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에서 2000년을 다룬‘유럽 문화사 5‘는 대중매체를 다룬 책이다. 텔레비전, 영화관, 극장, 책, 팝, 월드와이드웹 등이 주요 아이템으로 설정된 이 책에서 첫 이슈가 될 만한 말은“사실 역사적으로 말해 텔레비전은 그 이전에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던 두 가지 제도적 방식 곧 공동의 식사와 교회예배를 계승했다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정신분석제도는 현대의 교회(church)'라는 미셸 푸코의 말을 연상하게 한다. 저자가 말하는 바는 텔레비전은 공공도서관이고 열린 박물관이고 개인 영화관이고 무료 신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텔레비전을 발명한 사람이 존 로지 베어드라는 사람이고 그가 우리에게 생소하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중요한 것은 발명이 아니라 발명품을 이용하는 것이고 그것을 보는 관객이라고 말한다.

텔레비전이 유럽에 등장해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게 되자 공포가 일었다. 유럽의 미국화에 대한 공포였다. 저자는 텔레비전이 국민의 교육수준을 점차 높이는 데에 일조했다고 말한다. 전기에너지의 국유화, 통화(通貨), 현대화 등의 단어들이 대중이 텔레비전으로 인해 새로 알게 된 단어들임을 감안하면 저자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저자는 망각이 텔레비전에서의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말한다. 텔레비전을 비판 정신과 고급 지식의 알리바이라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이는 텔레비전의 인기 장르 가운데 하나인 시트콤이“고정관념의 본산”(68 페이지)이라는 평을 받는 것을 보면 더 더욱 옳은 말이다. 반면 진지한 장르로 거론된 뉴스, 다큐멘터리, 시사 프로그램도 있다.

뉴스 취재를 위한 제작진을 전쟁 등의 현장으로 파견하는 경우 문제가 있다. 2003년 미국이 침공한 뒤의 이라크처럼 매우 위험한 곳에 파견된 서구 언론인들은 대개는 안전한 호텔에 머물며 이라크 통신원이 촬영한 화면을 가져다가 목소리만 입혔다. 저자는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이 비교적 균형을 잃지 않도록 해준 것은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텔레비전이 시청자들의 폭넓은 가치를 반영하는 민중의 매체로 굳건하게 서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고 말한다. 공공부문 텔레비전이 궁극적으로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통제를 받았다는 사실은 서유럽의 많은 나라에 만연한 정치적 편견을 은밀하게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저자는 사전에 선택해둔 의제에 알맞지 않은 뉴스를 삭제하는 것도 편향이라 말한다. 버트란드 러셀이 반전 및 반미 행동주의를 드러낸 뒤에는 영국의 텔레비전에 거의 출연하지 못한 것이나 논쟁적인 베스트셀러 저자인 노엄 촘스키에게는 덜 논쟁적인 권위자를 선호하는 미국의 주류 방송망에 접근할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텔레비전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저자는 텔레비전은 더는 국민이 하나로 뭉치는 공공의 장소가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문화적 분화가 진행되어 고급문화/ 저급문화의 구분선을 따라 공중이 재배치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저자는 영화관의 위기는 있을지 몰라도 영화의 위기는 없다고 말한다. 영화관에 가는 대신 집에서 영화를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텔레비전과 영화 또는 영화관은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셈이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텔레비전과 스포츠 경기장, 텔레비전과 박물관도 그렇다고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텔레비전은 영화관용 영화 제작 편수를 줄어들게 했지만 영화 제작비를 지원함으로써 영화를 구제하기도 했다. 독일의 경우 ARD, ZDF 등이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와 빔 벤더스 같은 감독의 영화에 자금을 지원함으로써 뉴 저먼 시네마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텔레비전과 영화의 관계를 논할 때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 중 하나는 섹스이다. 만족(?)할 섹스 장면을 보려면 영화관에 가야 했는데 점잖은 영화들과 나란히 불법 하드코어 포르노그래피와 성애를 다룬 주류 영화 사이의 회색 지대에서 섹스플로이테이션(sexploitation)이라는 별명이 붙은 장르가 성장했다고 한다.

sex와 착취를 뜻하는 exploitation의 합성어로 보이는 sexploitation은 절묘한 결합이 이루어진 단어이다. 이 단어는 성을 이용하기, 영화 등에서의 성의 상업화, 성적 착취 등을 뜻한다. 저자는 1960년대에 검열을 피해서 적나라하지 않은 성적 상황과 알몸을 보여주기 위해 제작한 일군의 저예산 영화를 말한다는 설명을 한다.(우리나라의 경우 영화관이 극장을 대체한 말로 쓰이는데 저자의 책에서 극장은 연극을 상연하는 공간으로 쓰였다.) 저자는 공산주의를 다른 유럽의 문화로 정의한다. 베를린 장벽은 알록달록 다채로운 서쪽과 잿빛 동쪽의 대조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동유럽과 중유럽의 공산주의는 나라마다 달랐다.

동유럽권 나라들은 소련의 복제판이 아니었다. 특기할 것은 공산주의 시대에 동유럽과 중유럽 시민들은 서구 시민들만큼 소비재를 많이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문화는 풍성하게 누렸다. 시장 메커니즘이 없다고 꼭 경쟁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저자의 말은 인상적이다. 저자에 의하면 동부와 중부 유럽의 텔레비전을 대체로 선전용으로 여긴 서구의 시각은 부분적으로만 진실이다. 공산주의의 문제는 모든 것이 계획되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는 데에 있었다는 지적도 특기할 만하다. 1983년 러시아에서 실시된 조사에 의하면 그들이 좋아하는 작가들은 미하일 알렉세예프, 표도르 아브라모프, 이반 스타드뉴크 등으로 서구에는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이라는 점은 특이하다.

’유럽문화사 5‘에는 이런 식의 우리의 상식을 깨는 사실들이 많이 지적되어 있다. 저자는 1989년 ~ 1990년의 공산주의의 몰락을, 예전에는 구할 수 없었던 책들을 공개적으로 팔고 살 수 있는 차원으로 파악했다. 저자는 많은 지면을 할애해 동독의 실상을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이는 한스 요아힘 마즈가 ’사이코의 섬‘에서 통독 이후의 동독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과 대조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O의 이야기‘가 번역되었다. 이 소설은 2012년 3월 28일자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가장 짜릿한 소설 베스트 10의 하나로 선정된 작품이다. 서순에 의하면 성문학을 소비하는 독자들은 그 책들이 세련되게 포장되기를 바라고 고급문화 가운데 부담스럽지 않은 요소들을 갖춘 에로티시즘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잘 쓰여야 하고 ’O의 이야기‘나 ’에마뉘엘‘ 처럼 가능한 한 프랑스 책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최근의 흐름은 서구의 일반적인 경향은 문화소비가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문화야말로 최초의 월드와이드웹이라고 말한다. 모든 운반자가 문화라는 연못에 각자의 씨를 던지는 거대한 통신망이라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소비자들은 온라인 접속을 이용하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구입하던 상품 안에서 낱개를 선택할 수 있고 생산자도 소비자를 선택할 수 있다. 광고는 소비자 수백만 명을 무턱대고 공략하는 대신 구글이나 아마존이 보여주었듯 특정 생산물에 어느 정도 관심을 보이는 이들에게만 전달할 수 있다. 이는 약한 생산자에게도 힘을 주는 쌍방향통신의 예이다. 저자는 문화제국주의를 한탄할 이유가 없었듯 다양화를 한탄할 이유도 없다고 말한다. 다양성과 변화는 문화과정의 유전적 구성요소이다. ’유럽문화사 5‘는 고급문화든 저급문화든 문화가 없는 세상은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보다 훨씬 야만적인 세상이리라는 것만이 자신이 아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로 끝을 맺는다. 대하소설을 읽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서순의 노고가 우러러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