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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작가가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 놓기까지 겪는 고통을 산고(産苦)에 비유한다. 이렇듯 한번 들어본 바가 있어 우리는 작가가 아니더라도 창작의 고통에 대해 짐작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묻고 싶다. 혹시 -수기가 아닌 소설과 같은- 글을 읽으면서 오로지 그 문장의 숨결을 통해 전해오는 작가의 고통을 느껴본 적이 있는지. 모래사장 위에 써내려 간 고백처럼, 그 사람이 달려와 읽기도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부질없음’과 힘겹게 싸워나가며 그 글을 써내려갔을 작가를 떠올려 본적이 있는지 말이다. 9편의 중․단편 소설이 묶여 있는 이 소설집 안에는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라는 제목의 소설은 없다. 그러니 김연수는 대뜸 ‘유령작가’ 라고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이 미스테리(?)한 소설집의 세 번째 소설 <뿌넝숴>를 읽을 때 즘 나는 거의 확신했다. 막연히 앞의 두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이들 사이의 ‘닮은 구석’의 정체를 말이다. 김연수는 이 소설집 안에서 글로 쓴다는 것의 한계에 대해서- 생략 되지 않고 ‘살아남아’ 기록된 것들이 과연 더 ‘유의미’하다고 할 수 있는지, 좀 더 ‘진실’에 다가가는데 도움을 주는 것들인지 회의하고 있다.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면서 ‘그의 답’은 이미 결정된 것처럼 보이는데도 나는 계속 그의 입만 보면서 마지막 말을 기다리는 청중처럼 긴장을 놓을 수가 없다. 그가 계속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란 것이 절대 진실에 다가갈 수 없는 ‘거짓말’에 불과한데도 그가 계속 글을 쓰고 있다고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세번재 소설, 뿌넝숴 ‘뿌넝숴’는 중국어 '不能說'의 음가를 한글로 옮긴 것으로 ‘말할 수 없다’라는 뜻이다. 중국어를 공부했던 내게 ‘뿌넝숴’란 말은 유학시절 일상에서 수없이 사용한 말이지만 미처 몰랐다, 이토록 내 뱉기 어려운 말이었는지. 이 독특한 제목의 소설 <뿌넝숴>는 1인칭 화자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사람은 중국인이다. 그는 한국전쟁에 인민지원군 으로 참전했던 중국인이다. 그리고 그는 검지와 중지가 잘려나간 중국인이다. 이야기는 여기, ‘검지와 중지가 잘려나간’ 사연에서 시작된다. ‘지평리’에서 미군과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전투를 벌인 주인공을, 거의 죽을 뻔 했던 그를 살린 것은 한국인 여자- 그 여자의 피(血)였다. 이 여자는 중국말을 할 줄 알았고, 비를 좋아한다는 주인공이 -전시 중에도- 한시(漢詩)를 읊조릴 때면 답가를 할 줄 아는 여자였다. 남자를 살리기를 위해서라면 자기 피를 몽땅 줄 수도 있다는 이 여자가 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었다. 지평리 전투에서 살아남은 남자가 그녀에게 ‘지평리에서 네가 본 것은 무엇이냐’고 물으니 여자가 답하길 “뿌넝숴”. 여자는 자신의 피를 내주고 내주어도 아무도 살리지 못한 그 이야기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세상 남자들의 손가락을 모두 잘라버리고 싶었던 그 마음을 차마 말할 수 없다고. 한국전쟁이 나고 30년이 지난 다음에야 태어난 나는 지평리가 어디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런 내가 1950년 지평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리 만무하다. “묻노라, 매화꽃이 어디에 떨어졌기에, 하룻밤 사이에 바람에 불려 관산에 가득히 퍼졌단 말인가(借問梅花何處落風吹一夜滿關山)” 그저 매화꽃 바람에 흩날려 가듯, 이 땅에서 사라진 뜨거운 숨들에 대해 상상할 수밖에.... ...뿌넝숴. 뿌넝숴. 그런 말이 터져나올 때까지 들려주게나.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 자네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믿기 어려운 얘기들을 내게 말해보게나.... 전쟁은 재밌지만 ‘전쟁이야기’는 재미없다고 한 남자가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해보라고 한다. 전쟁에는 ‘진실’이 있지만 전쟁이야기에는 그것이 빠져있다고 말한 남자가 ‘말해’보라고 한다. 읽는 내 가슴이 이리 뻐근해오는데 ‘유령작가’ 김연수는 어떻게, 어떻게 마지막 온점을 찍었을까. -다섯 번째 소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비련의 남주인공이다. 1986년에 여자친구를 잃은 비련의 남,주,인,공. (끊어 읽으니 더 웃기다. 여주인공은 안 웃긴데 말이다.) “부모님, 그리고 학우 여러분! 용기가 없는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야만의 시대에 더 이상 회색인이니 방관자로 살아갈 수 없는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후회는 없어” 여자친구는 남자친구인 자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유서를 남기고 한강에 투신해버렸다. 이로써 그는 여자친구 삶에서 자신이 도대체 어떤 존재였는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게 됐다. 여자친구가 왜 자살을 했는지 알 수 없었던, 그것이 너무나 궁금했던 그는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글로 써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여자친구와의 일을 이해하기 위해 거듭해서 문장을 고쳐 썼다. 하지만 그가 결국 깨닫게 된 것은, 아무리 해도, 그러니까 자신의 기억을 아무리 ‘총동원해도’ 문장으로 남길 수 없는 일들이 삶에서도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중략)...인과관계에 어긋나는 일들은 문장으로 남기지 않았다. 소설이 점점 완성돼갈수록 소설 속 여자친구의 삶에서 자신이 점점 지워진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김연수에게 한강으로 투신한 여자친구가 존재했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그가 소설을 쓰면서 문장으로 남길 수 없는 일들과 직면했 을 때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으리라. 소설가에게 세상에 일어나는 일을 꼭 그대로 묘사해야 하는 의무가 지워진건 아니지만, 문제는 만들어진 이야기 속에서도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드러난다는 점일 것이다. 책에 씌어진 것이라면 온갖 거짓말을 다 늘어놓아도 믿는-<뿌넝숴>에 나오는 구절임- 사람들을 떠올리자면 대놓고 지어낸 이야기라 할지라도 작가의 어깨는 무거울 수밖에 없을 터이다. 이 와중에 자신이 편집하는 세상이 자신이 겪은 또는 말하고자 하는 세상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은 또 어떻게 이겨내야 할까. 인과관계로 설명될 수 없는 그래서 ‘농담’이 되어버리는-첫 번째 소설,<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농담>에서- 그 수많은 이야기는 그 우연이 역사가 되고 필연이 될 때까지 생략되어야만 할까. 그러니까 결국 ‘그의 답’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려고 하는 이 부질없는 노력을 그만둬야 한다는 것일까? ‘인간은 자신이 상상하는 것만 볼수 있다’는데-네 번째 소설,<거짓된 마음의 역사>에서- 당신은 어떤 대답을 ‘상상’하고 있는지. 괜찮다면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한번 읽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는 어떨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