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니슬라프 그로프의‘코스믹 게임’의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는 존재는 끝없는 우주의 춤사위와 흥미진진한 게임, 그리고 신성한 연극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절대의식의 환상적 모험이라는 내용이다. 그로프는 절대의식은 창조, 유지, 파괴의 끝없는 순환 속에서 초월적 상태의 지루함과 단조로움을 극복한다고 말한다. 그로프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우주는 흥미진진한 게임의 무대 그 자체이다. 최근 나온 길희성 박사의‘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역시 바로 그 게임의 관점에서 존재를 논한 책이다.

길희성 박사는 인격을 뜻하는 person이란 단어가 로마 시대에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쓰는 탈을 의미하는 라틴어 persona에서 왔음을 상기시키며 이는 우리가 모두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는 사람들임을 시사한다고 말한다. 이 논의는 우주의 존재 자체가 거대한 우연이고 무의미 덩어리라면 우리가 아무리 개인적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해도 튼튼한 토대 없이 지은 집과 같이 흔들거리고 인생은 우스꽝스러운 장난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로 이어진다.

도덕의 문제에서 뿐 아니라 종교적 진리 문제에 있어서도 실재론자라고 자신을 밝힌(159 페이지) 저자는 아직도 거대 의미에 대해 미련을 못 버린 채 헤매고 있다고 자신을 설명한다.(44 페이지) 저자의 그 파우스트적 추구가 겨누는 곳은 영성(靈性)과 종교(宗敎)이다. 저자는 영성을 초월적 실재 혹은 세계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시각, 새로운 차원에서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의 영적 본성 내지 성향이라고 정의한다.(191 페이지) 저자의 맥락에서 종교는 집단적 현상을 의미하고 영성은 자기 체험적이고 자기 반성적인 까닭에 본질적으로 개인적이다.

이 책에는 영성과 관련해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자기 성찰과 자기 반성이란 말이다. 저자에 의하면 자신에 대한 정직한 성찰이 없는 영성은 있을 수 없다.(196 페이지) 또한 현실 종교는 절대적인 진리 인식을 주장할 수 없다는 역사의식과, 절대적 진리 앞에서의 겸손한 자기성찰이 필요하다.(154 페이지) 저자의 맥락에서 자기 성찰은 부단한 노력漸修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114 페이지)으로 자기 성찰과 자기 반성이 없는 행동은 우상 숭배를 의미한다.

저자는 유일신을 믿는 신앙인은 자신의 신관(神觀)과 신앙(信仰)을 점검하면서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는 잘못된 신관 즉 우상을 부수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고 말한다.(72 페이지) 그 성찰은 참된 신앙에 대한 논의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저자가 말했듯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비추어 자기 뜻을 성찰하고 굽히는 것을 의미한다.(55 페이지) 여기서“우리가 세세히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섭리 앞에서 함부로 특정 사건을 하느님의 뜻과 연관시키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다운 신앙적 태도가 아닐까?”란 저자의 말은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신앙 행태에 대한 꾸짖음으로 들린다.

저자의 이 말은 전능한 존재인 하느님과 세상의 고통, 또는 고통이라는 악의 공존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항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저자는 이에 행복과 고통이 도덕적 선과 악에 정비례해서 주어지는 세계는 선 자체에 대한 사랑 즉 자발적 선은 없고 오직 보상을 바라고 하는 선이나 악에 대한 징벌을 두려워 하는 마음에서 악행을 피하는 두려움에 근거한 선 아닌 선만 존재할 뿐이라고 말한다.(59 페이지)“보상을 바라지 않고 하는 순수한 도덕적 행위, 실로 도덕적 이름에 걸맞은 순수한 도덕적 삶은 그 결과의 불확실성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역설이 성립한다.”(60 페이지)는 저자의 말이 의미 있게 들린다.

이 부분에서 연상하게 되는 것은 철학자 김상봉 교수의 다음의 말이다.“참으로 선하게 살기 위해 우리는 추수(秋收)에 대한 희망 없이 선의 씨앗을 뿌리는 믿음, 희망 없이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그리고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런 비극의 세계관 속에서도 언제나 기뻐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호모 에티쿠스’참조)

이 감동적인 말을 한 당사자가 칸트 철학을 전공한 분이라는 사실이 새삼 와 닿는다. 김상봉 교수의 사상 곳곳에 칸트의 영향력이 보이거니와 길희성 교수의 이 책에도 그런 분위기가 충분함은 단순한 참조 거리 이상의 의미가 있다. 두 교수의 지론(持論)을 한 마디로 표현할 단어는 성숙한 신앙이다. 그런데 종교(라는 제도)에 의해 훼손되고 오염된 탓이겠지만 우리의 대체적 신앙이 처한 현주소는 이기적이고 기복 중심인, 성숙한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 성숙과 거리가 먼 신앙이다.

현재의 종교 비판은 영성을 충분히 담지하지 못하고 있는 제도 종교하의 이기적이고 덜 완성된 신앙인들에 대한 비판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종교와 영성을 차별화하는 글을 쓰고 있지만 실은 두 개가 쉽게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저자에 의하면 영성도 어떤 영성이냐에 따라 평가를 달리 해야 한다. 즉 세간과 출세간, 물질과 육체를 대립적으로 보지 않고 둘 다를 변화시키는 영성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저자는 영성은 세계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며 영성이 피하고자 하는 것은 세계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집착하며 사는 자기 자신이라고 말한다.(197 페이지) 중요한 것은 종교와 영성은 동반자라는 규정이다. 이는 종교와 영성이 쉽게 분리될 수 없다는 말에 걸맞은 규정이거니와 이 규정을 완결 짓는 것은 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영성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아무리 위대한 영성가라 해도 그가 태어나 살고 있는 종교와 문화와 언어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라는 것이다.(200, 201 페이지)“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이지만 영성은 나만이 알고 하느님만이 아는 세계“(198 페이지)라는 저자의 말이 인상적이다.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는 말은 모든 종교가 동일한 실재를 지향한다는 의미의 말이다. 이런 인식은 기복 중심의 신앙을 벗어버리는 것 이상의 어려움에 적응해야 정초(定礎)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다 된 인간이고 사람들은 되어 가는 그리스도.“라는 칼 라너의 말을 참고로 할 수 있겠다. 이 말이 참조점이 되는 것은 의미로 충만한 말이기 때문이지만 그리스도라는 말을 대신해 붓다라는 말을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는 다 된 인간, 사람들은 되어가는 ~”라는 말은‘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에 합당한 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