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지병으로 집안 가세가 기울대로 기운탓에 전 부모님과 떨어져 할머니와 살고
있었습니다.
학교를 안 간지 며칠이 되었는데도 학교에서 기별이 안갔는지 부모님 한테선 연락이 없었고,
할머니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습니다.

학교에 가는것 처럼 책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지만 막상 갈 곳이 없더군요.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오로지 SKY만을 생각하며 우스게 소리처럼 집과 독서실만을
왕래했을뿐 그이외의 것에는 신경조차 쓰질 않았던 때였죠.
'가지 말라는 곳엔 가질 않았고,
하지 말라는 일은 삼가 했기에
언제나 나는 얌전하다고 칭찬 받는 아이였지요~'
[내인생은 나의것]이란 노래의 가사가 딱 저한테 하는 말 같았습니다.
언제나 범생이였을것 같은 제가 학교를 그만 두고 거리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대체 어디서 무얼 할지를 모르겠더군요.

한적한 동네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언제 왔는지 모르게 서너명이 저를 에워 싸고 있더군요.
'올것이 왔구나~'
학교에 안 가고 거리를 헤맬때 부터 언젠가는 불량배를 만날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인가 봅니다.
" 돈 있냐...?"
"없는데요..."
"뒤져서 나오면 죽는다....!"
두 놈이 달려 들어 주머니의 이곳 저곳을 뒤지지만 돈이 있을 턱이 있나....?
아무것도 없자 녀석들은 시큰둥해 하며 사라져 갔습니다.
이후 부터 그 놀이터 근처에는 일체 가질 않았죠.

다음날, 어느 만화 가게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전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학생으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만화를 보고 있었습니다.
거리를 헤매고 다니느라 다리가 아팠던 전 얼마 안되는 돈으로 좀 쉬어 보려는 요량으로
만화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서서 가게안을 두리번 두리번 거렸습니다.
순간, 가게 저 안쪽 어두운 구석에서 누군가가 저를 보며 웃는게 보였습니다.
바로 전날 놀이터에서 돈을 갈취하려던 녀석들이었습니다.
전 당황했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행동했죠.
녀석들을 미처 못 봤다는듯 다시 천천히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만화들을 살펴 보는척하다가
별 재미가 없다는듯 만화가게를 나섰습니다.
그러면서 곁눈질로 녀석들을 보았는데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기고 따라 나설 채비를 하더군요.
전 최대한 침착하게 가게 문을 열고 거리를 걸었습니다.
웬일로 대로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녀석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저를 따라 왔습니다.
쭉 뻗은 길을 걸으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연신 생각했습니다.
마침 저 앞쪽에 왼쪽으로 꺾어지는 길이 보였습니다.
전 천천히 왼쪽 길로 방향을 틀어 걸었습니다.
그리고 골목에 들어서자 마자 뒤도 안돌아 보고 냅다 뛰었습니다.
정말 정말 내 인생에서 그렇게 무지막지 하게 뛰어 본적이 있는지 생각이 안날 정도로
뛰고 또 뛰었습니다.
어느 정도 도망친후 뒤를 돌아 보니 생각대로 녀석들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습니다.
저를 놓치고 황당해 할 녀석들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기도 했죠.
'그나저나 큰일이다, 앞으로 어떻게 하나....?'
언제 어디서 녀석들을 만날지 모를 일이기에 도망쳤다는 안도감 보다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하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그날 저녁 엄마가 할머니 댁에 와 계셨습니다.
학교에서 연락이 갔던거죠.
엄마는 울며 불며 저를 잡고 '엄마가 미안하다....'는 말씀만 되풀이 하셨습니다.
전 곧바로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서울 집으로 갔습니다.
학교에 다시 가라는 엄마를 설득해서 검정고시를 보겠다고 말씀을 드린 탓이었지요.
엄마는 저를 믿고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전 낮에는 작은 공장에서 일을 하며 밤에는 공부를 하는 말그대로 주경야독을 하며
1988년 4월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에 합격을 했습니다.
1988년 2월 졸업한 친구들 보다 2개월만 뒤쳐졌을 뿐이었습니다.

불량배들과의 에피소드가 별것 아닌것 처럼 느껴지는 분들도 있을겁니다.
하지만 제게는 너무나 두려운 존재들이었습니다.
학교라는 울타리속에서 알게 모르게 보호를 받으며 살아왔던
저에게 항상 보고 듣고 걷던 거리며 골목들이 사람들이
학교를 벗어나는 그 순간부터 너무나 낯설고 두려운 존재가 되었던 황량한 기억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움츠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