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 외향(E)-직관(N)-감정(F)-실천(J)형 ‘지도자’(ENFJ)

허균은 언어능력이 출중하고 감정표현이 풍부해 외교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했고, 예술 분야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으나 감정통제능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좌충우돌하면서도 꼼꼼하고 성실하여 일처리 속도가 빠르고 집중력이 뛰어났다. 그는 비상한 기억력과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이며, 열정적이고 창조적이며 온화하고 동정심이 많아 ‘포스’와 창의력,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능력이 있어 지도자로 맹활약했다. 반면 분노감정이 많고 자제력이 부족하여 상대방의 불순한 동기나 의도를 읽어내면 바로 공격을 퍼부었으며 갈등을 잘 견뎌내지 못하고 상당히 주관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강했다. ‘지도자’(ENFJ) 허균은 놀라운 천재성을 갖고 태어났으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에게 제대로 사랑받지 못했고 충분한 격려와 지지를 받지 못해 생의 에너지가 부족했고, 감정이나 분노를 절제하지 못해 주위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이끌어가지 못했다. 게다가 상황판단을 냉철하게 하지 못해 이이첨을 철썩 같이 믿다가 그에게 배신당함으로써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은둔’이 아니라 ‘공명’의 길을 선택해 그 길로 무한질주하던 허균은 이이첨 같은 모략가와 손을 잡은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그는 때때로 맑은 정신이 들면 머리로는 개혁을 주장했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백성들을 사랑하지도 개혁을 추진하지도 않았다. 주류 양반사회에서의 ‘도피’와 ‘인정’을 동시에 요구하는 자기모순? ‘의식적 목표’는 어차피 한 길을 갈 수 없?균, 진보주의자 허균의 인생을 일그러뜨렸다.
어머니 관계가 나쁜 이는 혁명의 낙오자가 되지만 아버지 관계가 나쁜 이는 혁명의 배신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좀 단순화하면 어머니 관계가 나쁘지만 아버지 관계가 좋은 사람은 정의를 포기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실현할 만한 힘이 부족해 낙오자가 되기 쉽다. 그래서 힘겨운 전투에서 지치면 더러운 세상에서 물러나 은둔자처럼 살아간다. 반면에 아버지 관계가 나쁘지만 어머니 관계가 좋은 사람은 세상을 살아갈 기본 에너지는 갖고 있지만 정의의 길을 반듯하게 걸어가지는 못하는 편이다. 그래서 심리적 위기를 겪으면 변절함으로써 아버지의 세계와 충돌하고 그 세계를 공격하면서 살아간다.
허균처럼 그 어느 곳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는 경우라면 어떨까? 그의 아버지가 그나마 한 생을 건전하게 살다 갔기에 허균은 중년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심리적 상처를 위로하는 데 탕진하면서도 개혁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최소한 나쁜 세상과는 타협하지 않았다는 떳떳함도 있었기에 세상을 향해 ‘나는 나름대로 내 삶을 이루겠노라’고 외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허균의 삶은 성공적일 수 없었다. 중년기를 넘어서면서 심리적 상처가 본격적으로 악화하자 그는 자기 인생이 실패했다는 위기감에 휩싸였다. “공훈을 세우기에는 때가 벌써 늦었고, 고기잡이나 나무꾼이 되려 해도 또한 늦었다오” 하고 절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여기에 더해 미우나 고우나 자신을 묵묵히 후원해주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친구들도 하나 둘 떠나가자 세상천지에 홀로 남겨졌다는 고독감과 공포감이 엄습해왔다. 그래서 그는 무엇이든 하루빨리 선택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에 사로잡혀 가서는 안 될 변절자의 길로 빠르게 달려 나갔고, 결국 그 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허무한 생을 마쳤다.
머리는 뜨거워 미래를 볼 수 있었으나 도무지 몸이 따라주지 않은 허균. 그가 쓴 소설 『장생전』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했다. “난 사실 죽은 게 아닐세. 저 동쪽 바다 가운데 한 섬나라를 찾으러 가는 길이라네.” 그는 아름다운 섬나라를, 홍길동이 건설한 율도국을 볼 수 있었기에 그곳으로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허균은 소설 『남궁선생전』의 모태인 익산 지방에 내려오는 ‘남궁두 전설’의 주인공이 신선 수련을 마치고 나서 절벽에서 뛰어내리다 바위에 부딪혀 허망하게 죽은 것처럼, 최고 권력을 향해 질주하다 그 권력에 의해 어이없는 죽임을 당했다. 그는 ‘신선’이 될 수도 ‘공명’을 얻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부모 복을 타고 나지 못해 불우하게 자란 허균에게서 하늘은 어찌하여 첫 아내까지 앗아갔을까? 나라가 위태로우면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는 진리를 보여주려 함일까? 자신의 심리적 상처를 치유할 수 없어 연약한 갈대처럼 흔들거리며 살다 간 허균. 그래도 변절보다는 차라리 은둔이 나았을 텐데, ‘은둔’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외로운 그의 마음이 머물 수 있는 곳은 정녕 없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