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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매우 즉흥적이고 우연한 행동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개인적으로도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아 보면 정말 아주 작은 우연에서 시작된, 어떤 사소한 행동이나 선택이 결과적으로는 내 인생의 크고 작은 전환점을 가져 왔음을 깨닫고 놀라곤 한다.

위대한 피아니스트 리흐테르!

내가 '행복한 클라시쿠스' 라는 책을 통해 그의 이름을 알기 전까지 내게 피아노나 피아니스트는 관심 밖이었다. 기껏 해 봐야 쇼팽의 월광소나타 혹은 녹턴, 그리고 최근에 KBS 클래식 FM을 통해 알게 된 손열음 정도?

별 특별한 이유없이 그저 현악협주곡이나 현악독주곡, 그 중 무반주 첼로곡을 좋아 했지만 아직은 무슨 곡을 좋아한다고 내세울 만한 곡이나 연주자는 없었다. 다만 라디오 방송을 꾸준히 듣다 보니 귀에 익은 작곡자나 지휘자 또는 곡명을 들으면 반가운 수준이랄까?

그래서 도서관에 가서 다른 책을 찾아 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리흐테르라는 이름이 반가워 꺼내 든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찾는 책이 그 부근에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별 생각없이 쭈욱 책 제목들을 읽어 보다 낯설지 않는 제목이 눈이 들어 와 꺼내 보니 피아노 앞에 앉은 다소 완고하고 냉철한 인상의 리흐테르 사진이 나를 사로잡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빌려 온 책을 읽었는데 읽을 수록 점점 이 낯선 거장에 대해, 그의 음악에 대해 알고 싶다는 욕구가 점점 더 커지는 것이 아닌가!

비슷한 시기에 내게 다가 온 글렌 굴드와 리흐테르!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글렌 굴드와 리흐테르가 서로의 연주를 듣고 서로를 향해 존경심을 가졌었단다. 서로 다른 풍모와 경지에 도달했던 두 명의 피아니스트들에 알게 되고 또 각기 다른 그들의 마력에 흠뻑 빠져 버린 이 상황이 내게는 참으로 신기하기만 하다.

책을 읽다 보니 리흐테르를 내게 안내해 준 이 책의 저자이자 리흐테르의 전기 영화를 만든 브루노 몽생종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생겨났다. 또한 아무 때나 약간의 수고를 통해 리흐테르 뿐 아니라 수많은 연주자들의 공연을 있는 자리에서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현대 문명의 이기가 이때처럼 고마울 수가 없다.

유튜브를 통해 엄청난 자료들을 보며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무튼 한사코 자신의 전기문이나 영화 만드는 것을 거부하던 리흐테르의 마음을 열게 한 브루노 몽생종은 위대한 음악가의 일생을 영화를 만드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는 글렌 굴드와 함께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관한 영화도 찍었다. 그래서 리흐테르의 영화에 그때 촬영했던 리흐테르에 대한 글렌 굴드의 인터뷰 내용도 담겨 있다. )

결정적으로 리흐테르의 마음을 열게 한 것은 리흐테르가 사랑했던 작가 프루스트를 그도 사랑했다는 것, 프루스트를 통해 리흐테르가 평생 음악의 화두로 삼았던 문제에 브루노 역시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고 두 사람 사이에 깊은 공감대를 형성했고 신뢰를 쌓아 갈 수 있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평생 음악의 수도자로 불리울 만치 음악 외의 사생활에 대해 침묵하고 드러내지 않았던 리흐테르는 연주자란 악보를 반사하는 거울이뿐 해석자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가둘수록 피아노를 더 잘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그래서 외로웠고 그 평생 꺽일 줄 모르는 타고난 그의 순수성을 직관적으로 읽어낸 브로노에게 생의 마지막 시기를 내어 준 것은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행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책을 다 읽은 후 브루노가 얼마나 리흐테르에게 애정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가 만든 영화를 꼭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의 눈을 통해 생전의 리흐테르의 모습을, 그의 음성을, 그의 풍모를 보고 싶다는 갈망에 사로 잡혔다. 그런데 우연히 글렌 굴드의 연주 장면을 한 블로그에서 발견하고는 YouTube를 뒤져서 찾아 냈다. 이틀동안 시간이 날 때 마다 그의 영화를 보고 리흐테르의 연주 장면을 보았다.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물론 이미 리흐테르나 글렌 굴드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더 더욱 리흐테르의 전기문과 함께 브루노 몽생종의 영화를 꼭 보라고 말해 주고 싶다.

브루노를 통해 리흐테르 자신이 들려 준 한 거장의 인생이 주는 감동은 그 어느 문학 작품 못지 않았다. 묵묵히 자신을 음악에 헌신하며 굽힘없이 자신만의 길을 걸어 온 사람에게서 풍기는 일종의 거룩함이 리흐테르에게서도 그대로 느껴 진다. 그의 음악 수첩은 또 어떤한지...

내노라 하는 음악가들-작곡가와 작품, 지휘자들, 연주가들을 모두 망라한 그의 음악 수첩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세계에 발을 제대로 내딛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의 음악 수첩 안에는 클래식 음악에 대해 무지했기에 내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세계가 내게 열린 셈이었다.

이 책을 읽고 받은 감동과 일종의 경외심은 번역자의 글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의 글에 공감하는 바가 컸다.

"피아니스트 리흐테르는 어떤 점에서 위대한가? 그의 천재성은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그의 연주는 어떤 점에서 다른 피아니스트들의 연주와 구별되는 것일까? 이런 물음들과 관련해서 몽생종의 영화에 나오는 증언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번역자의 말이다.

그리고 책에 나와 있지 않은 아르투르 루빈스타인과 글렌 굴드의 증언을 함께 실었다. 이는 몽생종의 영화에는 나와 있다.
루빈스타인은 리흐테르를 위대한 지성을 지닌 어마어마한 음악가이며 피아노로 노래를 부른다고 격찬을 마지 않았다. 글렌 굴드는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두 가지 특성, 즉 매우 분석적인 치밀한 계산과 즉흥성에 가까운 자연스러움의 결합이 리흐테르에게는 가능했으며 따라서 리흐테르가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음악 전달자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내게 아주 인상적인 장면은 몽생종의 영화 중에서 연주회 때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어둡게 하고 연주하는 것에 대한 몽생종의 질문에 대한 그의 반응이었다.

그의 얼굴에 드러난 장난스러운 개구쟁이같은 표정이 그의 완고하고 냉철한 겉모습에 감추인 순수함을 드러난 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피로에 지친 듯 고개를 숙인 채 앙상한 손으로 그의 얼굴을 문지르는 모습이 그저 안타깝고 쓸쓸해 보여서 마음이 아팠었다.

80 평생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영욕에 휩싸이지 않고 살아 온 한 거장에게도 서서히 다가오는 자연의 섭리, 그 어떤 것도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에 순응하고 휴식이 필요함을 암시하는 듯한 장면이었다.

지금껏 알지 못하고 살아왔던 한 음악가의 삶이 지금 내게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고 치열한 오늘을 살면서 몇 백년 전의 학자인 다산을 배우고 고전 음악을 듣고 동시대를 사는 동안에도 몰랐던 음악가에게 뒤늦게 매료되는 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나자신도 고민스럽다.

그저 이 모두가 판화가 이철수가 말했듯 물살 거친 강 같은 현실을 잘 건너가고 싶어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비굴하지 않게 잘 살아가고 싶어서 하는 하나의 마음 공부라고 정리해 보았다.

하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답은 아니라서 좀 더 고민해 봐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