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시인이 15년만에 시집을 발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빡빡해진 삶을 사는 동안 시를 잊고 살았다. 아니, 잊은 듯 모른 척하면서 산 것이 단지 시 뿐이었을까?  깊이 알기도 전에 던져 버렸다는 것이 맞는 말이리라.

하지만 세월이 변하고 사람이 변하니 작은 시구절 하나가 주는 파동이 미처 예상치 못한 깊고 진한 여운을 마음에 남긴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놀라게 되었다.

 

이 시집을 구입해 읽기 전이지만 서평에 언급된 시 '낙타의 생'이 아름다워 적어 본다.

 

사막에 길게 드리워진
내 그림자
등에 난 혹을 보고 나서야
내가 낙타라는 걸 알았다
눈썹 밑에 서걱이는 모래를 보고서야
사막을 건너고 있음을 알았다
옹이처럼 변한 무릎을 만져 보고서야
무릎 기도 드릴 일 많았음을 알았다
많은 날을 밤에도 눕지 못했음을 알았다
자꾸 넘어지는 다리를 보고서야
세상의 벼랑 중에
마음의 벼랑이 가장 아득하다는 걸 알았다
혹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보고서야
무거운 생을 등에 지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사막을 건너왔음을 알았다

(/ [낙타의 생] 전문)

 

우리는 저마다 각기 다른 크기의 마음의 벼랑을 지니고 살고 있으리라.

지극히 주관적인 고통을 객관적인 수치로 표현하기 힘든 것처럼, 각자의 마음의 벼랑의 깊이와 그 아득함도 다르리라. 

하지만 각자에게는 저마다 자신이 본 세상의 어떤 벼랑보다 내 마음의 벼랑이 가장 아득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한다 한들 자꾸 넘어지는 내 다리를 바라 보며 느끼는 좌괴감과 슬픔을 어찌 할 것인가.

하지만 표현되지 못하던 그 아득함이 시인의 입을 빌어 시에 담기는 순간, 마치 누군가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를 내게 건네며 나의 차가운 손을 맞잡아 준 듯한 느낌이 저 깊은 곳으로부터 서서히 온몸으로 퍼진다.

 

'혹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보고서야 무거운 생을 등에 지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사막을 건너왔음을 알았다.'

흔들리며 흔들리며.... 우리가 힘들게 짊어 지고 가는 것이 무엇인지는 다르겠지만 이 대목에서 나는 사막을 건너기에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것들로 스스로의 생의 무게를 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와 철학이 인문학을 대표한다는 말의 뜻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삶의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자신과 나아가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는 인문학의 정신이 오롯이 담긴 시와 철학!

시인과 철학자, 그 경계가 의미 없음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