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런드 러셀의 ‘인기 없는 에세이’를 위해 사회학자 김성기 교수의 ‘패스트푸드점에 갇힌 문화비평’(1996년 민음사 출간)을 다시 읽었다. 이 책 수록 내용들 중 불란서제 담론의 그늘이란 글의 한 부분인 수용과 기각(accept/ discharge)이란 키워드 때문이다. 김성기 교수가 인용한 것은 “프랑스 이론가들은 당시(1970년대 말, 1980년대 초) 일본에 문화 영웅들로 몰려왔다가 곧 가버렸다“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글이다. ”푸코가 수용되면 바르트는 기각되어야 했고, 라캉이 기각되자마마 데리다가 수용되었으나 그 역시 새로운 사상가를 기다리는 자에 불과했다.“는 것이다.(‘패스트푸드점에 갇힌 문화비평’ 75 페이지)

이 책 이후 이정우 교수는 ‘가로지르기’의 장(章)인 보론(補論) 2 다섯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바로 그 김성기 교수를 언급한다. 논한 부분이 많지만 핵심만 말하자면 ”니체가 수용되면 헤겔은 기각되어야 한다. 그러나 푸코가 수용되었다고 해서 바르트가 기각될 이유는 전혀 없다. 위의 인용문은 사실 일본에서 연구된/ 유행된 프랑스 사상가들의 순서를 가리키는 것이지 이 사상가들이 선택/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그것은 프랑스 사상에 대한 큰 오해”라는 것이다.(‘가로지르기’ 227, 228 페이지)

물론 김성기 교수는 이정우 교수의 해명을 듣고 “”제가 수정하도록 하죠“, ”제가 좀 왔다갔다하는 경우가 솔직히 있습니다.“ 등의 말을 한다.(1997년 당대 출간 ‘프랑스 철학과 우리’ 83 페이지: 현대 프랑스 철학을 보는 관점 - 김성기 이정우 대담) 실수를 인정하는 진솔함과 용기와는 별개로 내게 의미 있었던 부분은 ”니체가 수용되면 헤겔은 기각되어야 한다. 그러나 푸코가 수용되었다고 해서 바르트가 기각될 이유는 전혀 없다.“는 내용이 도출된 배경이다.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러셀의 ‘인기 없는 에세이’가 플라톤의 ‘국가론’ 등 플라톤의 주요 내용들과, 헤겔 철학의 문제점들을 보는 데 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반성적 시각으로 ‘인기 없는 에세이’를 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2013년 2월 출간된 플라톤의 ‘국가‘(천병희 譯)를 읽었기 때문이다. 러셀은 플라톤, 헤겔 등을 전체주의 철학의 단초를 제공한 사상가로 보는 자유주의 사상가이다. 니체가 수용되면 헤겔은 기각되어야 하듯 러셀이 수용되면 헤겔과 플라톤은 기각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체계 면에서 러셀은 소략(疏略)한 느낌을 강하게 준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내가 플라톤의 ’국가’에 전폭적 지지를 보낸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평을 다시 읽고 확인한 것은 내가 그 글을 통해 핵심적으로 언급(인용)한 것은 이정우 교수의 ‘가로지르기‘에 의거(依據)해 ’2500년 전 폴리스에 살지 않는 우리가 플라톤을 읽는 이유는 플라톤 철학이 발생한 배경은 사라졌지만 플라톤 철학이 달성한 철학화의 높이가 가치 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다. 문제는 ’플라톤의 철학은 사회적 영향력이 전혀 없었다. 그의 철학이 생겨나자마자 그의 철학이 대상으로 했던 폴리스가 멸망했기 때문‘(’가로지르기‘ 234 페이지)이라는 글이다.

러셀은 ’국가론‘이 그 정치적 측면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로부터 찬양받았던 것은 아마도 인류사를 통틀어 가장 당혹스러운 문학적 속물근성의 사례일 것이다...’국가론‘에서 모든 것의 위에 자리잡은 교육의 주목적은 전투에 필요한 용기를 배양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어머니와 유모가 어린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엄격히 검열해야 한다.”고 말한다.(37 페이지) 러셀은 자유주의의 실천적 사조는 “나도 살고 너도 살 길을 모색하는 것, 공공질서가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 관용과 자유를 보장하는 것, 또 정치 제도에서 중용을 추구하고 광신을 배제하는 것”이라 말한다.(52 페이지)

러셀에 의하면 자유주의의 본질은 어떤 의견을 주장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주장하는가에 있다.(52 페이지) 러셀은 논의를, 진리에 이르는 수단으로 인정하지 않는 상호 경쟁하는 교조주의자들은 전쟁 이외의 어떤 방법으로도 결론에 이르지 못하며 과학이 만개한 우리 시대에 전쟁은 빠르든 늦든 세계 전체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말한다.(60 페이지)

문제는 헤겔이다. 프로이트가 청산(淸算)의 대상으로 부각되고 있듯 헤겔 역시 그런 철학자로 분류되는 게 아닌가 싶다. 헤겔, 하면 떠오르는 것이 변증법이다. 나는 물론 ‘변증법적 사유에서 다양성은 이성적 원리의 통제 밑에 조정되어 등장하며, 결국 동일성의 구성 요소로 해소(解消)되어 버리며 다양한 개체는 최후의 긍정을 산출하기 위해서 이용당한 후 결국 부정된다’는 들뢰즈의 말을 기억한다. 아니 들뢰즈의 말에 적극 공감한다.

최후의 긍정을 산출하기 위해서 이용당한 후 결국 부정되는 다양성은 전체주의에 의해 전체를 구성하는 한 부속품으로 이용당하는 개인을 연상하게 한다. 러셀은 헤겔이 “자신의 철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찬양했던 것은 프랑스와 대립하는 독일이 아니라 질서와 체제와 강력한 정부 규제를 지닌 독일”이었다고 말한다.(48 페이지) ”니체가 수용되면 헤겔은 기각되어야 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니체와 헤겔은 상이한 유형의 철학자이다. 니체는 해체주의자이고 헤겔은 형이상학자이다.

김상환 교수는 ”형이상학은 존재하는 것 전체에 대한 단일한 규정과 본질을 구한다는 의미에서 존재론이며, 유물론이나 유심론 혹은 실체론이나 원자론 등이 그에 대한 역사적 사례.“라고 말한다.(’해체론 시대의 철학‘ 173 페이지) 러셀은 헤겔의 절대 이념을 이야기한다. ”절대 이념, 이 이념은 주관적 이념과 객관적 이념을 통합한 것으로서 이념의 개념이다. 이 개념의 대상은 이념 자체이며 그 객체 또한 이념으로서 통합 안에 모든 특질을 아우르는 대상의 개념이다.“(43 페이지)

다소 심한 것 같지만 러셀은 ”헤겔과 오늘날의 마르크스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독재 체제는 오로지 맹목적인 교조주의를 토대로 삼을 때에만 그 이론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49 페이지) 러셀의 ‘인기 없는 에세이’는 이런 파격적 주장들을 담고 있지만 출간 60년을 넘긴 책이기에 오늘의 입장과 배치(背馳)되는 부분들이 있다. 물론 그의 사상의 진수를 접할 수 있는 미덕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철학을 통해 우리는 내용을 보고 배울 때도 있지만 논리적 전개나 흐름 등으로부터 배우기도 하기 때문이다.

러셀은 만일 미국이 공산주의 국가이고 소련이 자본주의 국가라 해도 사상 및 연구, 토론 등의 자유, 자비심 등을 더 존중하기에 미국이 승리하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94 페이지) 하지만 오늘날 미국은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셀던 월린 책) 등의 책이 출간될 정도로 러셀의 시대와는 격세지감이 있다. 자유는 반드시 법의 제한을 받아야 한다는 러셀의 견해는 오늘날 고삐 풀린 경제적 자유(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데 단서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철학적 사고를 잘못된 사고를 특이할 정도로 요령 있게 시도하는 일이라 말하는 러셀의 정의(110 페이지)는 설득력이 약하다. 이 말은 너무나 이상했기에 제 정신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철학을 받아들이게 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42 페이지)는 말로 묘사된 헤겔의 철학을 염두에 둔 말이겠지만 일반화의 오류가 거슬려 보인다. 러셀은 의심에서 시작해 신 존재에 대한 확신으로 나아간 데카르트의 회의(懷疑)를 이야기 한다. 데카르트의 사례는 마치 헤겔 변증법에서 처음에는 긍정되다가 결국 부정되는 차이를 연상하게 한다.

라이프니츠, 데카르트, 칸트 등은 러셀이 비판한 철학자들인데 이들이 신을 전제하거나 신을 결론(궁극의 원인)으로 삼는 사람들인 것이 내게는 두드러져 보인다. 러셀의 무신론적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 보면 지나칠까? 러셀의 무신론적 성향은 흥미와 함께 논리도 갖추어서 흥미롭다. 이런 점은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란 글에서도 드러난다. 가망이 없는 말기 환자에게 동의를 받아 안락사를 시행하면 자살이 되기에 불필요한 고통을 감내하도록 하는 종교의 지침(168 페이지)은 사실 그들이 믿는 절대자가 피조물의 고통에 눈감고 자신의 독점적 생명 처분권에만 관심을 두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회의를 부르기에 족하다.

러셀의 딸인 캐서린 러셀이 ‘나의 아버지 러셀’이란 책에서 “다른 사람들이 종교적 신앙을 가지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확실성을 원했다.”는 아버지 러셀의 말을 인용(폴 비츠 지음 ‘무신론의 심리학’ 52 페이지에서 재인용)한 것을 통해 보듯 러셀은 지적 엄격성을 갖춘 무신론적 성향을 가진 철학자였다. 물론 폴 비츠는 러셀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란 질문에 아니라고 답했지만 실제의 삶에서 도덕적 열정을 발휘할 때는 예라고 답하는 사람처럼 행동했다고 말한다.( ‘무신론의 심리학’ 52, 53 페이지)

실제로 러셀은 물리학은 원자들의 움직임을 완전히 결정하는 어떤 법칙도 알지 못한다고 말함으로써 결정론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내 안에서 의지라고 부를 만한 어떤 특별한 종류의 정신적 현상이 발생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러셀은 1950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다. ‘철학에 있어서의 과학적 방법‘, ’자유와 조직‘, ’권위와 개인‘ 등의 작품으로 인한 것인데 이렇듯 소설이나 시가 아닌 다른 문학 장르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우리의 비평가들이 소설이나 시 비평에 거의 배타적으로 치중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생각하도록 한다.

러셀의 ‘인기 없는 에세이’는 고급 에세이의 전형이다. 특히 인류에 도움이 된 관념들(9장), 인류에 해를 끼친 관념들(10장) 등은 철학과 문학, 종교와 과학 등의 개별 담론들이 어우러진 수작(秀作)이다. 인간을 도덕의 관점에서 천사와 악마의 기묘한 혼합물이라 정의하는 러셀은 프랑스 혁명의 표어인 자유, 평등, 박애 등이 종교에서 유래했으며 플라톤이 여성 참정권을 인정한 것은 오르페우스교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 말하는 등 종교에 얽힌 비밀들을 이야기한다. 오르페우스교도들이 믿은 윤회가 스토아학파로, 다시 기독교로 전해진 사실에 대한 언급은 값지기까지 하다.

인류에 해를 끼친 관념들에서 러셀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집중 거론한다. 헤겔 변증법을 숙명론으로 보는 러셀은 마르크스가 그 헤겔에게서 영향을 받았기에 즉 숙명론적 성격 때문에 반대편의 투쟁을 운명에 맞서는 짓으로 보았다고 말한다.(324 페이지) 이는 칼 포퍼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인용하게 한다. 포퍼에 의하면 마르크스는 사회란 합리적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역사적 법칙에 따라 성장하기 때문에 사회제도의 합리적 계획에 대한 신념은 전혀 비현실적이라고 비난했다.(2008년 1월 개정 3쇄 민음사 출간 ‘열린사회와 그 적들 1’ 273 페이지)

러셀의 공격을 받은 철학자들 중 플라톤과 헤겔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헤겔의 선배이다.(‘포스트구조주의의 헤겔 비판과 반비판’ 20 페이지) 현 철학계의 대세는 근대비판인데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주체와 대상의 변증법에 의해 움직이는 일자(一者)의 형이상학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돌이킬 수 없다.(‘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380 페이지) 그럼에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딜레마는 진리와 주체라는 낡은 철학적 범주를 재구성하는 노력의 결실 여부에 따라 성패가 가름될 것이다.

러셀의 오래된 새 책인 ‘인기 없는 에세이’는 그가 정통 철학자가 아니라 수많은 분야에서 다재다능의 지성을 발휘한 르네상스적 지식인임을 다시 확인시킨다. 아울러 밝힐 것은 헤겔, 플라톤, 마르크스 등에 대한 러셀의 비판은 다르게 보기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의 비판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바람직하기가지 한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서재 한쪽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꽂혀 있는 그의 ‘상대성 이론의 참뜻’을 다시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