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가의 글에 의미있게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작가 한강(韓江)에게 그것은 서름서름하다란 단어이다. 물론 한강은 이 단어를 일상처럼 되풀이 해 쓰지 않고 요긴한 곳에서 아끼듯 섰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따라서 한강이 아끼듯 쓴 서름서름하다는 단어를 살펴보는 일은 의미를 찾아내는 일에 해당한다. 서름서름한 것은 사이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매우 서먹서먹함을 뜻하는 단어이지만 내가 이 단어에 남다른 의미를 두는 것은 그것이 작가의 산문집(‘가만 가만 부르는 노래’)과, 몇해 전 나온 한 계간지의 자서(自書) 형식의 산문, 그리고 소설집‘노랑무늬 영원’의 표제작인‘노랑무늬영원’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작가는“오랜만에 보는 형제들은 어쩐지 서름서름했“(‘가만 가만 부르는 노래‘ 40 페이지)으며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살아오고 있다는 사실이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처럼 서름서름하게 느껴질 때가 있.“(’기억의 바깥‘이라는 제목의 자서)고, ”사랑받는다는 것은 황홀하구나. 그들의 거짓 없는 환대가 서름서름하게 느껴진다.“(소설집‘노랑무늬영원’294 페이지)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이 서름서름한 인식의 결과는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에 대해 거리를 둔 채 채식성, 예술성, 식물성 등 자신의 고유한 세계관을 보이는 인물 유형 또는 자족적 분위기에 머문 채 미술이나 예술 작업에 몰두하는 작중 인물들의 창조이다. 때로 자폐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그런 자족적 분위기에의 침잠(沈潛) 또는 거주(居住)는 한강 소설의 초기에서부터 일관된 흐름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따라서 정서의 무미함을 초래할 법도 하지만‘노랑무늬영원’의 예에서 보듯 그런 점은 더욱 완결된 문장력과 치밀해진 개연성에 의해 중화(中和)되는 것으로 보인다.

 

산문집‘가만 가만 부르는 노래‘에서 한강은 ’노랑무늬영원‘을 아마 유일하게 자전적이라 할 수 있을 소설이라 표현했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베토벤의 곡을 들었다는 작가 한강이 들은 곡은 병으로부터 깨어난 자가 신에게 바치는 리디아 선법의 찬가라는 긴 부제가 붙은, 지독하게 아름다운 현악 4중주이다.(‘가만 가만 부르는 노래‘ 35 페이지) 그런가 하면 이 책에는 ”이 노래(슈베르트의 보리수)를 무심코 흥얼거리게 되는 때의 마음은 아주 심란하지 않다. 아주 슬프지도 않고, 아주 우울하지도 않다. 그것들이 휩쓸고 지나가고도 한참 뒤의 어느 날 불현듯 마주치게 되는 적요한 순간.“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나는 한강 소설의 지향점이 아주 슬프지도 않고, 아주 우울하지도 않은 적요함으로 귀결되리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소설집 ’노랑무늬 영원‘ 전체 특히 ’노랑무늬 영원‘이라는 개별 작품은 아름답다. 물론 한강 소설에서 아름다움은 이룰 수 없는 금기의 사랑(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남자의 몸을 가진 ’나’가 인아라는 여자에 대해 갖는 사랑)을 ”에우로파,/ 얼어붙은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낸다 해도/ 결국 만져볼 수 없을 차가움“이라는 과학적 인식에 바탕을 둔 문학적 형상화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에우로파’) ”아픈 당신을 지워버린 뒤에 남는 당신의 정수(精髓), 그 위로 지층처럼 겹겹이 쌓여왔을 또 다른 당신의 모습들은 내가 알던 당신과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달랐을까요.“란 철학적 인식 유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파란 돌’)

 

그러나 가장 중요하게는 절실하고 집요한 때로 아니 자주 아픈 세계관을 드러내보이는 예술가들의 작업으로 나타난다. 전술한 계간지의 작가 인터뷰에서 한강은 ”예술가의 삶을 다룬 작품들이 많은 편인데 유독 (그렇게) 예술가들을 작품 속으로 자주 끌어오는 이유가 있으실 것 같습니다.”란 문학평론가 강지희의 질문에“미술을 좋아하고,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왔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가끔 제가 쓴 소설이‘예술가 소설’이라고 누가 그러면 조금 놀라요. 저는 그저 인간에 대해 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한 바 있다.(2011년 계간‘작가세계‘ 한강 특집에서)

 

그럼 예술가들이 등장하는 소설을 통해 한강이 말하려는 바는 무엇일까? 잘 알려진 대로 롤랑 바르트는 사진을 탐구하는 두 방법으로 스투디움과 풍크툼을 제시한 바 있다. 스투디움은“지식이나 교양으로서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풍크툼은 ”사진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우연히 찍힌 세부가 사진을 보는 관람객의 가슴에 찌르는 듯한 통증을 유발하는 것“이다. 나는 롤랑 바르트의 풍크툼이 한강의 예술적 형상화에 가장 근접한다고 생각한다. 의도와 얼마나 상응하는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독자를 성찰이라는 아픔에 들어서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작가 스스로 ”아마 유일하게 자전적이라 할 수 있을 소설“이라 표현한 ’노랑무늬 영원‘ 의 경우 그것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노랑무늬 영원‘ 은 소설집 ’노랑무늬 영원‘의 전체 수록 작품들 가운데 가장 분량이 길면서도 압축적으로 느껴질 만큼 치밀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갑자기 나타난 검정개를 피하려고 급회전을 하다가 차가 뒤집어지는 사고를 당해 왼손이 으스러지는 사고를 당한 뒤 결국 양손을 모두 사용할 수 없게 된 화가인 ’나‘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상처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2년을 보낸 뒤 자신이 종교에 몰입하듯 그리던 한 여자의 옆 얼굴을 보며 이야기의 실마리를 잡아가는 이 작품에서 ’나‘는 모든 애착이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작업실에 대한 애착만은 남아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오랜만에 연락이 된 대학 동창 소진으로부터 자신이 찍힌 한 사진이 어느 사진관의 쇼윈도에 전시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사고 후유증으로 기억을 많이 잃은 ’나‘는 ”그림 없이 존재의 균형을 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예전에 미처 알고 있지 못했다.“(262 페이지)는 인식을 내비친다. 소진이 제공한 단서를 통해 ’나‘는 옛 시절 등산에서 만난 남자와의 기억을 이렇게 되살린다. ”내가 그와 나눈 것은 침묵이었다. 비장하지도 우울하지도 않은, 그저 침묵.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깊이 새겨진 몸의 따스함.“..”그리고 후회했다. 그가 나를 다시 업기 위해 다가왔을 때, 왜 그 얼굴에 손을 뻗어 뺨을 만지지 못했던가를.“(281 페이지)

 

’나‘는 친구 소진의 집에서 노랑무늬영원을 만난다. 영원은 소진의 두 아들이 기르는 도마뱀의 이름이다. 불 속에서 사는 것으로 믿어지는 도마뱀은 재생력과 불의 정화력이 결합된 믿음의 결집체이다. 한강의 면모를 분유(分有)한 것으로 보이는 ’나‘는 혼몽 같은 경험 속에서 ”너무 아름다운 것도 고통이 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는 말을 한다. (293 페이지) ’나‘는 지금의 그가 아니라 그때의 그를, 실은 그때의 나를, 그 여자를, 고집 세고, 무엇에도 물들지 않은, 그래서 성숙하지 않은 그 여자를 만나고 싶어하다가 뜻밖에도 불에 덴 듯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자신을, 그, 아무것도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깨닫는다.(296 페이지)

 

미국으로 건너간 그 남자의 소식을 들으려던 ’나‘는 그가 비문학적(?)이게도 강도에게 총을 맞고 죽음을 맞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어디서 들어오는 건가, 이 조용한 마음은. 어디서 이 마음 - 살고 싶다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울려오는 건가.“란 생각은 ’나‘ 스스로 그와는 영원히 비껴가고 말 운명이었던 사람이라 결론지은 뒤 내린 결단 같은 인식이다. ’나‘는 구십삼 세에 작고한 재일교포 1세대 화가인 Q가 나눈 기자들과의 인터뷰 내용을 읽는다. ”노랑은 태양입니다. 아침이나 어스름 저녁의 태양이 아니라, 대낮의 태양이에요. 신비도 그윽함도 벗어던져버린, 가장 생생한 빛의 입자들로 이뤄진, 가장 가벼운 덩어리입니다. 그것을 보려면 대낮 안에 있어야지요. 그것을 겪으려면, 그것을 견디려면, 그것으로 들어 올려지려면... 그것이, 되려면 말입니다.“(305 페이지)

 

영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마뱀의 색깔과 같은 태양의 노랑을 이야기하며 Q는 대낮 안에 있는 것과, 겪고 견디고 들어 올려지는 것과 되는 것을 함께 이야기 한다. ’나‘는 ”입술을 물고, 선잠에 새겨졌던 낯선 꿈을 되짚어본다. 그리고 자신의“두 손목에서 돋아난 투명하고 작은 새 손, 열 개의 투명한 손가락들을”“똑똑히 보았”고 자신의“팔뚝에 새겨진 선명한 노랑무늬가 신비해 팔을 들어 올렸다.”“저것은 빛인가, 저것은 아름다움인가. 생명인가, 다만 그렇게 나는 서 있다. 말없이.”라는 끝 문장으로 이어지는 ’노랑무늬영원‘의 이 대단원(大團圓)은“ 예술적 인식(”노랑은 태양입니다. 아침이나 어스름 저녁의 태양이 아니라, 대낮의 태양이에요.“)과 과학적 인식(”노랑은 가장 생생한 빛의 입자들로 이뤄진, 가장 가벼운 덩어리“), 거기에 더해 노랑무늬영원을 매개로 새 손을 이야기하는 대목으로 성급하지 않은 식물성의 희망을 일깨워준 대목이기도 하다. 이것이 한강이, ’노랑무늬영원‘이 보여준 진경이다. 앞서 예술가들이 등장하는 소설을 통해 한강이 말하려는 바는 무엇일까? 란 말을 하며 성찰이라는 아픔에 들어서게 하는 것이라는 답을 했지만 ’노랑무늬영원‘의 경우 그것은 아픔의 성찰을 통해 새 희망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드러났다. 섣부르지 않은 인상적인 색채로 발화(發話/ 發花)된 희망, 내가 ’노랑무늬영원‘에서 읽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