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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의 표지를 주목하자. 얼핏 멀리서보면 선으로 그려진 그림들에 불과했던 것이 가까이 갈수록 선명한 글자로 다가오고 곧 그 내용이 딱딱한 법조항이였음을 알게 된다. 단순한 선과 면으로 채워져 있는 책의 표지그림이 왜 하필 이러한 법조항으로 채워져야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책의 차례를 편다. 표지의 빼곡한 법조항 만큼이나 복잡한 한문과 법정용어로 가득차있는 목차는 더욱더 혼란스럽다. 언듯 가득히 나열된 용어들은 법학과 교재 같은 느낌을 준다. 나는 목차를 쭉 훑어 본 뒤에 쉽사리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하고 이 소설을 내가 끝까지 읽어내려 갈 수 있을까 고민한다. 그러나 그 고민은 일분 남짓 짧게 스치고 언제그랬냐는 듯 책을 읽어내려간다. 문단의 첫 시작 단어는 '사체'였다.

주인공 윤변호사는 열심히 살아왔다. 법 공부를 겨우 마치고 국선전담변호인이 된 그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변호를 맡으며 살아왔다. 그렇다고 그에게 사회를 바꿔보겠다는 필사적인 사명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국선전담변호인에게는 의뢰인을 선택할 기회 같은 것은 주어지지 않았기에 그저 ‘일’을 했을 뿐이다.

한 달에 30건을 해결하는 비슷한 일상의 반복에서 어느 날 그에게 검사를 상대로 고소하길 바라는 의뢰인의 등장으로 인해 일생일대의 변화가 찾아온다. 그의 의뢰인은 박재호는 재개발로 집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때문에 그 어느 때 보다도 필사적으로 국가의 용병들에게 대항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아들마저 잃었고 자신은 살인범이 되었다. 차디 찬 구치소에서 모든 것을 잃은 체 낙심 하던 그는 소수에게는 한없이 잔인한 이 세상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박재호의 소수의견에 대해 주인공 윤변호사는 국가를 향한 100원 소송을 시작한다.

권력

법은 비교적 명백하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이 책 속의 판사와 검사가 그랬듯이 말이다. 법은 약자를 위해 열려있지만 그 선택은 검사와 판사 같은 권력자의 손에 맡겨져 있다. 때문에 겉으로는 약자를 위해 만들어 진 것 같았던 법이 정작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아홉 명의 배심원들이 사흘간 세상에서 격리된 채 공판에 참여했다. 아홉 명의 배심원들이 평결에 도달했다. 그들은 박재호를 살리기로 했다. 단 한 명의 재판장이 평결을 뒤엎었다. 그의 단 한 마디 의견이 법률적으로 우월했다.
<소수의견> 中 406쪽

9명의 배심원의 결과는 1명의 판사로 인해 엎어졌다. 아무리 기를 쓰고 법을 연구하고 이용한 들 결정은 판사에게 주어진다. 국민참여재판이라는 허울 좋은 단어도 결국 판사의 한 마디면 어느새 무산된다. 그저 국민참여재판이라는 것은 화가난 민심을 달래려는 형식상의 연극에 불가한 것이다. 국가는 너희들을 이토록 존중해 주고 있다는.
소수이냐, 다수이냐. 핵심적인 것은 머릿 수가 아니다. 한 명의 권력자가 수 십, 수 백 명의 평범한 사람들보다 앞서기에 다수 의견보다 강한 의견이 이기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박재호가 힘 없이 구치소로 내몰려야 한 이유도 그가 오로지 소수여서가 아니다. 그에게는 권력이 없었다.

착각

윤 변호사의 변호인단과 박재호는 너무나도 괴리가 크다. 얼핏 윤 변호사의 지난 과거상을 들어보면 이 사람도 특별히 잘난 사람은 아니구나 하고 생각할 수 도 있다. 그러나 그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돕는 국선전담변호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을지언정 그는 한 건당 500만원을 받을 수 있는 여유있는 사람이였다. 그와 대석에서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3천 200만원이 적다고 생각하는 사회의 엘리트 층이다. 그가 통장의 잔고 600만원 남짓을 보고 한숨을 내뱉는다면 박재호는 집을 잃고 1주일 남짓 주어진 시간마저 머물 곳이 없어 망연자실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를 박재호와 같은 선상에서 보긴 어렵다.

윤 변호사를 부른 이유는 하나야. 난 박재호한테 도의적인 책임을 느끼네. 그 사람은 내가 권력 앞에 신념을 꺾고 굴복한 개라고 믹고 살아가도 돼. 하지만 고민해 봤네. 그래도 윤 변호사에게는 이 이야기를 다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 왜냐하면 박재호와는 달리 윤 변호사한텐 그런 착각을 누릴 권리가 없거든.
<소수의견> 中 418쪽

뿐만 아니라 윤 변호사의 뒤에는 대석과 의원, 기자 준형, 염 교수, 젊은 서울대 교수 주민, 조구환이라는 든든한 뒷 빽이 있지 않았는가. 그들은 충분히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박재호의 소수의견은 권력자가 말하는 소수의견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마치 이 승리가 사회적으로 소수자일 수 밖에 없던 사람들이 뭉쳐 새로은 역사를 쓴 듯한 모습으로 포장되어 버린다. 물론 그들이 처음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을 때 그들은 국가에 비하면 약한 존재였지만 결코 소수자는 아니였다. 그러한 그들이 소수자들의 힘을 보여준 역사가 되어버릴때 괜히 책 이름의 소수를 말끔히 지워내고 다시 쓰고 싶어 지는 것이다.

박재호를 돕는 변호인단. 그들은 이 부조리한 세상 속에 너무나도 형이상학적인 인물들이다. 자신의 생존의 위기를 마다하면서까지 박재호라는 약자를 돕는 그들의 모습들이 너무나도 영웅적이여서 꼭 보기좋게 쓰여진 동화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승리를 얻는다 해도 그것은 진정한 소수 의견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까. 까닭있는 씁쓸한 감정만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