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 교수가 슬라보예 지젝, 자크 랑시에르, 지그문트 바우만, 가야트리 스피박, 사이먼 크리츨리 등 현세계의 주류 철학자들을 인터뷰한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는 현장성과 시의성 면에서 최선의 책으로 여겨진다. 나에게는 우리나라에서는 촛불 시위가, 전세계적으로는 금융위기가 일어난 해인 2008년이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지나친 해석인지 모르겠으나 이런 변혁의 시기이기에 근본적인 것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택광 교수는 칼 슈미트에게서 비롯된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분리를 논한다. 저자 말대로라면 이는 궁핍한 진보주의의 현실을 보완하기 위한 결과이다. 이는 소련을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보고 싶어 토니 클리프의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같은 책을 읽고,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중국혁명의 정치적 목표는 결국 민족자본주의 건설”이라는 원톄쥔(溫鐵軍) 중국 인민대학 교수의 말(2013년 10월 20일 경향신문)에 주목함으로써 어떤 타개책을 찾고자 하는 나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진보주의의 현실을 보완하고 다시 보기 위한 과정에서 나온 이택광 교수의 작업은 지적 계보도의 작성 차원에서 행해진 것이다. 그는 프랑스 사회의 보수주의를 이해해야 프랑스산(産) 이론들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26 페이지) 프랑스 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들뢰즈이다. 그는 라캉과 함께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이론의 출발점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사르트르를 외부라는 취지로 규정한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외부란 사유된 것을 통해 사유되지 않는 것들을 발견하게 해주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의미라고 저자는 설명한다.(30 페이지) 이는 텍스트가 말하지 않는 것들을 통해 의미를 파악하는 징후적 독법을 연상하게 하는 면이 있다. 이 외부라는 개념은 또한 ‘말과 사물’을 통해 푸코가 연구하고자 했던 인식의 무의식적 지반을 연상하게도 한다.(이진경 지음 ‘외부, 사유의 정치학’ 30 페이지) 이택광 교수는 정치적인 것은 고정적인 것이라기보다 유동적이고 편재하는 장(場)이라고 말한다.(35 페이지)

여기서 정치적인 것은 사유의 대상이고 정치는 과학의 대상이며, 정치학이 정치적 체계의 객관적 지식에 매달린다면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유는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영역의 분화가 구성하는 사건들을 이해하려고 하며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유는 근대사회의 영역들을 분화시키는 원칙의 기원에 대해 질문한다는 클로드 르포르의 정의(定義)를 참고하게 한다. 르포르의 말은 한마디로 정치학이 실재적 특징을 갖는 것들에 관심을 갖는다면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유는 사회적 공간을 제도화하는 원칙들을 드러내는 것이다.(‘현대정치철학의 모험’ 33 페이지)

다시 푸코 이야기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이는 인간의 경험이 언어화할 때 세계와 주체 또는 경험과 이론 사이에 존재하는 규칙성 즉 담론의 질서(‘담론의 질서’ 131 페이지)를 연상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궁핍한 진보주의의 현실을 타개하고 새롭게 읽어내는 노력은 경제결정론에 경도(傾倒)된 마르크스주의의 정치학을 부정하기 위한 폴 리쾨르의 기획과도 맞닿아 있다. 사실 이런 리쾨르의 모습은 종교적 차원의 책인 ’악의 상징‘이나 해석학적 순환에 대해 논한 ’해석의 갈등‘’, 프로이트에 관한 시론인 ‘해석에 대하여’ 등으로 유명한 비정치적인 리쾨르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 보인다.

리쾨르는 정치적인 것을 계급 갈등으로 환원할 수 없는 인간관계로, 정치는 권력의 악마성으로 지칭한다.(36 페이지) 철학과 아시아란 글에서 저자는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서양에서 동양으로 진행해왔던 사상이나 이론의 이동과정에 대한 습관적인 인식을 수정해야 할 지경에 이르고 있다고 말한다.(55 페이지) 그 예는 가라타니 고진, 왕후이 등을 통해 발견된다. 특히 가라타니 고진의 시도는 주목된다. 그는 칸트로부터 맑스를 읽고 맑스로부터 칸트를 읽는 시도를 선보인 ‘트랜스크리틱’으로 주목받는 사상가이다.(이 책은 최근 재출간되었다.)

‘‘트랜스크리틱’은 고진이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이론적 체계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책으로 평가받는다. 이택광 교수는 고진으로부터 인터뷰 요청에 대한 답을 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나 역시 상당히 아쉬운데 이런 점은 앞서 클로드 르포르를 인용하며 언급한 ‘현대정치철학의 모험’에 수록된 조영일 평론가의 가라타니 고진에 대한 글인 ‘교환 X로서의 세계공화국‘이란 글을 읽는 것으로 달랠 수 밖에 없을 것이다.(한번 읽은 사람들은 재독!)

위기가 왔는데 아무도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66 페이지)는 지젝의 진단은 “젠더와 젠더 정체성의 물화(物化) 현상에 대한 비판적 지적이 계속해서 이루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판이 아직은 새로운 방식의 페미니즘적 문학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는 문학평론가 심진경의 논의(’떠도는 목소리들‘ 6 페이지)를 떠올리게도 한다. 지젝은 정치적인 분석으로 번역되지 않는 분노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며(81 페이지) 더 깊은 문제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을 철학자의 임무로 규정하며(86 페이지) 철학은 답이 아니라 물음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란 무엇보다 자신들의 태생, 재산 혹은 권력을 운용하는 전문지식 등에 의해 그렇게 운명이 정해진 사람들이 지닌 권력에 대한 위반의 표명이라고 말한다.(101 페이지) 랑시에르의 글에서 내가 배운 것은 스페인의 경우 우파와 좌파 정부 공히 세계자본주의 시장의 논리에 따라 유럽의 의회를 통해 공공 서비스의 민영화, 부과된 사회적 권리의 파기라는 똑같은 프로그램을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106 페이지)

시의 세계, 혁명의 세계, 종교적 약속의 세계 등 다른 세계들에서 온 말의 힘에 사로잡히는 노동자의 정체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랑시에르는 매력적인 철학자이다. 랑시에르는 미학(감성론)이 예술철학이 아니라 감각적 실존을 지배하는 앎과 취향의 위계들과의 단절로 특징지어지는 어떤 감각적 경험의 체제라고 정의한다.(110 페이지) 랑시에르는 또한 자신의 관심을 끄는 것은 작가의 참여 또는 무관심과 관계없이 문학적인 묘사와 서사에 자리잡고 있는 여러 대립적인 정치 사이의 긴장이라고 말한다.(113 페이지)

랑시에르는 ”현실주의자가 되라.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란 1968년의 슬로건을 상기시키며 우리가 가능한 것을 얻는 것은 오로지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한다.(121 페이지) 지그문트 바우만은 지금 우리는 좋든 싫든 정치적 공백의 시기에 살고 있으며 옛날 방식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새로운 방식들은 마지 못해 미적지근하게 사도되고 있다고 말한다.(139 페이지) 이는 ”위기가 왔는데 아무도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66 페이지)는 지젝의 진단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한다.

바우만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실업 문제는 만연한 소비주의와 분수에 넘친 삶이 캄캄한 복도로 우리 자신을 밀어넣은 결과라 말한다.(139 페이지) 바우만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미래를 저당잡히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변화를 추구하는 것,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멈추지 않는 것들이야말로 액체 근대의 삶의 양식을 규정하는 것이라 말한다.(146 페이지) 인간의 연대가 제공하는 경이와 도전, 상호협력과 우애로 가득한 세계는 이제 사라졌다고 말하는 바우만은 거듭 다른 여러 가능성이 있겠지만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는 말을 강조한다.(150 페이지) 지젝과 바우만의 진단은 지금은 이행기이고 불확실한 시대임을 깨닫게 한다.

가야트리 스피박은 주체는 넓은 개념이고 정치적 행위자는 좁은 개념이라 말한다.(158 페이지) 이는 정치적인 것과 정치의 구분을 생각하게 한다. 교육은 세상을 바꾸는 계획과 다르다고 보는 스피박은 욕망을 재배치하고 욕망을 자유롭게 하는 것에서 교육의 목적을 찾는다.(160 페이지) 스피박은 탈규제적인 금융자본주의가 전세계적 자본주의의 위기의 원인이라 규정한다. 저자가 인터뷰한 여러 철학자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스피박의 견해가 내게는 가장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읽었다.

특히 중심이 없는 오늘의 운동, 노동자를 조직한다고 금융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없다는 이야기(164 페이지), 사람들은 결코 단일하지 않으며 지배적 담론이 있더라도 사람들마다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이야기(166 페이지) 등이 그렇다.(스피박은 자신이 하는 작업은 문화정치학이지 탈식민주의가 아니라고 말한다.: 169 페이지)

 ’동물해방’ 등의 책으로 유명한 피터 싱어는 다윈주의 좌파에서 마르크스를 다윈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175 페이지) 인간 본성이 사회의 경제구조를 바꾸면 변할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이 마르크스의 실수(175 페이지)라고 말하는 싱어는 인간 본성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정치 체제를 고안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176 페이지)

분석철학을 공부하다가 대륙철학으로 옮긴 사이먼 크리츠키는 오늘날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을 굳이 구분하는 것은 따분한 일이라고 말한다.(185 페이지) 크리츨리의 말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종교적 실망과 정치적 실망에서 철학에 대한 요청이 나온다는 말이다.(187 페이지) 크리츨리는 당과 연결된 전위조직이 사회변혁을 주도한다는 지젝의 입장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하며 자신은 연방주의자에 가깝고 전적인 아나키스트적인 정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189 페이지) 크리츨리는 마르크스의 경제분석을 정치적인 것으로 전환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191 페이지)

 ‘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랴’의 한국 출간을 눈 앞에 둔 그렉 램버트는 칸트(1724 - 1804)를 언급하며 18세기 정치환경은 철학자의 평화관과 정치인의 평화관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고 말한다.(208 페이지) 알베르토 토스카노는 계몽과 광신을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생각을 비판한다. 계몽되었다고 해도 광신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213 페이지) 토스카노는 마르크스의 접근법이 쓸모 없다는 생각은 퇴행적인 이야기라고 말한다.(218 페이지) 또한 세대간 문제 또는 세대간 모순은 수탈적 경제모델의 결과일 뿐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219 페이지)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도 몰락의 지점에 도달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낀다는 제이슨 바커는 바디우를 매력적으로 본다.(226 페이지) 정치학에서 말해온 오랜 혁명의 양식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낡아버렸다고 용감하게 말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커는 자본주의는 언제나 위기상태로 오늘날 그 차이는 규모이지 질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228 페이지) 만일 마르크스가 틀린 점이 있다면 자신의 말이 얼마나 옳은지를 과소평가했다는 것 뿐이라고 말하는 바커의 마르크스 신뢰는 대단해 보인다.(230 페이지)

이택광 교수가 인터뷰한 열 명의 철학자들은 세부적인 면에서 많은 차이를 드러냈지만 현 체제가 위기이고 따라서 이론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데에서는 일치한다. 하나의 통일된 이론적 합의점을 모색하는 것이 광신의 한 형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대담자들의 답에만 집중했지만 질문을 고안해내고 인터뷰를 이끈 저자의 노력에도 주의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몸 어딘가가 썩어들어 가는데도 아프지 않다면, 이보다 더 난처한 일이 있을까? 문제는 우리의 아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에 있다.”는 이성복 시인의 말(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의 시인의 말)을 기억하고 싶다. 관념적인 글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물의(物議)는 아닌지 저어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