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00엔 보관가게』는 표지부터 '힐링'이 가득하겠구나 짐작할 수 있는 책으로 출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네이버 책 · 문화와 다양한 문화 뉴스에서 소개되어지는 걸 보면서 소장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특히 요즘처럼 컨디션이 힘들고 아파 움직이는 게 괴로울 때는 이런 책 한 권 가지고 카페나 방에 틀어 박혀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과 함께 읽으면 얼마나 좋을지, 생각만 해도 즐거울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책을 읽으면서 『하루 100엔 보관가게』를 읽기로 결정한 내 자신이 얼마나 대견스러웠던지. 책을 읽으면서 이토록 사람들의 '슬픔'을 교묘히 감추면서도 위로해줄 수 있구나 싶단 생각이 들었다. 다른 소설에는 참 자극적일 수 밖에 없는 소재의 에피소드인데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는 매우 담담히 이야기를 해준다. 읽는 사람도 마음 편히 책을 한장 한장 넘기면서 심각해졌다가 환하게 웃을수 있는 책, 그게 바로 『하루 100엔 보관가게』였다.
이 책은 <고양이 변호사>로 한국에서도 꽤 유명한 일본 작가인 오야마 준코의 신작이지만 나는 <고양이 변호사>를 읽지 않아 오야마 준코의 유명세를 전혀 알 지 못했는데, 아마도 전작 또한 매우 훌륭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하루 100엔만 지불하면 모든 지 보관해주는 상호도 간판도 없는 가게의 주인 기리시마 도오루는 어릴 적 불의의 사고를 당해 앞을 보지 못하는 데 어느 날 뜻밖의 방문으로 보관 가게를 열었는 데 앞을 보지 못해도 성실함과 탁월한 기억력으로 그럭저럭 가게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루 100엔 보관가게』는 이 보관가게를 둘러싼 다섯 가지 에피소드를 보여준다. 보관 가게의 사물(포렴, 진열장)이나 고양이, 손님의 시선으로 그려낸 다섯 가지의 에피소드에 담긴 상처와 슬픔은 우리네들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 그럼에도 자극적이지 않게 단순히 '대화'를 함으로써 서로가 서로의 상처와 슬픔을 마주하고 나름대로 삶의 기로에서 선택하는 과정을 보는 재미가 있다.
과연 나는 어떨까. 저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내 주변에 100엔 보관가게가 있다면 나는 무엇을 보관하고 싶을까. 책을 읽는 내내 그들의 슬픔과 선택을 훑으면서 나의 문제를 생각해보기도 하고, 해결되진 않지만 자연스럽게 문제를 마주할 용기가 생긴다.
<목차>
보관증 1 어서 오세요, 보관가게입니다.
보관증 2 선물 받은 물빛 자전거를 접수합니다
보관증 3 상자에 담긴 소중한 기억을 접수합니다
보관증 4 서류에 적힌 슬픔을 접수합니다
보관증 5 책 속에 담긴 죄책감을 접수합니다
에필로그 사장님 고양이와 비누 아가씨
모든 에피소드는 유기적으로 조금씩 연결되어 있다. 스치듯 지나간 인연이 '사건'을 통해 다시 엮이고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 작가가 처음부터 모든 것을 기획하고 썼구나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저자 오야마 준코의 이전 작품을 찾아봐야할 것 같고, 이후의 작품 또한 눈여겨 볼 것 같다. 오랜만에 읽은 일본 특유의 힐링 책. 약간의 반전과 소소한 분위기, 그러면서도 진지한 메세지까지. 고민되고 슬픈 일이 있다면 다른 이들의 고민과 이야기, 그리고 선택을 같이 따라가면서 내 생각을 정리해보는 건 어떨까?
단, 마지막에 가서 아쉬울 수도 있겠다. 뭔가 아직 덜 풀린 느낌이라 시리즈로 계속해서 나오면 좋지 않을까 싶다. 작가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기를.
▶ 밑줄 긋기.
제가 아는 한, 그녀는 어떤 일에든 신중해서 그날까지 실수를 저지른 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녀의 실수는 겨우 단 한 번. 그런데 만약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면.
주변 상황이나 사회구조는 모두 받아들이고 견뎠지만, 자신이 저지른 실수만은 그복하진 못했던 것 아닐까요.
그만큼 아들을 사랑했겠죠.
도망친 그녀를 원망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녀에게도 마음이 있었떤 거예요. 빨간 옷을 입고 있었다니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그녀도 조금은 변한 걸까요.
그날, 주인은 오전 11시가 지나도 저를 떼지 않고 가게를 지켰습니다. 계속 연애소설을 읽으며 손님을 기다리다가 결국 시계가 일곱 번 울었습니다.
저를 떼어낼 때, 주인은 원래의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아왔습니다.
빨간 옷의 여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진갈색 여행 가방은 주인의 것이 되었습니다.
p.36~37
"어서 오세요."
주인이 말했다.
마른 구석에 앉아 늘 책만 보는 주인은 눈이 보이지 않아서 손가락으로 책을 읽는다. 내 눈에는 아직 한참 어린 풋내기에 불과하지만, 나이에 비해 차분하다.
게다가 감이 뛰어나다. 포렴이 살짝 흔들리자마자 손님이 온 것을 깨닫는다. 공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는지 이해가 빠르다. 그런데 내 불만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 매일 아침 마른걸레로 나를 열심히 닦는 주제에 이용할 생각도 없고 처분할 마음도 없는 것 같다.
전신이 쥐색이 할아버지는 내 위에 손을 얹고 체중을 실어 구두를 벗은 후, 마루로 올라갔다.
쥐 할아버지만이 아니다. 다들 내 위에 손을 짚는다.
그래서 내게는 그날 온 손님의 지문이 남아 있다.
만약 주인이 살해되면 내 덕분에 범인을 잡을 거다. 그러니까 나는 존재 가치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못 살겠다고, 젠장!
p. 104~105
가방을 끌어안고 내 방으로 갔다.
내 방에는 결혼 전과 똑같이 책상이 있고 침대가 있다. 영어 사전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어릴 때는 이 방에 만족했찌만, 지금부터 이 곳에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지긋지긋하다. 커튼은 촌스러운 꽃무늬고 침대 커버는 시대에 뒤처진 체크무늬다. 이 방은 지나치게 어린애 같다.
무엇보다 도쿄타워가 보이지 않는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불을 끄고 눈을 감았다.
어둡고 조용한데 잠이 오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가방을 열어 <어린왕자>를 꺼내고 형광등을 켰다. 겉 상자에서 꺼내자마자 책등 아래에 낡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군데군데 벗겨져 알아볼 수 없지만, 도서관의 장서 표식 같았다.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니, 오랜만이다. 이러고 있으니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독특한 그림으로 시작한 소설은 달콤하기만 한 동화가 아니라 굉장히 철학적인 이야기여서 금방 푹 빠져들었다. 아동용 책이 아니라고 깨달은 순간, '이 책은 누워서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문장에 도달해 깜짝 놀랐다. 그 때 전화가 울렸다.
내 스마트폰이다. 료스케는 아니다. 모르는 번호다. 경계하며 받자, 상대는 "사사모토입니다"하고 이름을 댔다.
p.169~170
유리문으로 해님이 들어온다.
방석이 햇빛을 받아 폭신폭신 부풀었다. 폭신한 그 위로 올라가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이러고 있으면 참 기분이 좋다.
오늘은 5월 한낮.
여기는 아시타 마치 곤페이토 상점가 끄트머리의 자그마한 가게. 우리 집이다. 높은 마루 위의 이 방석은 사실 손님용이다.
미안하긴 하다. 손님이 들어오면 내가 비켜주잖아? 손님은 아무 것도 모르고 방석에 앉는다. 그러면 반드시 내 털이 달라 붙는다. 내 하얀 털이 끈덕진 스토커 타입이어서 회사원의 양복에 붙고 아줌마의 양말에 붙어, 그들이 가게를 나가 상점가를 걸을 때면 '어이, 저거 봐. 저 사람 보관가게에 다녀왔어'하고 광고를 해준다.
그런데 고양이 털이 붙었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없으니까 손님은 그 상태로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내 털 역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여행이다.
상상만 해도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나는 곤페이토에서 태어나 곤페이토에서 자랐다. 당연히 여행해본 적도 없다. 원래 고양이는 영역에 민감해서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동물이다. 내 영역은 상점가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고양이게는 충분한 넓이지만, 콩알만큼은 호기심이 있어서 해보고 싶을 때도 있다. 여행 말이다. 아마 나는 평생토록 이 상점가에서 나가지 않을 테지만, 내 털이 여행한다고 생각하면 재밌다.
벽시계가 세 번 울리고, 주인이 안방에서 나왔다. 오후 개점 시간이다.
주인은 늘씬하니 아름다운 손을 뻗어 쪽빛 포렴을 처마에 걸었다. 포렴이 주인의 손목을 휘감자, 주인은 차분하게 벗겼다.
p.191~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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