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길에서 만난 옛 친구처럼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2002년 가을, 난 국민학교 친구를 20년 만에 만났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ㅈ집에 들러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떠오를 때면 친구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부모님들은 으레 친구 집에 있을 거라 믿고 찾지도 않았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헤어졌다. 학교가 갈라지고, 그 친구는 다른 도회지로 이사 갔다. 그리도 친한 친구였는데도 잊혀졌다. 망각의 깊이가 그리도 깊었단 말인가. 그러다 ㅈ가 오랜만에 고향방문을 한 것이다. 그렇게 우연은 필연이 되었다. 소주한잔 걸치면 딱 좋은 친구인데 나도 ㅈ도 술은 젬병이다. 기약도 없는 식사 약속을 한 다음에 헤어졌다. 벌써 십년 전이다. 지금은 뭐할까? 전화번호나 받아둘걸. 생각도 못했다.

 

김서령! 이름이 참 예쁘다. 이름이 예쁘면 모든 것이 좋아 보이는 편견에 사로잡힌 소심한 나는 이름만큼 내용도 아름다움으로 가득찰거라 생각했다. 마치 사막에서 지는 태양의 석양이든지, 이슬 맺힌 아침 이슬의 영롱함을 떠올렸다. 근데 쏘주한잔이라니. 이게 말이 돼! 스무 살 때부터 담배를 피웠지, 소주는 기본이지, 투다리에서의 친구와 한 잔 추억은 얼마나 아름답게 묘사되었는가. 순진한 나의 눈으로 보기엔 '김서령'은 보통 여자는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삶은 예쁘지 않아.

 

인간이란 존재는 손에 넣을 수 없을 때 갈망의 욕구는 최대치가 된다. 나의 사정거리 밖에 있는 그녀의 삶은 야생 캥거루다. 길들여지지 않는, 그러나 진심과 정은 많은 날 것의 그것이다. 강연을 부탁했다 자신이 착하지 않으니 가지 않겠다며 거절한 이야기나, 친구들과 무작정 떠난 흑산도와 블라디보스톡 여행기는 야생이 가져다주는 싱싱함과 풋풋함이다. 나는 절대 그러지 못한다. 계획되지 않는 여행,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다. 그녀는 그것을 즐긴다. 그래서 부러운 게다.

 

첫 산문이란다. 미안하지만 소설과 한국현대문학에 무지한 나에게 저자의 이름은 생경하다. 낯설어서 어설프고, 그녀를 처음 접하는 터라 미숙하다. 그런데 있잖아 그녀의 이야기는 전혀 낯설지가 않다. 유난히 춤을 잘 추었던 중학교동창인 땅꼬마 ㅂ을 보는 듯하다. 자유와 낭만을 추구하면서도그녀의 삶에서 어찌 진지함이 스며있단 말인가. 결국 자신을 치밀하게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안 되는 것을.

 

"내 안의 욕망을 읽어내는 일은, 아직 나에겐 숙제 같다. 그것도 참 어려운. 부엌이라는 공간에서 처음 배우기 시작한."

 

밑줄 그은 문장이 하나 더 있다.

 

"가끔 생각한다. 내 소설의 독자는 누구일까. 어떤 이들이 내 소설을 읽고 내 소설로 위로를 받을까. 나는 누구를 위해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일까. 내 책을 읽는 그대들은, 누구일까."

 

작가라면 누구나 갖는 호기심이다. 독자로서 한 마디 해 주고 싶다. '바로 당신 같은 사람'이다. 철부지 같아 보이는 노처녀이고, 자유와 낭만을 즐기고 싶은 한 인간이면서, 사랑하고 싶고 사랑 받고 싶은 사람, 바로 당신과 같은 들이 당신의 책을 읽고 위로 받는다. 거기에 나도 있다.

 

다람쥐 쳇바퀴-진부한 표현이라 쓰고 싶지 않지만 더 이상의 멋진 표현을 찾지 못하겠다―돌듯 무료하기 그지없는 나에게, 20년 만에 만나 친구가 그동안의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해외여행 간 것, 아내를 만나 이야기, 아이들 자라는 이야기 등 등. 나와 그리 다르지 않는데 그 친구의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지고 재미나는 이유가 뭘까. 김서령의 첫 산문집도 친구에게 듣는 흘러온 이야기 같다. 소파에 자빠져 낄낄대며 읽어 가면 좋을 재미난 이야기들이 잔뜩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