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회에는 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죄가 아니더라도 사회통념 상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일들이 있다. 69세의 노인이 17세의 소녀를 사랑하는 일이 보통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쳐질까? 그들이 순수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보기 보다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우가 더 많겠지...... .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선망받던 69세의 고독한 시인 이적요 앞에, 어느 햇살 좋은날 17세의 소녀 은교가 나타나고, 바로 그날부터 노시인의 말못할 사랑이 시작된다. 사랑은 왜 적절한 때에 적절하게만 찾아올 수 없는걸까? 너무 늦게 찾아온 사랑이 노시인의 남은 삶을 섬광처럼 태워버렸다.

 

시인을 아버지처럼 따르던 제자 서지우는 불행히도 문학성이 없었다. 시인은 그에게 소설을 대신 써주고 서지우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그로 인해 이미 시작된 그들의 불편한 관계는 은교를 향한 시인의 마음을 알아챈 서지우로 인해 더욱 불편해진다. 은교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두 사람의 애증과 삼각관계가 결국 살인까지 부르게 된다.

 

오해하진 말라. 반성문 따위나 쓰자고 이 글을 남기는 건 아니다. 나는 반성하지 않는다. 회한도 없다. 서지우는 죽어도 좋을 무가치한 인간이었다. 그는 문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작가로 살았고, 끝끝내 내 시를 한 편도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작가를 어떻게 용인할 수 있단 말인가. -p.13

 

그러나, 서지우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여전히 '멍청'했다. 감수성이란 번개가 번쩍하는 찰나, 확 들어오는 그 세계를 단숨에 이해하는 섬광 같은 것일진대, 그에겐 그게 없었다. -p.69

 

'멍청한' 서지우의 머리로는 그애의 머리칼만을 만졌을 뿐인 순간의, 내 충만감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p.314

 

노시인의 사랑이 왜 내겐 하나도 추해 보이지 않을까? 69세면 어떤가? 그렇게 멋진 시인에게 사랑받는다는건 행복한 일일 것 같다. 내겐 외려 서지우가 추해 보인다. 아, 진짜 서지우가 추했나? 시인 이적요에게 너무 몰입해서 읽다보니 서지우가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거울이 다 같은 거울이 아니라는 걸 이해 못하는 서지우와 은교의 거울을 찾아주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이적요의 모습은 분명 비교가 되었다. 여자라면 이적요 같은 남자를 좋아하지 않을까?

 

자기를 괴롭혀서 시를 짓는 것 보다 
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다  - A. Endre(앙드레)
- p.107   
 

중간중간 나오는 여러 시인들의 다양한 시들이 참 좋았고,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지도 않았다.

 

다 읽고나서는 좀 먹먹했다. 시인의 살의를 알아챈 서지우, 제자의 마지막 모습에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이적요, 뒤늦게 할아부지의 마음을 알아버린 은교......, 다 슬프다.

 

책이 재미있어서 영화도 보았는데 영화도 나름 재미있었지만, 너무 많이 여과되어서 시인의 감정이 책만큼 잘 느껴지지가 않았다.

은교, 박범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