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서점 인터파크도서

유리창 너머는 가득찬 안개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비가 오려는지 금세 주위가 어두어졌다. 무겁게 가라 앉은 물기 어린 공기 덕분인지 책의 종이가 눅눅하게 젖었다. 축축해져 흐물거리는 종이를 한 장씩 넘기면서 먹먹한 활자들의 물기는 내 손을 타고 젖어들었다. 부지런히 책장을 넘기던 손이 점차 느려지고 어두운 주변과 함께 나는 그렇게 묻혀가는 듯 했다. 온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워 지는 듯한 기분에 백 페이지를 겨우 넘긴 뒤에 책을 덮었다. 그리고 쾌청한 날에 다시 이 책을 읽기로 다짐했다. 온 세상이 무겁고 어둡게 가라앉은 이 날에 어진의 우울한 가족사를 알기엔 너무나도 벅찼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일을 홀대하던 책을 다시 집어들었다. 이미 첫 시도는 실패한지 오래. 다시 마음을 잡아들고 집에서 가장 밝은 곳을 찾아 책을 펼쳐 들었다. 다시 읽기 시작한 내용의 100페이지 남짓 부분은 엄마가 집을 나간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방랑벽을 버리지 못하고 노름판을 이리저리 오다니는 아빠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엄마. 아버지가 집에 오는 날이면 괜시리 엄마는 아버지의 관심을 끌고자 어진에게 폭력을 가하곤 했었다. 그러나 어진은 어머니의 모진 매질을 거부할 기력이 없었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모든 행위를 불사하던 엄마는 어느날 그렇게 집을 나갔다. 아버지는 그런 엄마를 찾기엔 너무 무기력했고 또 무관심했다. 엄마의 가출은 금방 끝이 나고 일단락 되는 듯 하였으나 마치 아버지의 방랑벽과 쌍벽을 이뤄 이겨내겠다는 듯 계속되었고 결국 혼자 남은 것은 어진이였다.

자신의 과거사와 맞물려 그녀에게는 현재의 삶 역시도 고난의 연속이였다. 유복자로 태어난 남편은 어진이를 갈보로 취급할 정도로 존중해 주지 않고 그녀는 집의 창고로 내몰린다. 그녀가 홀로 향한 곳은 '바다이바구'. 그녀는 비만증으로 거대한 육체를 가진 수진과 함께 부대끼면서 수진의 평탄치 못했던 삶을 알아간다. 점차 책을 잡는 오른쪽 손이 가벼워 질때쯤 주인공은 의외의 반전을 맞이하게되면서 너무나도 무겁고 외로운 가족사의 결말이 지어지고 또 한번 무겁게 한숨을 자아내게 한다.

당신과 나

<빈집>의 가족들은 한 마디로 박복했다. 삶에 지쳐버린 그들은 각자 저마다가 사는 모습을 그저 방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가족이라기엔 너무 낯설었고 남이라고 하기엔 이유 모를 피붙이에 대한 감정을 공유했다. 비록 방랑벽에 노름을 일삼던 아버지일지라도 엄마가 보고 싶다는 딸을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엄마를 만나게 해주려던 그의 모습은 어느 아버지 못지 않게 애틋하다. 가족의 안위를 위해 어쩔 수 없는 가출을 일삼듯 해야 했던 어진의 엄마도 수진을 기르려고 필사적으로 묵묵히 일만 해왔던 수진의 엄마도 자신의 가족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그들은 가족이라는 틀안에 서로가 묶여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고 또 그래서 마땅히 자신히 해야할 일을 하고자 했다. 할 줄 아는 것은 노름 뿐이였다는 아버지의 가슴저린 말부터 남편이 감옥에 가게 될까봐 형사에게 다소 무모한 거짓말까지 하는 엄마. 거칠었지만 속은 한없이 여린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그 방식이 사랑스럽게 보듬어 주는 것이 아닌 외로움과 고통에 단련시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수진과 어진은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매일 살아오는 것이 전투였던 두 어머니로서는 세상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기꺼이 알려주어야 겠다는 하나의 교육방식이었을런지도 모른다.

가질 수 없는 것이 많아 삶이 치열 할 수 밖에 없었던 이들에게 행복이란 아주 소소한 것이였다.

"언제부턴지 몰라도 밝은 불빛 아래에서 사는 게 내 소원이었어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도 한번 째지도록 밝은 세상에서 살고 싶었어요."
"방 안을 훤하게 밝혔으니 소원 풀었네. 오늘 밤 말고도 내일 밤도 이런 불빛 아래에서 밥 먹게 되기를 빌어봐. 빌면 소원은 이루어져."
<빈집> 中 184쪽

매일 쫓기는 도망자 신세의 남편의 처지에 맘편히 불을 키고 생활 한 적 없던 엄마는 대가를 치뤄서라도 이렇게 떳떳하게 살아보고 싶었다며 말한다. '환한 불빛 아래 가족과 함께 식사'라는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을 이루기까지 엄마는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뤄야 했던가.

외톨이

결국 부모님의 치열한 생존방식 속에 어진은 어렸을 적에도, 지금에도 홀로 남겨졌다. 수진을 만났지만 그녀도 마찬가지로 외로운 처지. 수진에게 어진은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며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기 보단 자신의 외로움을 마지막 남겨진 분출할 배출구였다. 엄마의 푸념과 아빠의 토로를 오로지 듣는 일밖에 할 수 없었던 어진은 또 한번 수진으로 인해 자신의 외로움을 한 층 두껍게 쌓아만 간다. 어디에 하소연 할 틈도 없이.

어둡고 캄캄한 책 속의 분위기에 휩쓸려 홀로 하늘그네를 타고 어디 있을지 모른 엄마 아빠를 기다리는 어진의 텅 비어버린 집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