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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자은의‘계약자’는 표층적인 면과 심층적인 면이 어우러진 묘한 소설이다. 청소년 소설을 표방한 선자은의 이 장편의 주인공은 고흐의 그림을 좋아하는 열 다섯 살의 평범한 여중생 알음이다. 그녀의 주변에는 엄마, 아빠, 할머니, 친구 소희, 신율이라는 남학생, 신율의 쌍둥이 여동생인 비진, 그리고 아버지가 데려온 남자 아이 다움 등이 있다. 그녀는 그들과 갈등은 물론 우호적 관계를 맺으며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동력으로 기능한다.

어느 날 신율이라는 멋진 남학생을 짝사랑하게 된 소희로부터 사람이 목을 매어 죽은 빈집에 가서 주문을 외우고 소원을 말하면 귀신이 나타나 계약을 맺어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는 말을 들은 알음은 그녀와 함께 빈집에 동행해 준다. 계약자는 보려는 대로 보이는 것이라는 말을 비롯해 여러 계시 같은 말을 내린다.

교통 사고로 죽은 형이 애지중지하며 모으던 피겨(figure)를 버리는 대신 애호가들에게 나눠주는 과정에서 알음과 친해지게 된 신율은 알음의 베프(베스트 프렌드)이자 신율을 이성으로 좋아하는 소희와 멀어지고 신율을 이성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로서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알음과 친해진다.

아빠가 데려온 다움이로 인해 아빠는 물론 할머니, 다움 등을 모두 미워하고 싫어하게 된 알음은 떼를 지어 몰려 다니는 불량 여학생 클럽의 짱인 비진에 호감어린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알음은 그 불량 클럽의 한 멤버인 꽁알에게 엮이어 길에서 다른 아이들의 돈을 뜯기에까지 이른다. 같이 소원을 빌고 주문을 외우고 계약을 했지만 소희가 아닌 자신을 찾아온 계약자로 인해 알음은 우쭐해 하는 한편 부끄러움을 느낀다.

계약자에게 다움이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보인 알음은 그와 달리 엄마가 사라지는 뜻 밖의 곤경에 처한다. 소희와 온전한 갈등 관계라고도, 라이벌이라고도, 친구라고도 할 수 없는 인연의 끈을 이어가는 알음은 어느 날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기술(로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닌 작품을 그리라는 말을 듣지만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알음은 소희에게“알음의 생일을 축하해주자.”고 말한 신율을 보며 자신이 소희와의 사이를 금을 가게 했고 자신이 아슬아슬하게 붙여놓은 거울을 신율이 말 한마디로 산산조각 냈다고 생각한다. 꽁알과 함께 (비록 뒤편에 물러서서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돈을 뜯는 것을 큰 체격으로 측면 지원한 것이지만) 돈을 뜯는 모습을 소희에게 들킨 알음은 꽁알을 혼내 줄 생각으로 그 사실을 소희로 하여금 학생주임에게 알리도록 부탁한다.

그 바람을 이룬 알음은 소희에게 고맙다고 말하지만 소희는 자신도 꽁알의 노예였기에 그렇게 한 것이니 고마워하지 말라고 말한다.‘계약자‘는 괴테의 ’파우스트‘와 카프카의 ’변신‘ 등의 모티프를 차용한 듯 보이지만 가족 소설, 정확하게는 적대적 가족 관계를 드러낸 소설이며 문제 학생들의 일면을 드러낸 소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의식을 반영하는 계약자라는 낯선 존재가 예술 창작의 한 계기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적 예술관을 형상화한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알음은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별이 빛나는 밤‘이 포함된 고흐의 화집에 다움이 마구잡이로 덧칠한 그림을 보며 거기에 보태진 검은 줄이 그 아이의 눈에 보이는 세상 같아서 그림과 제법 어울려 보인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림에 마구잡이로 그어진 낙서를 볼 때마다 마음 속에 일렁이던 분노가 이미 아주 오래된 이야기처럼 인식된다고 느낀다.

이렇듯 보려는 대로 보인다는 취지의 말은 계약자는 물론 신율의 말이기도 하고 알음이의 생각이기도 한 것이어서 계약자를 해석하는 방식에 한 단서로 작용한다. 영감에 휩싸여 자기의 그림을 완성하려는 알음에게 계약자는 그림을 그려서는 안된다는 말을 한다. 물론 알음의 영감은 승화된 감정이 아닌 무의식적 충동에 가깝다. 알음은 아랑곳 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데 놀랍게도 그림에 구현(具現)된 형상은 거미에서 베어브릭, 소희, 신율, 엄마, 꽁알을 거쳐 자신으로 드러난다.

계약자는 알음에게“너는 나다. 나는 너다.”란 말을 한다. 알음은“의식(儀式)과 주문(呪文)은 무엇을 불러낸 거지? 빈집에서 불러낸 게 아니라 내 속에서 불러낸 것일까.”라고 독백한다. 알음은 그림을 찢으려 하다가 자신이 처음으로 그린 ’작품‘이라는 생각에 찢지 않는다. 알음은 객관적 실재가 아닌 주관적 고뇌를 그렸다는 점에서 현대적이고 비재현적인 예술가라 할 수 있다.

본문에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바로 알음이 그 그림을 보며 그것이 일렁이고 꿈틀대고 불빛들이 이리 저리 몸을 뒤척인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 그림은 결국 알음으로 하여금 미치도록 자신의 그림을 그리도록 하는 자극이 된다. 알음은 자신의 그림 제목을‘계약자’라 칭한다. 작가는“오늘도 나만의 계약을 지켜나가고 있다. 나의 계약자는 밤마다 자꾸 나타나 무엇인가를 쓰라고 한다. 졸린데 잠을 못 자게 한다. 지독한 계약자다.”란 말을 한다.

“불변의 동일성이야말로 망상이요 윤곽은 실재의 감옥.”이라는 말(채운 지음‘재현이란 무엇인가’76 페이지)을 하면 과잉 인용에 근거한 해석일까?‘계약자’의 계약자를 귀신이라 할 수 없지만 몸을 넘어서는 나라는 존재가 나를 바꾸듯 몸을 넘어서는 나라는 존재가 일반화되면서 영, 혼, 영혼 등으로 상상되는 것이라는 한 학자의 말(‘우리에게 귀신은 무엇인가‘ 43 페이지)이 생각난다. 예술은 상투성과의 싸움이라는 말이 ’계약자‘에 얼마나 적용될지 장담하지 못하겠지만 계약자란 설정은 익숙한 듯 새롭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