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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가계 부채가 1천조를 넘어섰다. 1천조는 한참을 어림짐작 해야 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액수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은 가계의 과다 부채의 임계치를 GDP 대비 85%로 제시하고 있다.(참고로 서브프라임 및 세계 금융 위기 당시인 2007 ~ 2008년 미국의 GDP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은 96 ~ 98%였다.)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60%를 넘는 가구가 빚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현실도 놓쳐서는 안된다. 이런 와중에 일부 전문가는 우리나라의 전체 가계 부채의 30% 이상이 어느 정도 금융자산을 가지고 있는 소득 상위 20%인 5분위 계층에 몰려 있다는 이유를 들며 가계부채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실제로 소득 상위 20%인 5분위 계층의 가계 자산 대비 부채 비중은 절반 정도이다. 자산의 절반을 내놓으면 빚을 모조리 갚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5분위 계층 안에서도 1%에 해당하는 최상위 계층이 자산을 상당 부분 독식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앞서 말한 일부 전문가들은 현실을 호도(糊塗)하고 있거나 지적(知的)인 면에서 상당히 게으르다고 밖에 이야기 할 수 없다. 영국에서 조세 정의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조세 정의 네트워크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재벌이나 수퍼 부자들이 조세 피난처에 은닉(隱匿)한 자산 규모가 7780억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이 수치는 우리나라 가계부채의 80%, GDP의 70%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저자들이 이런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최상위 계층의 자산으로 가계부채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란 바람은 어림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저자들은 지금의 과도한 빚을 개인의 무책임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학습받은 대로 빚은 개인 탓으로 받아들이고 회생이나 파산을 뻔뻔한 행동으로 보아 왔다.

저자들이 깨트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전도(顚倒)된 의식이다. 그 전도된 의식 가운데 하나는 투자는 자기 책임이라는 믿음이다. 몇 년 전‘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이라는 책을 읽으며 공감한 기억이 새로운데 두 저자의 책을 읽으며 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 것에 투자는 자기 책임이라는 믿음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금융권이,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돈을 대출해 줄 경우 회수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굳이 돈을 빌려준 뒤 그로부터 이익을 얻으려는 행위는 약탈적 대출이라는 사실이다. 저자들에 의하면 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은 고금리, 과도한 채권 추심, 높은 수수료, 담보권 실행 등의 방식으로 이득을 취하려는 것이고 이는 다른 말로 약탈일 수 밖에 없다.(70 페이지)

금융권은 금융 소비자(대출받는 사람)가 빌린 돈을 갚지 못하면 담보로 제공받은 자산을 차지하고, 그게 불가능해서 부실 채권이 늘어나면 결국 정부의 공적 자금에 기댈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적극적으로 위험을 관리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52 페이지) 저자들도 언급했듯 상환 능력 이상의 돈을 대출받고 결국 각종 푸어로 전락한 사람들보다 약탈적으로 대출을 해주고 막대한 이득을 챙겨온 금융권의 책임이 훨씬 크다. 우리 사회는 현재 경쟁을 통한 효율만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시장근본주의, 시장제일주의)의 기조 속에서 고용 안정 붕괴, 정년 연령 하향, 고물가 등으로 인해 갈수록 삶의 질이 팍팍해지고 있다. 여기에 예기치 못한 병, 실업, 사업 실패 등이 겹치면 개인은 어쩔 수 없이 대출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언론의 부추김과 선동, 감성 조작을 직시하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과소비에 젖어든 사람도 일정 부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규제를 소홀히 한 정부, 국민들에게 투자의 위험은 알리지 않은 채 장밋빛 환상만을 전한 금융권, 저널리즘을 외면한 채 좋은 빚이라는 무책임한 말을 선동적으로 유포시킨 언론들이 우리나라를 부채 공화국이 되게 한 데에 근본적인 책임이 있다. 저자는 현정부는 식료품 등의 물가 상승에는 가격 조사를 하거나 정부가 직접 공급 확대를 주도하는 등 매우 적극적인 가격 통제 시그널을 보내면서도 경제재와 관련한 3대 수요 중 하나인 주거 문제만큼은 언제나 시장 원칙을 내세워 개입을 꺼린다고 지적한다.(145 페이지) 저자들은 이미 대다수 사람들이 투자할 때 신중함을 잃는다는 말을 한다. 투자 상품의 판매 과정을 어떻게 규제할지 고민해야지 사기를 당하면 전혀 피해를 보상받지 못하니 개인이 알아서 신중하게 투자하라는 경고가 피해 방지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정녕 필요한 것은 금융회사가 망하면 큰일이라는 학습된 의식을 버리고 소비자가 먼저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저자들은 긴 호흡과 예리한 안목으로 우리가 처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쳤다.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들이 과다 부채에 바탕을 둔 위험 경영 대신 현금 흐름 경영을 선호하게 됨으로 인해 안정적이고 중요한 자금 수요자를 잃어버리게 된 은행이 주 마케팅 대상을 서민들로 설정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결국 서민들이 희생양이 되었음을 밝힌 대목은 상찬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각종 푸어로 전락한 사람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저자들이 인용한 이런 저런 문장들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저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귀에 들려오는 성공담은 이미 자산 시장의 수익이 꼭짓점에 도달했음을 알려주는 신호라는 말을 하며 그 성공담에 취해 자산 투자의 배에 올라타는 것은 찰스 킨들버거의 말처럼“나보다 더한 바보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129 페이지)

이 바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이 말을 금융 시장에서 앞뒤 가리지 않은 채 무분별한 차입 및 투자를 한 사람들의 비이성적 충동을 지적하는 말로 들었다. 나는 앞서 희생양이라는 말을 했다. 캐나다의 문예비평가 노드롭 프라이는 희생양을 아이러닉한 인물의 예로 제시했다. 그는 ”희생양은 죄가 없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니다. 산 사람이 멋 모르고 소리를 한번 외친 후 눈사태가 나는 경우처럼 그는 자신이 저지른 것보다 훨씬 더 큰 재난에 부딪히기에 죄가 없다. 그러나 죄가 있는 사회에 살기에, 피할 수 없는 불의가 존재의 일부인 그런 세상에 살기에 죄가 있다.“는 말을 했다. 정녕 가계 부채 1000조 시대의 희생양인 서민들은 그들이 저지른 책임을 훨씬 뛰어넘는 과도한 고통을 징벌적으로 겪고 있다.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이지만 희생양이라는 말은 각종 푸어 및 신용불량자가 된 우리 국민들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데 유효한 말이다. 그러나 덧붙일 말은 불의(不義)를 구조적 모순이나 구조적 악(惡)으로 바꿔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불의 아니 구조적 모순과 악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개선할 수 있다고 고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정부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공급 확대 정책이나 주택임대차 보호법 개정을 통한 주거 약자 보호책이다. 신용 카드를 너무 쉽게 발급받게 하는 것도 규제해야 한다. 나는 저자들의 다음의 말이 책임을 훨씬 뛰어넘는 과도한 고통을 징벌적으로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실제 도움의 길을 여는 데 지침으로 작용하기를 바란다. ”채권 - 채무 관계는 동전의 양면이고 채권자와 채무자 쌍방의 거래로 이루어진 것인데 왜 빚을 갚지 못한 비난은 온통 채무자만 져야 하는가?“(69 페이지), ”채권자가 돈을 빌려주는 것은 투자 행위에 해당한다.

그에 따라 투자자가 채권에 투자할 때는 그 채권의 상환 가능성을 잘 평가해 돈을 투자하는 것이 기본이고 만약 투자가 실패로 끝나면 투자자의 위험 관리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결론이 나야 한다.“(70 페이지) 우리는 이런 상식의 회복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저자들은 금융 복지 안전망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복지가 필요한 사람에게 금융을 주는 우(愚)를 범하지 않고, 이자율만 조정해도 될 채무자를 사채 시장에까지 내몰리지 않게 하고, 일부만 줄여줘도 빚을 갚을 수 있는 사람을 파산하지 않게 하는 역할을 누군가 해야 한다.“(227 페이지) 늘 하는 말이지만 (약자 보호 시스템에서) 선진화한 나라들의 사례를 적극 배우고 수용할 필요가 있다.‘약탈적 금융 사회’를 읽으며 줄곧 우리 사회의 야만적 시스템과 우리의 그릇된 믿음을 아프게 확인했다.

부채를 지고 있지 않은 나는 4개월째 회생 절차를 밟고 있는 지인(知人)에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다. 그 사람으로 인해 분노가 들기보다 그의 현재가 걱정스러운 나는 이성적이고 냉정하다고 자부해 왔지만 어쩌면 돈을 빌려서라도 일을 벌일 용기가 부족했는지도 모르고 결코 부유하지는 않지만 안정적인 부모의 경제력 덕에 빚을 지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엇는지도 모른다. 의도적으로 남의 돈을 갚지 않으려 작정한 악성 채무자들이 아닌 이상 모든 채무자들은 피해자들이다. 물론 그들의 비이성적 행동, 충동적 선택은 결코 잘한 행동은 아니다. 이 시점에서 꼭 필요한 것은 개인의 의식이나 도덕성, 책임감 등만을 논하는 것이나 개인의 의식이나 도덕성, 책임감 등에 큰 비중을 두고 이슈를 논하는 것을 멈추고 시스템과 구조를 중심으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대안으로 삼아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는 사실은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