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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은 기억에 남는 책이다. 이 책은 혁명을 위해 함께 싸웠던 동료들이 혁명 이후 동지들을 반대파로 몰아 죽이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10대 이후 40년간 공산주의자의 길을 걸은 50대의 주인공인 루바쇼프가 동유럽 여러 나라들의 공산당을 지원하던 시절 만난 인물들을 회상하는 장면과, 서유럽과 접촉해 반혁명적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죄명으로 체포, 수감된 후 세 차례에 걸쳐 겪은 심문 과정을 다룬 부분으로 크게 나뉜다. 이 책에는 루바쇼프가 처형장으로 끌려 가는 장면이 나오지만 그가 겪은 직접적인 폭력은 루바쇼프가 글레트킨으로부터 당한 수면 박탈과 전등 불빛에 직접 노출된 것 등이다.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한낮의 어둠’은 내게 차가운 회색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현상학자인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저서 가운데 ‘휴머니즘과 폭력’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소비에트 정권과 모스크바 재판, 부하린이 당한 숙청, 트로츠키가 당한 암살 등 역사적 사건들을 중심으로 '폭력의 혁명적 분위기' 안에서의 공산주의의 문제에 관해 다룬 책이다. 이 책을 구성하는 여러 파트 중 ‘쾨슬러의 딜레마’라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 흥미롭게 여겨진다.(여기서 말하는 쾨슬러는 ‘한낮의 어둠’을 쓴 아서 쾨슬러이다.)

'휴머니즘과 폭력'은 흥미를 자아내는 구도자와 프롤레타리아라는 장을 비롯해 트로츠키와 이성주의, 프롤레타리아에서 인민위원으로 등의 자료들로 가득한 책이다. 나는 ‘휴머니즘과 폭력’이‘ 한낮의 어둠’이 다룬 러시아 혁명 이후의 공산주의와 변질된 혁명에 대한 리뷰를 내공 깊게 쓴 사람들에게 작지 않은 영감을 제공했으리라 생각한다.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 개념을 이해하려고 애썼던 기억이 선명한데 이제 좌파 지식인이었던 그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는 책을 발견해 반갑다. ‘한낮의 어둠’을 읽기 전에 ‘휴머니즘과 폭력’을 알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폭력에 대해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이 정확하게 언제인지 모르지만 나는 사회 차원의 불의와 악(惡)을 폭력이라는 개념과 동일 선상에서 바라보아 왔다. 강신주 교수의 책을 통해 알게 된 학자 중에 피에르 클라스트르가 있다. 클라스트르는 40대 중반의 나이에 작고한 분으로 ‘폭력의 고고학’이란 책으로 유명하다. 그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과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을 극복하고 원시 사회에 대한 연구물로 1970년대 프랑스 지식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평을 받고 있다.

로제 다둔의 ‘폭력’은 창세기를 가장 앞 부분에 배치한 책이다. 이 책에서 다둔은 인간의 원초적 폭력을 창세기에서부터 고찰했다. 창세기에는 그 유명한 카인의 아벨 살해 장면이 나온다. 폭력 장면은 히브리 경전 가운데 창세기에만 나오지 않고 곳곳에 나온다. 만군(萬軍)의 하느님이라는 문구는 신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전쟁을 합리화한 히브리인들의 의도가 반영된 수사(修辭)이다. “성서에 따를 때 인류의 역사는 살인자(카인)와 보호자(신)가 공모한 역사 곧 폭력의 역사이다.”(이현우 교수 지음, ‘책을 읽을 자유’ 418 페이지)

히브리 경전의 신은 동생 아벨을 죽인 형 카인을 용서해 주는 대신 평생 유랑 생활을 하는 벌을 내리며 카인의 징표를 내렸다고 한다. 히브리 경전의 신은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遊離)하는 자가 될찌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란 카인의 탄식을 듣고 그렇지 않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며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는 표를 주었다고 한다.(창세기 4장 14, 15절) 영화 ‘에덴의 동쪽’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목숨을 건진 뒤 에덴의 동쪽인 놋(Nod) 땅에 머무른 카인에 대한 이야기인 창세기 4장에서 비롯된 영화이다.

놋은 유랑을 뜻하는 히브리 동사의 어원이다. 그것은 노마드(Nomad)와도 관련된 말이다. 한편 존 쉘비 스퐁(John Shelby Spong)의 저서 가운데 ‘성경과 폭력’이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유대인 박해와 학살, 여성억압, 마녀사냥, 십자군 전쟁, 종교전쟁, 노예제도, 유색인에 대한 정복과 착취 등은 모두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어진 폭력이다. 이 모든 불행한 사태의 기폭제는 성경을 맹목적으로 바라보는 문자주의이다. 스퐁은 이 책에서 불합리하고 모순되고 사악한 부분을 제해 버리고 성경을 바르게 쓸 것을 제안한다. 한편 리차드 호슬리의 ‘예수와 제국’은 ‘성경과 폭력’과 같은 문제의식 아래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제국을 뒷받침하는 종교로 전락했는지 밝힌 책이다.

그런데 성경으로부터 폭력의 메시지를 이끌어 내어 행동화하는 것은 어떤 연유로 인한 것일까? 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을 제공해 주는 사람은 ‘미메시스’를 쓴 에리히 아우얼바하이다. 그는 이 책에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와 창세기의 문체의 차이를 비교한다. 그에 의하면 <오디세이>는 현실을 눈에 보이는 것처럼 명확하고 밝게 조명하며 재현하려는 의도를 가진 책이고 성경은 의미의 해석과 믿음을 요구하는 책이다. 성경이 폭력과 깊은 관계가 있게 된 것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에 등장하는 폭력을 현실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구절로 보는 대신 결단을 촉구하는 글로 보았기 때문이다.

폭력을 다룬 책들 가운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품들은 어린 시절 당한 체벌과 학대의 폐해를 다룬 앨리스 밀러의 ‘폭력의 기억 -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가정 폭력에서 정치적 폭력까지라는 부제가 붙은 주디스 허먼의 ‘트라우마’, 주디스 허먼의 ‘근친 성폭력 감춰진 진실’ 등의 책이다. 이 책들은 폭력의 비근함(卑近함: 주위에서 흔히 보고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움)과 일상성(日常性) 및 다종다양(多鍾多樣)함을 증거하는 자료들이다. 오강남 교수는 퀘이커 모임에 참석하고 있는 기독교 신자로서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란 책을 통해 불교의 부정적인 면이 아닌 참된 진면목을 볼 것을 주장하는 한편 자신이 속한 기독교계에 근본주의적 믿음 즉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육체의 부활, 재림, 천국 - 지옥 등에 대한 신앙 및 기복주의와 배타주의 등을 버릴 것을 주문했다.

불교 역시 윤회(輪廻), 전생(轉生)의 교리를 지니고 있는데 오강남 교수가 불교계에 대해서는 기독교계에 대해 한 것과 같은 주문을 하지 않은 것은 불교가 이웃 종교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불교와 기독교의 비교가 하나의 이슈로 떠올랐다고 말할 수 있다. 박노자 교수는 “기독교가 예수와 그 제자들의 평화주의를 배반하고 전쟁 옹호 이데올로기로 변질된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지만, 과연 불교는 질적으로 달랐는가?”란 문제를 제기한다. 박노자 교수는 1904년 일본제국이 한반도와 만주를 놓고 러시아와 한바탕 붙었을 때 일본 임제종(臨濟宗)의 사찰인 원각사(圓覺寺) 주지였던 샤쿠 소엔이 천황을 위해 자기 인생을 홍모(鴻毛)처럼 버릴 수 있는 제국 군인 만들기에 선(禪) 수행의 무외(無畏·겁 없음)의 효능이 크게 기여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박노자 교수는 식민지화를 피하거나 식민지배를 벗어난 신생 국가에서 불교가 국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념으로 기능해왔다는 것은 불교에 대한 우리 기대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말을 한다. 그에 의하면 불교가 수행자나 독실한 신도에 한해서 비폭력을 권한 것은 맞지만 비폭력을 사회화하는 데 불교가 여태까지 실패했다는 것도, 이 실패의 원인 중 하나가 석가모니 붓다 자신의 보수적 접근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석가모니 붓다는 수행자 집단 안에서는 투표에 의한 민주주의적 운영을 당연한 상식으로 여겼지만, 바깥세상이 주로 군주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다는 현실은 그대로 인정했다.

놀라운 것은 붓다의 가르침을 옹호하는 아버지를 유폐시킨 뒤 굶어 죽게 만든 ‘패륜 아들의 상징’인 아자타샤트루왕이 불교에서 위안을 찾으려 했을 때 승가의 유력한 보호자인 그를 붓다가 적당히 반기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결론으로 말하자면 “석가모니 붓다는 열반을 얻으려는 차원에서 수행자들에게 폭력을 경계했지만 사회적 폭력의 진원지인 국가를 ‘현실’로 인정했으며, 그 후계자들이 국가의 폭력 행위를 정당화하는 차원에서 ‘착한 폭력’의 논리까지 개발해 국가를 위한 ‘정신적 무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박노자 교수는 “‘자비’라는 붓다의 구호, 그리고 ‘이웃 사랑’이라는 예수의 구호를 외피적으로나마 계속 과시해야 할 불교 집단과 기독교 집단은 살생의 악행까지도 각각 ‘자비’와 ‘사랑’으로 포장해 살생을 전문으로 하는 통치자들과의 유착을 정당화”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불교 국가들이 저지른 폭력과 기독교 국가들이 저지른 전쟁과 살육, 식민지 경영, 죽음으로 끝나곤 했던 교리 논쟁 등의 죄악은 차원이 다르다. 상대적으로 가벼우니 별 것 아니라는 게 아니다. 박노자 교수가 문제삼은 불교 국가들이나 불교 신자들이 지은 잘못은 권력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고 현실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런 점들은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박노자 교수의 주장은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승려이기 이전에 침략을 당한 국가의 백성으로서 적군을 물리치기 위해 싸움터에 뛰어든 것을 폭력이라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폭력을 맞서야 할 폭력과 옹호해야 할 폭력으로 나눈 사카이 다카시의 ‘폭력의 철학’이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하겠다.

한편 “최악의 폭력 집단인 국가에 대해 붓다가 애당초부터 조금 더 과감하게 나섰다면 이후 승가의 독립성과 자율성 확보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란 말은 문제제기에 비해 너무 밋밋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어렵게 자료들을 모으고 정리해 쓴 글의 결론으로는 함량 미달인 듯 하다. 붓다는 개혁가가 아니라 수행자였다. 박노자 교수는 각자가 지닌 인연과 업(業)은 붓다도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박노자 교수의 글에 대해 이상에 치우친 공론이라는 답글이 달린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의 문제제기는 충분히 수용할 만하다.

아이러니란 개념을 설명하며 산(山) 사람이 멋모르고 소리를 질러 눈사태가 나는 경우처럼 자신이 저지른 짓보다 훨씬 더 큰 재난에 부딪치기에 죄가 없지만 피할 수 없는 불의가 존재의 일부인 그런 세상에 살기 때문에 죄가 있다고 말한 노드롭 프라이의 해석은 썩 마음에 내키지 않지만 피할 수 없는 불의가 존재의 일부라는 그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의 ‘주님‘이 전능한 창조주인데 어떻게 악과 폭력이 존재의 일부인가, 하는 생각 때문에 기독교를 많이 비판했다. 하지만 기독교의 신이 반드시 전능한 존재여야 한다는 법은 없다는 생각이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나는 하나님의 존재가 곧 하나님의 전능을 의미하지 않기에 존재와 전능을 분리해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로테 죌레와 카렌 암스트롱 등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도로테 죌레 박사는 죄 없는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 앞에서 하나님을 합리화 하지 말라는 주장을 한 분이다. 그에 의하면 그런 합리화는 고전적 남성 신학자들의 매너리즘 속에서 세상에 편만(遍滿)한 악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 안에서 무능력한 존재 즉 전능하지 않은 존재인 것이다. 예수를 불멸의 전능자로서 신적인 존재로만 보는 위로부터의 기독론이 예수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인 가현론(假現論)으로 귀결되었다는 그의 말은 핵심을 찌르는 주장이다. 악(惡) 또는 폭력은 편만(遍滿)하고 불의는 원천적(源泉的)이니 무엇을 해야 하는가?

폭력에 대해 생각하게 한 것은 박노자 교수의 글이고 폭력을 보는 하나의 시선을 제공해 준 것은 이현우 교수의 글이다. 박노자 교수의 글은 한겨레 21에 ’국가의 살인‘이라는 큰 제목에 따라 쓰인 폭력론이고 이현우 교수의 글은 ’책을 읽을 자유‘에 들어 있는 다양한 주제의 글 가운데 한 편이다. 두 저자의 글 모두 정치적 폭력론에 치우친 느낌을 갖게 하는데 사실 그런 유형의 폭력과는 다른 교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들은 얼마든지 있다. 예컨대 정치적 폭력과는 격이 다른 시장 만능의 신자유주의라는 이종(異種)의 폭력, 인류학 또는 심리학, 존재론, 페미니즘적인 시선으로 보아야 할 폭력들이 있음을 감안하면 폭력은 편만하고 원천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종교에 치우친 시선을 예전처럼 정치와 경제, 페미니즘, 철학 등의 분야로 다시 돌려야 한다는 명령으로 들리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