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드(ЗуД)’는 저 13 세기 테무진(Temujin)이 고원(高原)을 평정해 칭기스칸(Genghis Khan)이 되기까지의 시간을 그린 김형수의 장편 소설이다. 이 작품을 읽는 데 필요한 것은 섬세한 실존적 감수성이다. 키야트의 족장(族長)인 예수게이 바타르가 타타르족의 테무진과 우게 등을 약탈하고 돌아왔을 때 태어난 인연에 따라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얻은 칭기스칸은 출생 이후 줄곧 험난한 운명의 길을 걸었다. 부족 연합체에서 버려져 초원에 내동댕이쳐지고 가족의 질서를 어지럽힌 이복 형제 벡테르를 죽음으로 응징하고 자신에게 말 타는 법과 활쏘기를 가르쳐준 스승 키릴툭에게 쫓겨 아흐레를 숲에서 지내고 타타르족에게 아버지를 독살(毒殺)당하는 등 테무진의 삶은 파노라마의 연속이었다.

 

 

픽션과 논픽션을 아울러 테무진의 생애를 다룬 작품 목록은 방대하다. 하지만 김형수의‘조드’는 그 작품들과 몇 가지 점에서 근원적인 차이를 보인다. 그것은 12 세기의 초원에 버려졌지만 파란만장한 생존 투쟁을 통해 당대의 정착민들이 꿈꾸었던 가공된 유토피아를 뒤집어버린 소년 테무진의 가치관과 칭기스칸의 체제정신이 다르다는 작가의 인식에서 기인한다. 또한 12, 13 세기 지구사(地球史)를 흔든 전무후무한 역사의지가 조드에 의해 잉태되었다는 작가의 또 다른 인식과도 관련이 있다. 물론 토템이 다루는 기원의 문제, 오리엔탈리즘의 문제 등도‘조드’를 남다르게 인식하게 하는 요인으로 손꼽혀야 한다. 조드는 물이 부족한 건조지대에서 가뭄과 혹독한 추위가 함께 어우러져 생명 있는 것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자연의 대재앙이자 그 구성원들의 서열을 명확하게 가르는 자연선택적 메커니즘이다.

 

 

12, 13 세기의 역사의지가 조드에 의해 잉태되었다는 작가의 또다른 인식은 인간이 한랭한 기후에서 먹을 것과,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해 궁리하는 과정에서 뇌가 발달했다는 인류의 시베리아 기원설과 유사한 구성력을 지녔다. 조드는 분별을 요구하는 고원의 바람소리가 열두 가지나 된다는 사실과, 나이와 색깔에 따라 말을 부르고 분류하는 명칭이 수십 가지에 이른다는 사실 등 몽골 고원의 신비한 일면을 보여주는 사례들과 겨루어도 전혀 뒤지지 않는 자연의 일부이다. 한편‘조드’에서 토템 이야기는 그 규칙을 깨고 야반도주해 보르칸산(山)에서 살림을 차린 사슴족 처녀와 늑대족 사내 이후 까마득한 시간이 지났을 때 아름다운 알랑고아가 달빛에 의해 세 아들을 잉태해 낳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흰뼈 혈통의 테무진은 알랑고아가 달빛에 의해 잉태해 낳은 세 아들 중 막내(셋째)인 보돈차르 몽학의 직계 후손이니 그 역시 토템적이다. 본문에서 영특하고 용맹스런 늑대족의 일원으로 나오는 테무진은 토템을 아는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토템을 자신들의 핏줄을 고귀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고안한 인류 최초의 이데올로기로 정의했는데 철학적으로 그것은 서로에게 적응해 가는 사물들과 사회의 분절체계이자 미개인들의 존재론이자 계통학이다. 그런데 레비스트로스 이전에 토템은 추상화 능력을 결여한 구체적 사유 유형(원시적 사고 유형)으로 간주되었지만 레비스트로스에 이르러 일반화 능력(추상화 능력)으로 대별되는 신화적 사고의 한 유형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조드’는 최초 또는 기원의 문제를 건드리는 책이다. 알랑고아의 달빛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듯 토템은 자의적(恣意的)이다. 한편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작가의 지적은 여러 다른 논자들의 그것과 달리 간결한 설득력을 지녔다. 작가는 오리엔탈리즘을 상대방을 미적(美的)으로는 섬기면서 실존적(實存的)으로는 깔보는 이중성으로 규정했다.‘조드’의 주요 개념어는 실존(實存)이다. 팍스 몽골리카는 테무진의 우울하고 고독한 실존적 세계를 암장(暗葬)시킨 무덤이라는 작가의 지적에 실존이라는 개념이 나오듯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작가의 지적에도 그 개념은 나온다. 작가는 글자도 몰랐던 야만적 인물이 거대 정착 문명을 하나씩 접수한다는 스펙터클은 매혹적일지 모르지만 실재했던 현실과는 많이 다르다는 지적을 한다.

 

 

비겁한 자를 살인자보다 더 가혹하게 다룬 야삭이라는 대법령, 유목(遊牧)의 기동력을 십분 활용해 병참(兵站) 없이 승승장구했던 남다름, 진격하는지도 후퇴하는지도 알 수 없었고 주력군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전쟁을 벌인 전무후무함에 이르기까지 칭기스칸의 몽골군을 수식하는 독특한 전설적 면모들은 하나 둘이 아니다. 하지만 조드를 이겨낸 불요불굴(不撓不屈)을 빼놓을 수 없다.‘조드’는 조드를 제목으로 삼아 그 진정한 실상을 처음으로 부각시킨 작품이다. 테무진 부족의 좌우명은“성(城)을 쌓는 자는 반드시 망하고 이동하는 자만 흥할 것”이다. 이는 아내를 정조관념으로 묶어 희생시키지 말라고 한 가난한 성자인 후엘룬(테무진을 기른 어머니)의 가치관과도 상통한다.

 

 

조드는 자연선택적 메커니즘이다. 그런가 하면 토테미즘은 곰이나 늑대 등 힘센 동물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의식의 한 유형이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의 개체의 위상을 정립시켜주는 수단이다. 작가에 의하면 토템과 조드는 하늘의 뜻을 전하는 매개체이다. 작가는 이를“초원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풀이 생과 사의 틈을 가르는 하늘의 말씀이었다.... 그래서 이 통제자를 섬기는 늑대 토템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은 늑대를 이기는 존재이니.. 푸른 하늘은 다시 조드를 보내 대지의 뜻을 가르치지만 못 알아듣는 사람이 태반이었다.”는 문장으로 전한다.(2권 173 페이지) "질주하는 자의 눈에 보이는 세계는 고정된 틀이 존재하지 않는다. 뜀뛰는 말에서는 매 순간 우주가 새롭게 구성된다.“는 구절 역시 유목적 가치관을 드러내 보여주는 명문(名文)이다.(2권 147 페이지)

 

 

칭기스칸은 유목민의 법도를 매우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참모를 꾸짖거나 무안하게 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집단을 자유롭게 하면서 오히려 군기를 더욱 강고하게 했다.(2권 213 페이지) 질서와 신의, 정체(停滯)하지 않는 유목정신을 지녔던 테무진 치하의 몽골은 제국이 된 후 변해갔고 칭기스칸 사후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칭기스칸은 자신의 민족을 모전(毛氈: 짐승의 털, 특히 양모에 습기, 열, 압력, 마찰을 가하여 섬유를 서로 얽어서 짠 직물) 벽(壁)으로 이루어진 곳에서 사는 사람이라 부르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언재든지 접고 떠날 수 있는 털가죽 천막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잭 웨더포드 지음‘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역자 후기)

 

 

그러나 안주(安住) 및 정체(停滯) 등과 거리가 멀었던 그들도 결국 제국 이후 쇠퇴의 길을 걸은 것이다. 나에게 작가가 언급한 차이(다름)는 유목과 안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조드’는 칭기스칸 당시의 실상을 반영한 전쟁 장면이 많이 나오는 소설이지만 인간적 고뇌와 정념의 무게도 만만치 않게 반영된 작품이다. 특히 내게는 칭기스칸과, 그의 의형제였던 자무카의 관계에서 그 실존의 무게가 리얼하게 다가왔다. 칭기스칸은 자무카가 자신에게 행한 악행은 여럿이었지만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은 형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더불어 살자는 요청을 거절한 것이라 생각했다. 칭기스칸과 자무칸의 인연(因緣)은 실존이란 엇갈리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결국 자무카를 죽인 다음 해 봄 칭기스칸은 몽골 제국의 대칸으로 즉위했다. 사회학자 이진경님은 ‘철학의 외부’에서 ”움직임과 멈춤, 이동과 정지는 정착과 유목에 대응되는, 그것을 정의하는 개념이 아니다... 유목민 역시 영토를 가지며(몽골 제국의 그 광대한 영토를 보라!), 움직이는 관습적인 경로를 갖“는다고 말했다.(279 페이지) 문제는 고정된 세계관과 행태에서 벗어나 유연함을 갖추는 것이고 그 옛날 몽골이 실연(實演)했던 무주(無住: 물론 머물기 위해서였지만)의 교훈을 오늘날 어떤 분야에서 어떻게 우리 것으로 만드느냐일 것이다. 할 말이 많아 조드라는 자연 현상을 제목으로 삼은 ’조드’는 그만큼 상징적이고 압축적이다. 감동적인 명작이라고 널리 선포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