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사상에 하늘, 땅, 사람을 의미하는 3재(3才) 개념이 있다면‘지식 e’시리즈에는 e(nature, science, society, people)가 들어 있는 자연, 과학, 사회, 인물 등의 네 가지 키워드가 있다.(‘지식 e 시리즈’는 판매 6년만인 올 4월 말 기준으로 100만권을 넘어서는 기록을 세웠다. 원 소스 멀티 유스의 대표적 성공 사례이다. 한편 EBS는‘지식e 8’출간을 기념해 UCC 공모전 이벤트를 진행중이다.)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이라는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에 나오는 어구(語句)들로 세부 제목을 정한‘지식 e 8’의 키워드는 사람이다.

동양 사상에서 사람은 창조적 역동성의 유형적(有形的) 표상인 하늘과, 총체적 관계망(關係網)의 유형적(有形的) 표상인 땅이라는 음양(陰陽)을 조화시키는 주체이지만 현실과의 거리는 상당하다. 노자의‘도덕경’이 말하듯 사람은 제사에 쓰이고 버려지는 지푸라기 개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물론‘지식 e 8’은 희망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은 에릭 홉스봄, 마요 광장의 어머니들, 제이크 라일리, 임종국 선생, 정기용 선생, 템플 그랜딘, 펄 벅 등 지명도와 무관하게 나름의 비중으로 빛을 발하는 책이다. 이 중 에릭 홉스봄은 마르크스의‘공산당 선언’을 정치적으로 다시 읽어낸 20세기의 마지막 좌파 학자이다. 성장 호르몬 결핍을 딛고 세계적인 선수가 된 리오넬 메시는 세계 유일의 협동조합으로 운영되는, 너무도 상징적인 FC 바르셀로나의 주축 선수이다.

그런가 하면 1976년에서 1983년 사이 아르헨티나 군사 독재 정권에 의해 납치, 실종된 아이들을 되찾기 위해 1996년부터 대정부 투쟁을 펼친 마요(mayo: 5월) 광장의 어머니들, 최초의 여섯 글자 한글 제호와 한글 전용 가로쓰기를 채택한‘뿌리깊은 나무’의 발행인 한창기씨와 편집장 윤구병 교수,‘친일문학론‘을 통해 친일파 문제를 처음이자 본격적으로 제기한 임종국 선생, 냉전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던 시절 여성과 아시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인권과 국제적 이해를 적극 옹호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펄 벅(1892∼1973) 등은 인간 승리의 표상들이다.

한편 전형적인 호모 루덴스(homo ludens)로 불리는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 핸드폰과 이메일,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소셜 미디어 없이 90일을 사는 아미시 프로젝트를 구상, 실천한 제이크 라일리(Jake Reilly) 등은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사람들이다. 건축가의 역할은 다양한 현대적 삶을 이해, 조절, 판단하고 공간이 주는 상상력을 구체화하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과 노동을 조율하여“원래 거기 있던 사람들의 요구를 공간으로 번역해내는”것 뿐이라는 감응의 건축론을 구체화한 건축가 정기용(鄭奇鎔) 님은 따뜻한 인간미를 보인 분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지동설을 주장한 담헌(湛軒) 홍대용 선생은 사람에 대해서는 물론 사물에 대해서까지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한 범애(汎愛)와 만민평등의 사상가이기도 하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두었던 펄 벅 여사는 가난과 차별에 처한 아시아 여러 국가들의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펄 벅 재단(펄 벅 인터내셔널)을 설립한 분이다. 최근 한 보도에 의하면 펄 벅 여사가 1973년 암으로 타계하기 직전 탈고한 소설 ’영원한 경외(Eternal Wonder)‘가 지난 해 12월에 발견돼 오는 10월 출간될 것이라고 한다.

오늘날 스웨덴 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타게 에를란데르 총리, 우리 나라 최초의 신여성 화가 나혜석 님, 자폐(自閉) 동물과학자인 템플 그랜딘 등은 쉽게 만나기 어려운 인물들이다. 특히 그랜딘은 동물을 자극과 반응만이 존재하는 기계로 본 스키너의 행동주의 심리학을 비판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랜딘은 동물과 자폐인(自閉人)이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본다는 사실을 밝혔다.‘지식 e 8’의 하이라이트는 템플 그랜딘 편이다. 본문은 자폐인의 사고체계를 동물과 연결시킨 그랜딘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독해한 소녀라는 이름을 부여하며 관점주의를 소개한다.

본문에 의하면 이미지를 펼쳐놓으면 관람자들의 제각각의 관점을 허용했던 서구 회화는 르네상스 시대 원근법을 발전시키면서 관점을 고정하기 시작한 동시에 또 다른 시선을 정련하여 회화에 내재하게 했는데 그것이 바로 왜상(歪像: anamorphosis)이다. 왜상은 또다른 형상을 의미한다. 시선의 외부에 위치한 왜상은 관람자의 위치, 동작 등에 의해 형태가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한스 홀바인의‘대사(大使)들‘은 왜상의 좋은 예이다.

두 명의 대사들 사이에 오징어뼈 모양의 얼룩이 있는데 원근법적 관점에서 의미화되지 않은 채 자리잡은 얼룩은 삐딱하게 보는 순간 둥그런 해골 모양이 된다. 해골이 상징하는 것은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를 가진 메멘트 모리이다. 본문에 의하면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홀바인의 ’대사들‘을 경유해 시각과 응시 개념을 정립했고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철학자 지젝은 현실에 길게 드리워진, 그러나 일반적인 시각장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얼룩 - 체르노빌 사건처럼 평화롭고 안전한 사회라는 환상을 무너뜨리는 파국적 상황 - 을 실재로 정의하고 그 의미와 가능성을 탐구했다.

지젝은 라캉이 홀바인의 ’대사들‘에서 영감을 받아 시니피에의 효과들을 가능하게 하는 시니피에 없는 시니피앙을 정의했다고 한다.(’삐딱하게 보기‘ 185 페이지) 흥미로운 것은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의 시각이다. 세넷은 최근작인 ’투게더‘에서 홀바인의 ’대사들‘ 에 나오는 탁자 위의 항해용 도구들이 길드(수공업자나 상인들이 상호 부조와 보호, 직업상의 권익 증진을 위해 결성한 중세의 조합)로 조직되었던 다양한 작업장이 확장되어 실험실 같은 작업장을 포함하게 된 거대한 변화를 나타낸다고 말했다.(’투게더‘ 183 페이지) 이런 차이는 투게더(together)가 협력을 의미하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듯 협력에 초점을 맞춘 세넷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앞서‘지식 e 8’의 키워드를 사람이라 했지만 구체적으로는 다르게 본 사람들이다. 주인공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독해한 템플 그랜딘, 홀바인의‘대사들’에서 다르게 보기의 가치를 이끌어낸 라캉과 지젝 뿐 아니라 임종국 선생, 펄 벅 여사, 정기용 건축가. 나혜석 화가. 홉스봄, 파인만, 홍대용 선생, 한창기 씨, 윤구병 씨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상의 상투성에 빠지지 않은 사람들이다.(본문과 다른 책에 나오는 사례이지만 리처드 세넷 역시 다르게 본 사람이며 라캉과 세넷의 시각 자체가 다르게 본 사례에 해당한다.) 물론 그 분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역행(力行)으로 결실(結實)이라는 꽃을 피워낸 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