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20년 이상 우리말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으니 ‘말'과 어지간히 가깝게 지내온 세월이다. 그 세월 동안 강의를 통해, 또는 이러저러한 지면을 통해 ‘말'을 바르게 쓰고 또 품위 있게 쓰라는 잔소리를 적잖이 해왔다.
그럼 과연 나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어쭙잖은 지식을 갖고 교수라는 지위를 이용해 너무 오만하게 지껄여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크게 달라진 것도 없다.
우리말에 대해 남을 가르칠 만큼 아는 것도 많지 않고, 또 알고 있는 것도 정확한지 자신할 수가 없다. 다만 우리말 공부를 직업으로 하고 있으니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아는 수준에 불과하다. 이를 좀 과장해서 지금까지 아는 척해온 것이다.
우리말의 지식에 대한 것도 그러하거니와, 실제 말하기에서는 더더욱 형편이 없다. 말은 어눌하지, 말소리는 탁하지, 말의 내용은 거칠고 험하지 등등 남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보니 교양과 품위와는 거리가 먼 말하기 생활을 해온 셈이다.

10여 년 전에 졸업한 제자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편지 대신 전자우편을 주고받는 시대지만, 전자우편 대신 편지로 안부를 물어온 것이다. 편리한 전자우편을 두고 조금은 불편한 편지를 선택한 것은, 나이 든 은사께 인사를 하는 데 편지가 더 정성이 깃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제(師弟) 관계가 예전만 못한 각박한 시기에 안부 편지를 다 받다니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교수님 잘 계시죠?”라는 인사 표현이었다. 제자야 반가운 마음에서 무심결에 쓴 것이겠지만, 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는 좀 거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 표현에서 문제가 된 것은 ‘교수님'이라는 호칭과 ‘잘'이라는 부사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대학 시절 자기 과 교수를 어떻게 불렀나 생각해 보라. ‘교수님'이었나, 아니면 ‘선생님'이었나.
이 경우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교수님'은 아무래도 직업과 관련된 호칭이어서 좀 딱딱한 느낌을 준다. 반면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부드럽고 정감이 있다. 그래서 직접 가르침을 받은 교수라면 ‘선생님'으로 호칭하는 것이 맞다.
어느 날 공과대학의 한 학생이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교양국어 시간에 배운 대로 자기 과 교수를 ‘선생님'으로 호칭하였는데, “내가 고등학교 선생인 줄 아냐?”면서 크게 역??. 교수가 대단한 직업도 아닌데 꼭 그렇게 대접을 받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경우는 분명 교수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물론 직접 배우지 않은 다른 과 교수는 ‘선생님' 아닌 ‘교수님'으로 호칭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잘'이라는 부사는 “잘 가라”, “잘 생각하거라”, “잘 있었니?” 등에서 보듯 주로 어른이 아이에게 쓰는 말이다. 그러므로 학생이 선생님에게는 ‘잘'이라는 말은 쓸 수 없다. 크게 보면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이 말을 쓸 수 없다. 예를 들어, 후배 교수가 선배 교수에게 “잘 계시는지요?”라고 써서는 곤란하다. 이 경우에는 ‘평안히', ‘편히'와 같은 부사를 쓸 수 있다. 곧 상대를 좀 높여서 표현할 때 이와 같은 부사가 적합하다.
그런데 선생님이나 집안의 어른과 같이 깎듯이 높여야 할 상대에게는 ‘평안히'나 ‘편히' 등을 써서는 안 된다. 이들 대신 ‘안녕히'를 써야 한다. ‘잘, 평안히, 편히, 안녕히' 가운데에서는 ‘안녕히'가 가장 높은 등급의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은사에게 “선생님, 그동안 평안히(편히) 계셨는지요?”라고 인사를 해서는 안 되고, “선생님, 그동안 안녕히 계셨는지요?”라고 인사해야 격에 맞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평안히'나 ‘편히'를 굉장히 격이 높은 단어로 착각을 하고, ‘안녕히'를 써야 할 자리에 이들을 버젓이 쓰고 있다. 이는 상대를 본의 아니게 무시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상대가 불쾌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연세 든 어른으로부터 알 만한 사람들이 ‘안녕히'도 제대로 못 쓴다고 걱정을 하는 것을 자주 듣곤 한다. 자, 이제부터 ‘안녕히'라는 말에 인색하지 말자.
- <말은 인격이다> 저자 조항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