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김현(1942 - 1990) 선생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 문학에 관심을 기울이던 때가 있었다. 물론 알베르 카뮈, 파트릭 모디아노, 파스칼 레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마르그리트 뒤라스, 에밀 아자르, 레몽 장, 르 클레지오, 드리으 라 로셀, 사무엘 베케트, 쥴리아 크리스테바 등 몇몇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데 그쳤다.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 1924 ~)는 현대문학에서 나온 프랑스 6대 문학상 수상 작품집(‘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 들어 있는 ‘소녀와 죽음‘과 ’로빈슨 크루소의 말로(末路)‘를 읽은 기억이 있다.  

투르니에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43세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으로 등단했다. ’로빈슨 크루소의 말로(末路)‘라는 작품은 다니엘 데포의 ’로빈슨 크루소‘에서 주제를 얻어와 새롭게 처리한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 그렇듯 로빈슨 크루소와 관련이 있는 작품이다. 불문학자 김화영은 미셸 투르니에를 “헤겔의 창을 들고 라이프니츠의 투구를 쓰고 스피노자의 방패로 무장한 채 소설계에 등장”했다고 표현했다.(‘프랑스 문학 산책‘ 202 페이지) 철학을 공부한 이력(소르본 대학교) 때문인지 투르니에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의 서두를 ’가스통 바슐라르(철학자)를 추모하며’라는 문구로 장식했다.  

투르니에는 소르본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후에 거장 철학자들이 된 미셸 푸코, 질 들뢰즈와 함께 그룹을 만들기도 했다. 정육점에 걸린 고기 덩어리들로부터 매혹과 충격을 함께 느끼는 기묘한 인식을 표출한 문인으로도 유명한 투르니에는 정육점의 고기를 “갈퀴, 그 갈퀴에 걸려 있는 껍질 벗긴 짐승의 잔혹하고 거대한 알몸뚱이, 시뻘건 살뭉치, 끈적끈적하고 금속성 광택이 나는 肝, 분홍빛이 돌고 스펀지처럼 생긴 허파, 외설적인 형태로 네 쪽으로 나뉜 어린 암소의 궁둥이가 내보이는 주홍빛 내부, 특히 그 날고기들 위로 지나다니는 엉긴 핏덩이와 찬 기름 덩이의 향기”로 표현했다.(투르니에 지음 ‘마왕’ 참조) 투르니에에게 상상력은 이런 독특한 특성을 갖춘 남다른 것인 듯 하다.  

상상력에 관한 책을 읽는 나는 사실 빛나는 아이디어나 유희적 상상력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인도(印度)를 2백만의 神을 섬긴다는 이유로 종교에 관한 한 유일한 백만장자로 표현(India has two million gods, and worships them all. In religion all other countries are paupers; India is the only millionaire)한 마크 트웨인 같은 사람이 나의 글들을 읽었다면 분명 상상력의 빈자(貧者)로 나를 명명했을 것이다.  

투르니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은 남자와 여자, 사랑과 우정, 돈 후안와 카사노바, 외혼과 내혼, 건강과 병, 동물과 식물, 유목민과 정착민, 지하실과 다락방, 물과 불, 환경과 유전, 아폴로와 디오니소스, 재능과 천재, 아름다움과 숭고성, 문화와 문명, 기호와 이미지, 일차적 인간과 이차적 인간, 시와 산문, 태양과 달, 영혼과 육체, 양과 질, 오른쪽과 왼쪽, 시간과 공간, 표면과 심층, 유(類)와 차(差), 관념론과 리얼리즘, 선험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 신과 악마, 존재와 무 등의 대립항(binary opposition)들이 다루어져 제법 철학적인 뉘앙스를 발한다.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다룬 것이 문학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 일상적인 것과 철학적인 것 등으로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곳곳에 철학자들이나 문인들의 관련 글이 인용되어 있는 것도 그렇다. 남자와 여자 중 여자에, 돈 후안과 카사노바 중 카사노바에 호의적인 시선을 보이는 듯 시작한 글은 대상들의 특성을 자유롭고 독특하게 풀어놓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돈 후안에게 섹스는 언제나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여자는 위대한 유혹자이며 남자는 여자의 사악한 매력에 굴복함으로써 자신을 저주하게” 된다거나 “사냥에는 여봐란 듯이 뻐기는 행사를 통해 활짝 피어나는 공격성이 있”는 반면 “낚시는 신비와 침묵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글은 유익한 사색거리이다.  

물고기가 지닌 문화적 의미를 두루 짚어내는 저자의 면모는 박학(polymath)의 증거로 읽힌다.(‘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을 통해 물고기가 예수의 숨겨진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목욕하는 사람은 퇴행 상태에 놓여 있고 깨끗함 따위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반면 샤워하는 사람은 깨끗함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 목욕하는 사람은 우파이고 샤워하는 사람은 좌파라는 설(說)은 근거가 충분하지 않지만 흥미롭다. 한편 투르니에는 초식동물이 식물로부터 영양분을 섭취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들려준다. 실상은 초식동물이 섭취한 식물이 동물의 위에 들어가 박테리아의 배양에 필요한 양분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 박테리아들이 초식동물의 진짜 영양분이라는 이유로 저자는 초식동물을 단세포동물이라는 특정 동물을 먹고사는 특별한 육식동물이라고 부른다. 저자에 의하면 샤를 드골은 빨간 광대이고 미테랑이나 지스카르 데스탱 등은 하얀 광대이다.(빨간 광대는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대사를 읊거나 괴상한 팬터마임을 하고 하얀 광대는 온갖 종류의 품위 있는 차림이 허용된다.: 88 페이지) 소금이 칼로리가 없어 엄밀한 의미에서 식품으로 분류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이는 물론 가치있지만 소금과 설탕의 과다섭취가 어른의 나이를 거부하고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유년기와 노년기 속으로 도피하는 현대인의 심리적 특징을 드러낸다는 해설이 내게는 더 가치있게 느껴진다.  

롤랑 바르트의 ‘기호(記號)의 제국’이라는 책을 기억할 것이다. 투르니에의 작업은 바르트가 ‘기호의 제국’을 통해 일본에 대해 내린 분석을 연상하게 한다. ‘소금은 중년과 연관되었고 설탕은 유년기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지하실은 삶의 장소이고 다락방은 죽음의 장소이다”, “불은 젊은 정신과 대담한 열정을 상징하고 물은 슬프고 실망스러운 현실에의 종속을 상징한다”(1), ‘토마스 만의 작품들은 비극적인 사건들로 점철된 선조적(線條的: 시간 따위의 흐름에 따라 체계적,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또는 그런 것.)이며 파괴적인 시간들로 이루어졌고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은 ‘유리알 유희’에서 보듯 유토피아적 건축의 전형 그 자체였다.‘(2), “기쁨이 창조를 물들이는 감정이라면 쾌락은 파괴의 한 가지 형태인 소비에 동반하는 감정이다”, ’일차적 인간은 영원한 현재의 젊음에 매혹되어 있고 이차적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참조하며 살아간다.‘(투르니에에 의하면 볼테르는 일차적 인간이었고 루소는 이차적 인간이었다.) 등등.. 

저자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대비시킨 칸트를 언급한다.(148 페이지)(3) 투르니에에 의하면 칸트는 꽃이 가득 피어 있는 초원은 아름다우며 사나운 폭풍우는 숭고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칸트에게서 보듯 형식은 아름다움의 근본을 이루며 몰형식성은 숭고(崇高)의 근본을 이룬다. 자연과학적인 지식을 거론하거나 철학적 담론을 언급하다가 어느 새 일상의 이야기들을 향해 나아가는 투르니에에게서 나는 종횡무진의 필력을 여러 번 느꼈다. 전술(前述)했듯 박학의 증거인데 우뇌와 좌뇌를 구별하는 뇌생리학(“그 잘난 오른손은 따라서 대뇌의 왼쪽 절반 부분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198 페이지)을 예로 드는 것을 통해 또 다른 의미의 박학을 보여준 저자가 강조한 것은 상의상관성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에게 의미있게 다가온 부분은 “베르그송 철학의 본질은 위장된 공간에 불과한 물리학의 추상적인 시간에 대항하여 구체적으로 체험된 지속(持續)을 옹호하는 것이었다.”(200 페이지)는 부분이다.(4) 마찬가지 의미에서 베르그송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소여(所與)들‘의 성립 배경을 설명하고 직접적인 외관 안에서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후설과 사르트르의 현상학적 방법론(205 페이지)을 거론한 부분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위(현실태)와 힘(잠재태)의 구분을 성적 잠재성과 무능, 행위 등의 예를 들어 설명하거나 만년필을 찾는 두 방법을 통해 선험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의 차이를 설명하는 저자의 친절함은 빛난다.  

투르니에에 의하면 과학적 탐구는 선험적 추론과 경험적 실험 사이의 끊임없는 오고가기이다.(223 페이지)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은 상상력을 일깨우는 기발함과 진중함을 함께 보여주었다. 그것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적절한 조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철학하는 방법론이 내게는 구체(具體)로 다가왔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의 원제는 ’생각의 거울‘이라는 뜻의 ’Le miroir des idees‘이다. 번역자(김정란 교수)의 말대로 문학과 철학을 종합하려는 열망에 따라 신화를 택한 투르니에에게서 저자 스스로 본문에 여러 차례 언급한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적 철학의 흔적을 느꼈다. 상상력과 지식의 가치를 알게 해준 책(’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을 즐겁게 읽게 해준 저자에게 감사한다.  

(1) 투르니에는 물이며 동시에 불인 술을 이야기한 가스통 바슐라르를 거론한다. 작가 김숨은 장편 ‘물’에서 “술은 물과 불의 최초의 결합이다... 술의 본성은 불에 가깝지만 태도는 물에 가깝다”는 말을 했다: 91 페이지. 김숨의 ‘물’은 가스통 바슐라르의 사유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바슐라르는 철학자이자 시인이자 과학자이다. 그의 면모가 치우침 속에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쉽다.

(2) 투르니에는 역사를 시간에, 지리를 공간에 대응시킨 뒤 만의 작품과 헤세의 작품은 역사와 지리처럼 대조적이라 말한다. 투르니에에 의하면 토마스 만의 작품들은 시간이 주를 이루고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은 공간적 성격을 가졌다. 우리는 시간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시간이 공간에 남긴 흔적을 통해 시간을 인식한다.  

(3) (투르니에를 통해 보듯) 우리 감성에 상처를 입히며 침입해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살(chair: flesh)이 아니라 몰형식적인 고기(viande: meat), 숭고한 대상으로서의 고기 뿐이다.(서동욱 지음 ’일상의 모험‘ 189 페이지) 앞 부분에서 투르니에가 고기에 대한 매혹과 충격을 함께 느꼈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칸트의 숭고 개념이 다루어진 아름다움과 숭고함 부분에서 비로소 숭고의 의미가 드러난다. “숭고함은 우리를 쾌락과 공포가 기이하게 뒤섞여 있는 현기증 나는 불균형한 상태에 데려다놓는다.”(148 페이지)  

(4) 베르그송은 연속적인 운동이라는 가설에서 출발한다....베르그송에게 실재란 절대적인 질적 풍요로움이다. 부트루가 주장한 바 있듯이 세계를 아무리 이론화해도 실재와 이론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베르그송은 이 간격의 존재 이유를 창조로 해석한다.(이정우 지음 ‘ 담론의 공간’ 273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