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자물리학자 한스 그라스만의 ‘모두를 위한 물리학’(2011년 5월 30일 출간) 중 이슈가 될 만한 부분이 있어 글을 쓴다. 저자는 물리학 없는 진화라는 챕터에서 “진화 이론가들의 머릿 속에는 열역학이 전혀 들어 있지 않는 것 같다... 생물학자들은 열역학만 모르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는 척도도 없고 발전에 대한 정의도 없다... 진화에 발전이 없다고 꼭 주장하고 싶다면 적어도 다른, 새로운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진화 이론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진화는 발달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경험상 명백한 모순에 빠진다. 인간이 효모보다 더 발전되었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부분을 읽고 프란츠 부케티츠의 ‘진화는 진화한다’라는 책을 다시 읽었다. 지난 2007년 6월 15일 처음 읽은 책이니 4년 만이다. ‘모두를 위한 물리학’과 비슷한 시기에 나온 ‘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에도 “진화는 진보가 아니다. 진화는 변화하는 생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라는 저자의 글이 있다. 나 역시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해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나는 진화론을 그림으로 보았을 때 큰 부분에는 이론(異論)이 없지만 세밀한 부분에는 이론(異論)의 여지와, 상충(相衝)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온 지 6년(원서 기준)이 된 프란츠 부케티츠의 ‘진화는 진화한다’를 다시 읽은 것은 이 작은 책이 진화에 대한 기본적 전제들과 세밀화 차원의 이론(異論)들을 잘 조망한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진화는 왜 역사적 과학인가, 진화는 늘 더 좋은 쪽으로만 진보하는 것인가, 진화 과정에는 언제나 성공하는 생명체가 있는가, 진화론으로 볼 때 우주에 다른 생명체가 있는가 등의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했다. 이 질문들은 한스 그라스만이 던진 이슈와도 관련 있는 질문들이다. 진화가 역사적 과학인 것은 오늘날 현존하는 모든 종은 지금과는 다른 종의 후손이며 오랜 계통사적 변종 과정의 결과(16 페이지)이기에 모든 진화론은 과거에 일어난 과정에 대한 경과 유형과 원리를 제시해야 하기 때문(41 페이지)이다. 지금껏 지구상에 존재했던 생명체는 어림잡아 10억 종이다. 반면 현재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1천만에서 2천만 종 중 알려진 생명체는 대략 150만 종이다.

 

그렇다면 이런 엄청난 다양성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체들이 생명을 유지하는 방법은 수백만 가지에 이를 것이란 점이다. 한편 진화는 늘 더 좋은 쪽으로만 진보하는 것일까란 이슈에 대해 우리는 진화란 진보나 최적(最適)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적자생존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개념도 아니라고 답할 수 있을까? ‘생명과학의 기초 DNA'에는 “진보의 반대인 퇴화도 진화”라는 글이 나온다.(책을 다시 읽으면 좋은 것은 처음 읽었을 당시의 내 관심과 현재의 내 관심을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 읽었을 당시의 내 관심은 밑줄이 증거한다.)

 

진화가 발전이라는 법칙성을 보이느냐는 질문은 진화생물학자들에게 하나의 도전거리라는 말을 하며 저자는 세상에 하나의 진화론은 없다는 말을 한다. 물론 여러 진화론이 있다고 해서 진화 자체가 불확실한 것은 아니다. 진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났다고 보는 점진주의와, 오랜 기간의 정체기를 지나다가 때가 되어 급격하게 이루어졌다고 보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단속평형설은 배타적이지 않고 보완적이라는 저자의 견해는 새롭다. 진화는 한번은 이렇게 또 한번은 저렇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진화가 진보를 의미하느냐는 질문은 이슈적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물리학자 한스 그라스만은 진화는 발달을 의미한다는 말을 했다. 반면 ‘다윈의 식탁’의 저자 장대익 교수는 진화에는 펼침(unfolding)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펼침이라는 뜻만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장대익 교수에 의하면 진화라는 용어는 원래 다윈의 것이 아니라 허버트 스펜서가 사용한 용어로 다윈은 진화라는 용어가 널리 받아들여지자 어쩔 수 없이 수용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저자는 진화과정이 고등한 형태가 오래된 원시적 형태를 단지 대체하는 것이라면 오늘날에는 고도로 진화한 종족 즉 몇몇 영장류만이 현존할 것이라는 말을 한다.(78 페이지) 이는 진화란 진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를 뒷받침하는 이야기이다. 이런 류의 문장은 더 있다. “개별 문과 강의 진화에서 각각 원시적이라고 평가되는 생명체들이 사라지지 않고 현존하는 경우도 있다.“(77 페이지)는 문장이다. ”공룡은 아주 복잡한 유기체이지만 가령 상어 같은 훨씬 오래된 유형이 공룡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79 페이지)는 문장도 그렇다.

 

한스 그라스만은 “진화과학에 따르면 (...) 인간은 분명히 하나의 동물입니다.”라는 현대 과학자들의 공공연한 견해를 거론하며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지 않다면, 예를 들어 우리는 이익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말인가, 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모두를 위한 물리학‘ 204 페이지) 그라스만은 더 나아가 “20세기의 범죄는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가증스러운 행위에 대한 고도의 법적인 장치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범죄들은 전처럼 앞으로도 허락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한다. 20세기의 범죄란 우생학을 근거로 유태인들을 집단 학살한 나치의 만행을 일컫는다.

 

우생학(eugenics)이란 그리스어 eugene에서 나온 말로 출생이 좋은(good in birth)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김호연 교수의 ‘우생학, 유전자 정치의 역사’에 의하면 영국, 미국, 독일의 우생학자들은 생물학적 결정론에 기초하여 정치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고 신체적 차이를 우열의 개념으로 환원시킴으로써 그것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았다. 20 세기에는 우생학과 진화론을 기반으로 온갖 범죄가 저질러졌다. 우생학과 진화론은 진보, 차별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개념이다. 우리는 진화를 발전으로 해석해 악용한 20세기의 범죄를 보았는데 그라스만의 지적대로라면 진화론의 진화가 발전이 아니라면 사람과 동물이 아무런 차이가 없으니 사람을 동물처럼 취급한 지난 세기의 범죄가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과 동물이 같으냐 아니냐가 아니라 차별하는 주체가 누구냐이다. 어떤 집단이 분명 하등하다고 여기는 집단을 짐승처럼 취급한다면 분명 자신들은 동물들과 다르다고 여기고 또 그렇게 선전하는 바탕 위에서 그렇게 할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 또는 집단 사이에 위계와 차별, 또는 서열을 두느냐이다.

 

진화는 분명 진보를 의미한다. 아니 진보라는 개념과 다양성의 증가라는 개념을 포함한다. 그러나 일방적인 진보를 의미하지도 않고 반드시 복잡한 개체가 우월한 것만은 아니다. 또한 적자만이 생존하는 것은 아니어서 하찮은 종이 살아남을 수도 있다. 그리고 퇴보도 진화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라스만의 지적대로 인간이 효모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월하고 복잡하고 고등한 것은 사실이다. 진화가 진보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이점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진화가 진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의도한 것은 지나친 인간 중심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에 따른 결과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