는 불과 아래로 치내리는 불이 (작은) 대립항을 이루기 때문이다. 강박신경증적인 군목과, 무장해제된 듯 보이는 동순의 정신 상태 역시 (작은) 대조를 이룬다.(이항대립) 반면 같은 정화(淨化)를 상징하는 물과 불은 근원적으로 같다. 물은 격정적인 삶의 내용들이 말끔히 순화된 삶을 의미한다.

낙엽을 태우는 불길 앞에서 진오귀 굿 춤을 추는 동순을 보며 성 상병은 동순이 자기 몸에 붙은 귀신을 저승길로 편안히 가라고 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동순은 조각실에서 시작된 불에 얼굴을 흉하게 다친 뒤 제 정신을 찾고, 미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가 강간당할 뻔 한 뒤 정신병자로 몰려 타의에 의해 정신치료를 받던 정미는 회복되어 외무 고시에 합격한 사람과 결혼한다. 조각실, 장교 숙소, 군인교회는 다시 지어진다. 반면 군목은 두 번째 화재를 당하고 홀연히 사라지고 신 병장은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읊조린다.

"희한하게도 (군인) 교회가 소멸하는 그 불길 속에서 진정한 교회의 주인을” 보았으며 “교회나 선교 단체 같은 유형적 조직에는 영원히 속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히곤 했다.“는 신 병장의 고백은 그대로 나의 고백이기도 하다. 성 상병이 선물한 조각상을 보며 ”불길의 이미지와 칼의 이미지가 그토록 정교하게 융합된 작품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불길에서 칼의 이미지를 도출해 낼 수 있었을까.“란 신 병장의 감회 역시 그대로 내 감회이기도 하다.

”나는 맨 아래 서랍을 열어보지 않는다/ 더 이상 보탤 추억도 사랑도 없이/ 내 생의 중세가 조용히 청동녹 슬어가는// 긴 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서랍을 연다/....통증을 누르고 앉은 나머지 서랍처럼/ 내 삶 수시로 열어보고 어지럽혀왔지만/ 낡은 오동나무 책상 맨 아래 잘 정돈해둔 추억/ 포도주처럼 익어가길 얼마나 바라왔던가// 닫힌 서랍을 나는 오래오래 바라본다/ 어떤 숨결이 배어나올 때까지”(강신애 지음 ‘서랍이 있는 두 겹의 방’ 수록 ‘오래된 서랍’ 중에서) ‘라하트 하헤렙’은 긴 여행에서 돌아와 서랍을 열어본 시인의 심정으로 읽은 작품이다. 언젠가 다시 읽게 되겠지만 내 삶의 무늬에 따라 정해질 시기는 나로서도 알 수 없다. 그때는 또 어떤 느낌으로 읽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