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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초월하여 우리 사회에 ‘무소유’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며 청빈한 삶이 과연 무엇인지 화두를 던지고 입적하신 법정(法頂)스님의 1주기에 즈음하여 스님의 삶과 가르침을 반추해보고 물질만능주의에 매몰되어 가는 현대인들에게 스님의 가르침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점검해 보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마침 스님의 재가제자로 알려진 정찬주 작가가 스님 입적 1주기를 맞아 출간한 『그대만의 꽃을 피워라』를 통해 스님의 부드러운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된 것 같아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정찬주 작가는 샘터사에 근무하던 십 수 년 동안 법정스님의 책들을 만드는 과정에서 스님과 인연을 맺어 ‘세속에 있되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무염(無染)’이라는 법명을 받고 자연의 섭리에 따른 삶을 살고 있다. 이 책은 법정스님의 속가 조카이자 불일암 초기에 법정스님을 시봉했던 현장스님과의 차담(茶啖)을 나누는 동안 떠오른 영감을 모태로 하여 스님께서 생전 수행하셨던 암자와 절을 순례하며 법정스님의 자취를 찾아가는 ‘무소유 성지순례길’이라 이름 붙일 수 있겠다.

법정스님 하면 역시 송광사 불일암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불일암은 1975년부터 1992년까지 17년간 스님께서 칩거하시던 작은 암자를 말하는데, 정작가와 법정스님과의 첫 만남도 이곳에서 이루어지게 되고, 몇 년 뒤 단옷날 아침 법정스님으로부터 ‘무염’이라는 법명을 받은 곳도 이 곳인지라 정작가에게도 법정스님과의 인연이 깊은 곳이라 할 수 있다. 법정스님께서 즐겨 읊조리시던 남송시대의 선승 야보도천(冶父道川)의 시를 통해 집착하지 않는 삶과 무소유의 정신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아 옮겨 보기로 한다.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움직이지 않고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 하나 없네

竹影掃階塵不動

月穿潭底水無痕 (p.31)

스님의 진신골편이 뿌려진 후박나무를 안아보니 스님의 속들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체온이 전해지고 바람에 뒹구는 낙엽들을 바라보니 스님의 체취가 느껴지는 듯하다. 영화 「빠삐용」을 보시고 나서 지으셨다는 굴참나무로 만든 ‘빠삐용 의자’에 앉아 스님께서 하신 것처럼 ‘인생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인생을 낭비하지는 않았는지’ 스스로 반문해본다. 채마밭을 지나며 밀짚모자를 쓰고 밭을 일구시던 스님의 모습을 떠올려보고, 차방인 수류화개실(水流花開室)에서 스님께서 경험하신 ‘텅빈 충만’을 체험해보기도 한다. 불일암 서쪽에 너와를 이고 있는 두 칸짜리 흙집인 서전(西殿)을 지을 때에 일체 전기와 수도 그리고 전화를 끌어들이지 말라는 당부를 하셨다는데, 이는 문명의 과잉으로 인하여 청빈(淸貧)과 덕(德)이 상실 되는 것을 경계하라는 스님의 말씀으로 해석되는 바, 온갖 전자, 통신기계에 둘러 싸여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 대한 경책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진도가 보이는 바닷가 포구인 우수영은 법정스님의 고향땅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 곳 우수영에서 소년 박재철(스님의 속명)은 생가지를 꺾고 뿌리째 뽑아버리는 태풍처럼 탐욕과 무지의 거친 세상으로부터 깊은 상처를 입게 되고, 6ㆍ25전쟁으로 인한 충격으로 청년 박재철은 야만스러운 세상을 벗어나 새로운 인생길을 꿈꾸게 되는데 폭력을 극도로 경계하여 한때 반독재 투쟁에 가담하게 된 것도 이때의 내상(內傷)과 연관 있을 것으로 본다. 출가(出家)의 인연이 우연이라는 가면을 쓰고 넘실넘실 손짓하는 파도처럼 숨바꼭질하기에 크게 버리고 나서야 걸림 없는 자유를 얻는 ‘위대한 포기’라는 출가는 꿈꾼다고 바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 시절에 스님과 세 번의 인연을 가졌던 진도 쌍계사엔 몇 년 사이에 전각들이 복원되고 중창되어 묵은 가람이 보이질 않고 스님께서 중학교 수학여행 길에서 하룻밤 묵었던 방도 찾을 길이 없다. 쌍계사 법당 뒤 산자락에 핀 동백꽃을 보며 이 세상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없다는 무상(無常)을 다시금 느껴본다.

미래사 효봉암은 행자 법정이 효봉스님을 모시고 수행자로서 첫발을 내딛었던 곳이고, 가야산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찾던 한 아주머니의 “아, 그 빨래판 같은 것”이라는 무심코 뱉은 말에 ‘팔만대장경도 모르면 빨래판이 되는구나!’하고 깨달아 강원으로 가서 공부하는 계기가 된 곳이다. 봉은사 다래헌에 머문 시기는 1969년부터 스님 나이 43세였던 1975년까지로 이 시절에 함석헌 선생 등과 함께 반독재 운동을 하셨다. 스님은 이 시기에 타고난 문학적 재능을 드러내게 되는데 수필 「무소유」를 1971년 『현대문학』3월호에 발표하여 문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1992년, 스님께서 불일암 생활을 접고 강원도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겨 입적하시기 전까지 기거하셨던 오두막 수류산방(水流山房)은 의외로 짧게 언급되어 있고 실제 작가가 이번 순례에서 가보지도 않은 유일한 장소인데, 일부 방문객의 몰지각한 행동으로 지난해 오두막 주인이 외부인의 출입을 감시하는 무인카메라를 설치하여 불청객으로 찾아가 기웃거리는 것도 볼썽사나운 일일 것 같아 방문을 자제했다는 작가의 말이다. 스님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곳인데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든다. 마지막으로 법정스님 일대기에 빠뜨릴 수 없는 곳이 바로 길상사일 것이다. 길상화 보살의 시주로 창건된 길상사는 현재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 도량으로 입적하시기 전까지 스님께서 강원도 오두막에서 정기적으로 내려와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역할을 한 곳이었다.

스님께서 『샘터』지에 발표하신 글을 소개하며 이 책의 제목인 『그대만의 꽃을 피워라』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유추해본다.

“꽃이 피어나는 것은 생명의 신비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특성과 잠재력이 꽃으로 피어남으로써 그 빛깔과 향기와 모양이 둘레를 환하게 비춘다. 그 꽃은 자신이 지닌 특성대로 피어나야 한다. 만약 모란이 장미꽃을 닮으려고 하거나 매화가 벚꽃을 흉내 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모란과 매화의 비극일 뿐 아니라 둘레에 꼴불견이 되고 말 것이다.” (p.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