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 2012.3.19-2012.3.20

무라카미 하루키의 특색이 짙게 묻어나는 작품이라는 평이 있지만, 무라카미 작품을 처음 읽는 나로서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일단 맛보기만 한 기분이다. 한 번 읽기 시작하니 멈출 수가 없어서 끝까지 전속력으로 질주했는데, 그 부작용으로 책의 묘미를 반 정도는 날려버리고 만 게 아닌가 싶다. 책 뒤의 '추천의 글'을 읽고나서야 이 책의 진가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아, 이렇게 엉성하게 책을 읽을 거면 그만둬야 하는 거 아닌가.

 

 

1. 우연한 여행자

2. 하나레이 만

3. 어디에서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서

4. 날마다 이동하는 신장처럼 생긴 돌

5. 시나가와 원숭이

 

 

흥미 위주로 읽으려고 했는데, 제목이 도쿄기담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초반부는 기담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우연한 여행자> 에서는 작가가 소설에 처음 등장해 자기 경험담을 털어놓으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이렇게 독자를 끌어들이는 것이 무라카미의 뛰어난 실력이라고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많은 일들을 우리는 거의 무시해버리고, 간혹 그것을 인식한다고 할지라도 그걸 '우연'이라고 치부해버린다. 하지만 조금만 더 의미를 부여하면 그건 왠지 운명적으로 굉장한 사건으로 느껴진다. <우연한 여행자>를 읽으면서 도서관에서 셜록홈즈-팅커테일러솔져스파이-스티븐 호킹 전기를 차례로 발견했던 내 경험이 생각났다. 이 모든 것들은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어있었고, 내가 관심 갖고 모든 작품을 섭렵하는 단계에 있었던 베네딕트 컴버배치(benedict cumberbatch)가 출연하고 있는 작품들이었다. <우연한 여행자>는 일상에서 우연에 의미를 발견하는 것의 즐거움을 일깨워 준 작품이었다.

 

 

하나레이 만은 하와이에서 파도타기를 하다가 상어에게 물려 익사해 죽은 아들의 어머니인 사치의 이야기이다. 아들을 잃은 여자의 비통한 심정을 너무 차분하게 표현하고 있어서 놀라웠다. 아니, 아들이 죽었는데 이 엄마는 왜 그 흔한 통곡조차 하지 않는 거지. 하지만 사치가 보여주는 모습에서 그녀의 가슴에 분노와 비참함이 자리잡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겉으로는 강인하고 자존심 센 여자로 보였지만, 결국 소설의 마지막에서 아들의 혼령을 찾아 바닷가를 헤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혼령을 만나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가는 사치의 뒷 이야기는 알 수가 없다. 사실 공감하기엔 너무나도 애매모호한 작품이어서 그다지 할 말이 없다. 다만, 처음으로 기담스러운 내용이 조금은 등장했다고 할 수 있겠다.

 

 

<어디에서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서>는 '추천의 글'에 의하면 흥미로운 캐릭터인 여성을 내세우고 있다고 하는데, 흥미롭다고 하면 흥미롭다. 사라진 남편을 걱정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어찌나 형식적으로 보이는지. 말하자면 이 책의 전체에서 냉소적이고 정이라고는 없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죽어버린 도시 같았던 일본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놓은 것 같은데, 거기에 '기담'이라는 요소를 더한 것이다. 이런 내 생각은 이 책을 평가하기 위한 나의 의견이지만, 정작 내가 이 작품을 읽어서 뭘 얻었냐 하면, 명백하게 無라고 할 수 있다. 뒤에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24층과 26층 사이에 놓인 거울 속으로 남편이 사라져버린 건 아닐까 하고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게 다 뭐란 말인가. 기담은 얼어죽을.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그냥 흔하게 일어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어떤 해프닝들일 뿐이다. 허무한 결말을 맞이한 후에, 도대체 나에게 뭐가 남았는가, "시간 낭비했어" 라는 기분 뿐이었다. 단지 어떤 여성을 묘사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날마다 이동하는 신장처럼 생긴 돌>은 그 분위기 묘사로 말할 것 같으면 최고였다. 그다지 낭만적이지는 않은 연애이야기를 시작하는가 했더니 어느새 주인공 준페이가 써내려가는 기담 소설이 분위기를 압도시킨다. 밤에 불꺼놓고 이불 속에서 읽었는데, 내 주변의 모든 물건들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단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읽지 않았다면 감흥 없는 내용이 될 뻔 했다. 그러니 이불 속에서 읽은 걸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 결코 '진정한 인연'은 아닐 것 같았던 누군가가 결국 진정한 인연으로 기억에 남아버리는 안타까운 이야기이다. 그런 인연에 대한 기억은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걸까. 신장은 자꾸 움직이고,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계속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그것을 떼어내겠다는 생각을 떨쳐내고 받아들이자 신장은 자취를 감춘다. 이제 그냥 온전히 그 기억 속에 박혀있을 거다. 그러니까, 이 책의 단편들 중에 단연 최고라고 생각했다.

 

 

<시나가와 원숭이> 이 무슨 해괴한 이야기인지. 가장 기담스러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상한 소재들이 한 데 어우러진 이상한 작품이랄까. 주인공인 미즈키에게 암담한 과거가 없었더라면 아마 이 책은 신비로운 '동화'라는 인상을 내게 남기고 끝났을지 모른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아니나다를까, 원숭이가 말을 하니까. 그리고 그 원숭이는 주인공 미즈키 가슴 속에 있는 상처를 끄집어 들춰내는 역할을 하는데, 미즈키는 그 상처를 피하지 않고 안은 채로 자기 자신의 인생을 되찾아나갈 것이라고 희망을 품는다. 그러니까 동화적인 교훈을 가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전혀 동화스러운 이야기도 아니고, 원숭이가 등장하기 전엔 기담스러운 면모를 크게 느낄 수도 없으니까 이게 '무라카미 하루키' 식의 모르는 사이 스리슬쩍 독자를 끌어당기는 능력이 아닌가 싶다. <날마다 이동하는 신장처럼 생긴 돌>에서 느낀 것 보단 깨닫게 하는 게 더 없는 황당무개한 이야기이지만, 적어도 "상처를 끌어안고 당차게 나아가자" 뭐 이런 교훈이라도 얻었으니, 오히려 이 소설이 마지막에 배치된 게 더 희망적인 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