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사전은 문명(文明)의 의미를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적인 발전. 자연 그대로의 원시적 생활에 상대하여 발전되고 세련된 삶의 양태’라고 밝혀 놓았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문명에 대한 나름의 이미지들을 가지고 있다. 나는 문명에 대해 고도로 발달한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한 물질문명, 소비주의, 자본주의 등의 이미지들을 가지고 있다.

 

서울대 인문학 연구원(人文學 硏究院)에서 펴낸 '문명 밖으로'란 책에서 필자들은 반문명이란 문명을 파괴하려는 것도 행복한 삶을 포기하려는 것도 아닌 행복한 삶과 더 좋은 세상에 대한 대안적 지향이자 다른 해석이라 정의했다. 한길사에서 나온 문명 공동 연구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인 ‘문명 밖으로’는 다양한 필자들이 참여해 만들어낸 성찬(盛饌)이다.

 

사실 문명 밖으로라는 말은 21세기의 최첨단 문명에 대한 반기(反旗)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사람다운 또는 행복한 삶에 대한 추구이기에 다룰 수 있는 대상의 스펙트럼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꽤 넓다. ‘문명 밖으로’에서 다루어진 대상들은 초기 기독교의 정통 이단 논쟁에서부터 인도의 고행자들, 루소의 문명 비판, 수피즘, 신비주의, 무속 서사시, 죽림칠현 등에 이르기까지 다채롭다.

 

고일홍의 ‘문명 이전의 풍요로운 사회’는 문명에 이른 인류의 행적이 반드시 발전을 동반했다고 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 글이다. 필자는 수렵 채집민들의 삶이 농경민들에 비해 오히려 대부분 먹을 거리도 풍부했고 평등했던 데다가 친환경적이었으며 고도의 정신세계를 유지했었다고 주장한다. 프로이트에 대한 성해영의 글에서 드러난 것처럼 문명은 불만을 낳는다.

 

반문명주의자들과 문명은 긴장으로 엮인 사이임을 강성용의 ‘고행 전통은 쿰바멜라를 어떻게 가능하게 하였나’와 ‘인도 고행자들의 문명을 향한 거리두기’는 잘 보여주고 있다. 쿰바멜라는 목성이 물병자리에 오고 해와 달이 특정 자리에 도달하는 시기에 이루어지는 힌두교도들의 속죄의식이다. 쿰바멜라는 명목상으로는 속죄의식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통치와 상권, 권위 등의 이해관계와 얽혀 있다. 이 대목에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인도의 소 숭배가 물질적 이해관계의 한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주장이다.

 

카르마와 윤회는 결코 필연적이지 않았다는 말, 인도가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등의 카스트 제도가 아니라 씨족 단위인 자티에 의해 지배받는다는 말, 인도의 성자를 의미하는 사두 중 생계형 출가자들도 있다는 말, 붓다는 인간 사회의 주변부를 맴돌았기에 혁명가라 불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 등 강성용의 주장은 우리의 상식과는 거리가 있는 것들이어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필자에 의하면 불교가 중요 종교가 된 것은 붓다의 현실 정치 감각 덕이다. 필자는 인도의 고행주의는 반문명의 발현이 아니라 문명의 극단화한 형태라 말한다.

 

김시천은 죽림칠현의 불우한 삶은 자신들의 삶을 옥죄는 비참한 현실에 대해 본성을 토로했던 시대의 비극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지(李贄), 세상에서 자퇴하다’에서 이혜경은 세상을 향한 이지의 비판 역시 타인, 나아가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 타인을 향한 욕망이라고 규정한다.

 

“볼테르와 더불어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루소와 더불어 하나의 시대가 시작된다.”는 괴테의 간결한 정리를 만날 수 있는 안성찬의 ‘루소, 문명 비판에 일생을 바치다’는 메시지면에서는 물론 읽을 거리면에서도 의미 있는 글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구호로 유명한 루소는 드라마틱한 삶을 산 사람으로 그의 저서들은 다양한 지적 편력을 유인하는 명저들이다. 루소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왜곡된 사회 제도에 의해 참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신비주의를 반문명적, 더 정확하게는 초문명적이라 규정한 성해영은 ‘신비주의, 존재의 무한한 여백을 찾아서‘란 글에서 신비주의가 근본주의 종교에 의해서는 타락한 신앙으로, 근대 과학에 의해서는 비합리적 미신으로 낙인 찍혔다는 전제 하에 종교와 과학의 화해, 소통 및 대안을 모색했던 에살렌 연구소(Esalen Institute)를 집중 조명했다.

 

이 글은 폴 틸리히, 프레데릭 슈피겔베르크, 올더스 헉슬리, 그레고리 베이트슨 등의 등장 인물들만으로도 꽉 찬 느낌을 주는 글이다. 신비주의가 서양에서 이단시된 것은 인간이 현생에서 신성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천국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는 신비주의자들의 주장이, 죽은 후에야 신과 대면할 수 있다는 근본주의 기독교 교리와 긴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초개아(超個我) 심리학의 스타니슬라프 그로프가 LSD 체험을 통해 출생 경험 자체가 우리에게 커다란 심리적 외상(trauma)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밝힌 것은 기이하고 놀랍다.

 

필자에 의하면 신비주의자들은 신비적 결합을 통한 절대 자유의 체험을 기반으로 우리가 몸 담고 있는 현상세계 배후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여백을 알아차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비적 합일 체험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인위적인 것들의 타당성을 근본에서부터 되묻는다면 신비주의는 사회적으로 당연시되는 모든 분리와 차별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근거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신비주의의 그런 대안적 지향에 대한 몰이해와 거부이다. 갈 길이 먼 것이다. ‘신비주의, 존재의 무한한 여백을 찾아서‘는 다른 글들이 반문명 역시 문명의 한 차원이라는 데에 초점을 맞춘 것과 달리 희망 또는 대안에 초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희망적인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