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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가 큰 오케스트라도 원칙적으로는 지휘자가 없어도 연주를 할 수 있지만 지휘자가 바뀌면 음악 전체의 성패가 좌우될 만큼 소리의 결과 질이 달라진다. 총보(總譜)를 읽고 그 기호들이 음악적으로 어떻게 소리를 내는지 파악해야 하고 음악성도 갖추어야 하고 일정 정도의 권위도 갖추어야 하는 지휘자는 말 그대로 거장(巨匠)이다. 마에스트로는 서양 음악계에서 작곡가, 연주자, 지휘자, 음악 감독, 음악 교사 등을 두루 지시하지만 우리는 대체로 지휘자에 대해 그 이름을 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한국인의 열정으로 세계를 지휘하라’를 읽으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흔히 천재는 타고난다고 한다. 하지만 열정과 연마가 없다면 한때 재능을 찬란히 꽃피웠다가 일찍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한국인의 열정으로 세계를 지휘하라’는 한국의 지휘자인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클래식 역정(歷程)을 다룬 책이다. 우리에게 하나의 큰 명성(名聲)을 의미하는 그는 숱한 음악 관련 상을 수상했고 주목할 만한 기념비적인 연주도 많이 한 분이다. 하지만 그 분의 오늘이 있기까지 귀인(貴人)의 도움, 예지적이고 굳고 확실한 의지에 바탕을 둔 어머니의 헌신적인 도움과 지원 등이 무엇보다 소중했고 결정적이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정명훈이 태어난 1953년은 한국 전쟁이라는 소용돌이가 펼쳐지던 시기이다.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못했고 음악에 대한 주변의 인식이 확고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명훈의 어머니 이원숙 여사는 실로 선구자적이고 강인한 의지를 보였다. 한국 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피난을 가면서 피아노를 가지고 간 것이나 자식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 것 등은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명훈의 어머니는 1인 기획가라 할 만큼 탁월한 능력과 수완을 보였는데 그것은 음악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인생을 설계하고 이끄는 데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사실 음악이 인생의 일부가 아닌가. 하지만 정명훈의 어머니 이원숙 여사에게 아이들을 훌륭한 음악가들로 키워낸 것은 인생의 8할 이상의 의미를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정명훈의 어머니가 정명훈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출전시키기 위해 차이콥스키 콩쿠르 관련 자료들을 종이에 일일이 적은 대목에서는 가슴 뭉클함을 느끼기도 했다. 정명훈에게 음악을 파악하는 종합적 안목과 감수성을 가르친 분은 제이콥슨이라는 음악가이다. 저자 류태형은“명훈은 음악 천재로 태어났지만 지휘자가 되기 전까지는 인생을 긍정하는 법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말을 한다.

그에 의하면 정명훈은 지휘자가 된 후에야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법칙을 배우고 깨닫게 된 것이다. 정명훈이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훌륭한 유산들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것은 집중력이었다. 정명훈에게 그것은 음악적 재능 이상의 미덕이었다. 정명훈은 결정적 시기에 주위의 기대나 바람과 다른 길을 걸었다. 전액 장학금을 준다는 줄리어드 대신 매네스에 간 것, 피아노 연주로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입상해 전문적인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었음에도 지휘 공부를 하기 위해 줄리어드에 간 것 등이 그것이다. 물론 어머니는 왜냐고 묻지 않고 명훈의 진로를 수락했다. 정명훈은“지휘에서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작품을 만든 작곡가들 그리고 연주자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대 지휘자 스승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에게서 결정적 영향을 받는다.

정명훈은 스승 곁에 머물며 마에스트로는 음악에 봉사하는 사람이며 음악을 통해 인류에 이바지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스티유 오페라단의 음악 감독이 된 36세의 정명훈은 단원들을 새롭게 구성하는 개혁을 단행했고 올리비에 메시앙의‘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를 연주한 뒤 작곡가로부터 이렇게 아름다운 연주는 처음이었다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올리비에 메시앙은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와 함께 정명훈이 평생 존경하고 따라가길 원했던 음악가이다.) 1993년 프랑스는 하원 총선을 치뤘다. 이 선거에서 승리한 보수당은 사회당 미테랑 대통령의 치적인 바스티유 오페라와 오케스트라에 흠집을 내기 위해 1981년부터 문화부 장관을 맡아온 자크 랑을 경질한 뒤 바스티유 오페라와 오케스트라에게도 압력을 가해 정명훈을 부당하게 해임시키려 했다.(자크 랑과 정명훈은 외규장각 도서가 우리나라에 반환되는 데 큰 힘을 보낸 사람이다.)

이는 정치적 상황의 변화가 정명훈에게 시련으로 작용한 경우이다. 정명훈은 며칠 후 개막할 오페라 연습을 하기 위해 출근을 하도록 조치를 받았지만 계약은 갱신하지 않기로 결정되었다. 배상금을 받는 등 승소했지만 바스티유를 떠나야 하는 가슴 아픈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정명훈은 역경(逆境)을 순경(順境)으로 바꾸는 능력을 가졌다. 바스티유 사건을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창설로 승화시킨 정명훈의 위상은 음악가 이상의 능력을 보인 것으로 평가해야 마땅하다. 마에스트로는 생각 이상으로 물리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힘겨운 직업임에 틀림 없다. 안쓰러운 것은 바스티유 오페라와의 소송 과정에서 드러난 정명훈의 행보였다.

음악 밖에 모른 채 자기 시간도 없이 매진해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바스티유를 떠나 이탈리아의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와 KBS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을 함께 맡은 것은 여러 모로 인상적이다. 이탈리아는 정명훈이 한국 다음으로 좋아하는 나라이고 KBS 교향악단은 조국 한국의 대표적 교향악단이었다.‘한국인의 열정으로 세계를 지휘하라’를 읽으며 내가 느낀 것은 음악 외적인 요인들은 정명훈에게 뿐 아니라 다른 음악가들에게도 기회도 되고 악역도 된다는 점이었다. 음악은 아름답지만 음악이 우리 귀에 들리기까지 음악가가 겪어야 하는 과정은 온전히 순탄한 것도 아니고 아름답기만한 것도 아니다. 나의 이 깨달음을 저자는“세계적인 수준의 오케스트라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이름난 지휘자 하나를 데려다 놓는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라는 말로 뒷받침했다.

클래식은 한평생 완벽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라는 지론(持論)을 가지고 있는 정명훈은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한국의 오케스트라를 맡아 우리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를 가졌다는 자부심을 갖도록 하자는 다짐을 서울시립교향악단을 맡는 것으로 구체화해 가기 시작했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은 정명훈 자신 일곱 살 때 발이 잘 닿지 않는 피아노를 치며 함께 연주했던 악단이었다. 정명훈에게는 순환적(循環的) 의미를 가진 기회인지도 모른다. 정명훈은 지휘자가 된 후에야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법칙을 배우고 깨닫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런 그가 인용한 말러의 말은 새롭게 들리기까지 한다. 말러는 교향곡은 하나의 세계와 같이 모든 것을 포함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정명훈은 음악 발전을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한국의 음악 발전을 위해 쏟은 노력은 인상적이다. 과학에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국경이 있는 것처럼 음악에는 국경이 없지만 음악가에게는 국경이 있기에 인상적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정명훈에게 가슴 아픈 시련을 안겨준, 명분(경영 합리화)과 실제(사회당의 치적 흠집내기)를 달리 한 프랑스 보수당의 행태는 프랑스라는 나라의 행태라기보다 정치가 들었다 놓은 예술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다. 정명훈이 아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밀접히 관계되어서만은 아니다. 정명훈이 음악 감독을 맡으면서 언급한 음악의 정보들은 지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귀중한 것들이다. 아쉬운 것은 정명훈이 어떤 책들을 통해 음악을 하는 자세나 마음가짐을 배웠으며 음악을 사랑하는 방법을 깨달았는지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명훈이 베토벤으로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연주 일정의 첫 순서를 잡은 것은 베토벤의 교향곡이 형식과 표현, 내용 등 모든 면에서 교향곡의 시작이자 끝이라 할 만큼 모범적인 곡이기 때문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정명훈은“브람스 교향곡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낭만적인 선율, 무게감, 선 굵은 표현, 따뜻하고 힘 있는 소리...“란 말을 했다. 내가 즐겨 듣고 또 듣는 브람스 4번 교향곡을 문득 정명훈의 지휘로 듣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단 오케스트라는 어떤 팀이든 상관 없다. 본문에 의하면 서울시립교향악단은 말러 전곡 연주를 계획했다. '프로이트, 구스타프 말러를 만나다’란 제목의 책 때문만은 아니라 말러의 음악 세계는 신비한 면이 있다.

극적이고 정열적인 활동을 하던 정명훈은 자크 랑 프랑스 문화부 장관과 재회한 자리에서 남북의 음악인들이 함께 아무런 조건 없이 평화를 연주하기를 원했지만 북한의 핵실험(2006년) 때문에 취소당한 아쉬움을 표했다. 2012년 3월 14일 프랑스 파리 살 플레엘 극장에서 정명훈이 이끄는 라디오 프랑스 필과 북한의 은하수 관현악단의 합동 공연이 열렸다. 음악은 우리 삶에 질서를 부여하지만 우리 역시 그 음악에 질서를 부여한다. 물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정명훈 같은 마에스트로가 할 수 있는 것이다. 정명훈에게 세계인의 감성과 한국인의 열정을 가진 마에스트로라는 이름을 붙인 저자에 공감한다. 질서와 감성, 열정의 관계 해명, 이것이 내 숙제처럼 여겨지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