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미니홈피, 페이스북, 트위터 등 인터넷 글쓰기 공간들의 활성화가 눈에 띈다. 글쓰기 대중화 시대의 한 풍경이다. 나는 페이스북 계정을 가지고 있고 블로그도 운영하는데 길고 진지한 글을 선호하기에 자연히 블로그에 전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라디오 방송작가인 김미라 님의 글쓰기는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내가 쓰는 블로그에 작은 기록이라는 카테고리가 있다. 간단한 신간 소개, 메모, 시 감상, 수필 쓰듯 흘러가는 마음을 정리한 글 등을 올리는데 분량은 대체로‘오늘의 오프닝‘에 실린 글의 길이와 비슷하다. 그래서 관심이 간다.

방송 작가는 누구보다도 마감 안에 글을 쓰는 부담을 느끼기에 바둑으로 치면 속기(速棋)에 능해야 할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첫 문장을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말한다. 아니 굳이 그런 예를 들지 않더라도 첫 문장을 잘 쓰기는 어렵고 그래서 잘 쓴 첫 문장은 긴 여운을 남길 것이다. 괜찮은 첫 문장은 늘 생각하고 준비해야 떠오른다고 할 수 있는데 방송 작가는 소설가가 소설을 쓰기 위해 답사를 하고 사전 준비를 하듯 신문, 방송, 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를 참고하는 데 누구보다 능할 것 같다.

첫 꼭지에 나오는 ’나를 중심으로‘에서 김미라 작가님은 호주에서 만든 세계 지도처럼 나를 중심으로 세계를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고 세상이 요구하는 것에 나를 억지로 맞추지도 말고 규정된 시각에 갇히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도 했다. 이는 청취자에게 직접적인 메시지로 연결되는 방송 글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김미라 작가님은 Opening Note를 통해“작가라는 생각보다 요리사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던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했다. 나 역시 어떤 책의 리뷰를 쓰며 레시피란 말을 사용한 적이 있다. 사실 글쓰기가 요리를 닮았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레시피라는 말은“현대는 무엇을 아는가가 중요한 시대가 아니라 아는 것을 어떻게 편집할 능력이 있는가가 중요한 시대.”(244 페이지)라는 문장에 나오는 편집이란 말로 바꿔도 좋을 것 같다. 글을 쓰는 것이 어떤 내용을 포함시킬지 버릴지를, 어떤 부분을 강조할지 가볍게 언급할지 등을 선택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글쓰기란“끓인 물을 안정시켜 은은하게 우려내”(268 페이지)는 작업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음악 방송 특히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는 거의 음악에만 집중했는데 블로그에 글을 쓰게 된 이후 진행자의 멘트에도 주의를 많이 기울인다.

어제 비가 내리는 가운데 한 방송사의 아침 클래식 음악 방송 진행자가 한 말이 떠오른다.‘지금까지 빗방울을 닮은 곡으로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을 생각했지만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2번 K 332의 2악장도 그럴 만하다...’란 취지의 말이다. 이런 짧은 글이 주는 여운(餘韻)은 길다. 김미라 님의 글에서 내가 느낀 것은 그런 여운이다.‘당신에게’란 글에 나오는“당신은 이 하루를 오늘이라 부르지만 나는 선물이라 부릅니다. 당신이 차이(差異)라고 부르는 것을 나는 다양함이라고 고쳐 씁니다.”란 부분은 대표적이다.

미셸 투르니에가‘조리개’라는 글을 통해 사진의 깊이와 밝기가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지적한‘카메라라는 이름의 스승’이란 글을 읽고 나는 투르니에의 책들 가운데 내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을 펴보았다.‘카메라라는 이름의 스승’이란 글이 투르니에가 밝힌 깊이와 밝기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글은 아니지만 남자와 여자, 사랑과 우정, 웃음과 눈물, 영혼과 육체, 시간과 공간, 소금과 설탕, 존재와 무 등의 제목들을 통해 알 수 있듯 투르니에는 그런 대비(對比) 또는 이원성(二元性)에 관심이 많은 작가인 듯 하다.

김미라 작가님으로부터 배운 것들 가운데‘움베르트 에코 스타일’에 나오는“가벼운 농담을 하듯이 사물의 근원을 이야기하고 슬쩍 스쳐 지나가듯 어떤 상황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해 냅니다.”(59 페이지)란 글이 가장 좋았다. 나에게 많이 부족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가벼운 것에 대하여 말하자면“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그것에 대해서 가벼운 어조로 말하는 것”(225 페이지)이라고 말한 카뮈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비극과 관련된 그리스 코러스(그리스 비극을 낳은 힘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좋았다. 비애와 고뇌가 극에 달한 순간에 나타난다는 그리스 코러스는 새겨들을 만하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유태인 학살의 연관성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다는 이야기, 내소사(來蘇寺)의 전나무 숲에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를 소사모종(蘇寺暮鐘)이라 부른다는 이야기 등은 진기하고 귀하게 읽힌다.‘오늘의 오프닝’의 가장 돋보이는 특징은 지혜와 의미 있는 삶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 글들이 주를 이룬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은 김미라 작가님이 말했듯 지식을 지혜로 승화시키는 자의 몫일 것이다. 향원익청(香遠益淸) 이야기, 문맹 시인 카비르 이야기, 간절히 그리워하게 하라는 이야기, 자기 시나리오 이야기, 날개와 발톱과 비밀 이야기 등이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지혜와 의미 있는 삶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 글들이다.

“타인과 서로 다른 주파수를 엮어 조화로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삶 혹은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요.”란 글이 들어 있는 싱잉 볼 이야기 또한 그렇다. 소사모종 이야기도“여백이 많은 그림을 보는 것처럼 안정감을 주는 저녁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란 내용도 특별히 저녁 여섯 시 방송에 사용되는 글이기에 나왔을 것이니 시간이 허락하는 아우라는 사람에 인상적으로 작용할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밤은 나의 작품이 아니라 당신의 작품이라는 말, 세상은 발견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모두 음미(吟味)하기에 좋은 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