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펴기도 전에 나는 묘한 표지에 이끌린다. 옷자락을 슬몃 들어 자신의 아름다운 다리를 드러내고 있는 소녀의 모습. 그녀가 순백색의 커튼을 살짝 들어올리자 무언가 몰래 지켜보는 듯한 노인의 모습이 드러난다. 손녀와 할아버지라고 하기에는 노인의 표정은 썩 밝아 보이지 않는다. 마치 그의 표정은 소녀가 걷지 말았어야 할 비밀의 커텐을 열어 버린 듯 어둡다. 과연 소녀와 노인은 무슨 관계인 것일까.

 스토리는 죽은 노인이자 유명 시인이였던 그의 일기장에 쓰여진 고백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적요의 비밀스러운 일기장에서 그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17살의 은교와 살아있는 송장과 다름없는 시인 이적요의 사랑. 마치 범죄같이 어둡게만 다가오는 둘의 사이 속에서 이적요는 자신이 은교를 사랑 했다고 말한다. 또 그는 사랑의 열정과 질투의 결과로 자신의 제자 서지우를 죽였다고 털어 놓는다.

과연 이적요는 은교를 사랑했는가

이적요는 자신이 은교를 사랑했다고 말한다. 허나 나는 과연 그가 은교를 사랑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그는 은교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젊음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나. 그는 은교와 만난 이후로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에 유독 민감해 지기 시작한다. 그는 은교의 곱고 가느다란 손가락과 자신의 검버섯 가득한 손을 비교하면서 그는 그녀의 핏줄을 어린 새싹이라고 표현하면서 그것을 보고 자신이 은교에게 사랑에 빠졌다고 말한다.

 

 왜 은교의 손등에서 사랑을 느꼈는가. 그녀의 얼굴도 성격도 아닌 손, 그것은 바로 17살 은교의 육체, 즉 젊음의 상징이였다. 그는 그녀의 젊음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싶어했고 그 소유욕은 곧 은교에 대한 사랑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은교를 만나고 머지 않아 반라의 몸으로 거울 앞에 선다. 거울 앞에 선 그는 영락없이 늙어버린 남자의 볼품없는 몸뚱아리가 어두운 모습으로 마주한다. 그는 자신의 늙어버린 육체에서 좌절을 느끼게 되면서 또 한번 젊음, 즉 은교에 대한 갈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적요는 은교를 표현할때 꼭 젊음과 처녀와 같은 단어로 수식한다. 그에게 있어 은교는 '사랑스러운' 혹은 '사랑하는' 이라는 표현보다 '젊은', '처녀'라는 수식이 더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결코 그에게 있어 '늙어버린 은교'는 없다. 그는 오로지 젊은 처녀 은교를 사랑했다. 그러나 젊음과 처녀는 시간 앞에서 금방 퇴색되고 만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두 사람이 끊임없이 이어가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 기한이 무한이 될 수 도 있지만 젊음은 아무리 노력한들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은교를 사랑한 것이라기 보다 그녀의 젊음을 사랑했음에도 자신이 은교를 사랑했다고 표현한다. 적어도 그가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은교는 젊었기 때문이다. 

  이적요에게서 은교는 없다. 오직 젊은 처녀만 있을 뿐이다.

스승이 갖지 못한 유일한 것

 서지우가 생각하기에 스승이 부족한 점이라곤 오직 늙었다는 것 뿐이다. 늙었다는 것은 곧 젊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였고 그것은 젊음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은교를 가질 수 없다는 이야기로 결부된다. 한없이 존경스럽고 감히 다가설 수 없었던 스승 이적요가 매일 자신을 꾸짖을 때 그는 재능도, 부도, 명성도 다 거느린 그가 마냥 부럽기도 하면서 어느새 질투가 나기도 했을 것이다. 자신은 죽어라 매달려도 써지지 않는 글을 스승은 너무나도 쉽게 썼고 또 훌륭했다. 그러나 서지우는 그 간의 질투심을 그저 묵혀야 했다. 그가 스승보다 나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교가 등장하면서 스승이 꿈꿀 수 없는 대상이라는 존재가 생겨난다. 서지우는 은교를 손에 넣을 수 있었고 그것은 스승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졌다는 일종의 쾌감이였을 것이다. 그는 은교를 사랑해서 그녀와 스승의 사이를 질투한 것이 아니다. 단지 그는 스승이 혹여나 은교를 가지게 되어버린다면 자신이 무엇이라곤 나은 것이 없는 '멍청이'로 남아버릴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렇다. 서지우는 스승은 꿈꾸지 못한 것을 가졌고 곧 자신이 스승보다 우월한 것이 있다는 것에 쾌락을 느꼈다. 그에게 있어 은교는 사랑하는 여인이 아니라 자신이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었다. 그는 절대 이것을 스승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혹여 그가 진정 은교를 사랑했더라면 스승과 은교 사이에서 은교의 감정이나 눈빛 같은 것에 집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눈빛과 안색에 모든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결국 그는 은교를 가질 수 있었고 그것은 곧 숨겨왔던 자신의 욕망이 분출될 수 있는 시작점이 되었다. 스승 몰래 단편 원고를 훔쳐 놓고 모른척 하기도 하고 스승의 집에서 은교와 성교를 하는 대범함을 보였듯이 그는 더이상 착하고 바보같은 제자가 아닌 것이다. 

 불시착한 애정결핍 

 은교는 자신이 사랑한다고 말했던 적요의 기일에 나타나지 않았다. 변호사는 은교가 냉정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서지우와 이적요를 동시에 사랑했노라 밝히며 눈물을 흘렸다. 왜 17살 그녀는 동년배 남성 대신 제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 뻘의 두 남성을 사랑했을까. 

 

 은교는 어머니의 사랑이 필요했다. 어머니의 계속되는 폭력에 제 자신을 위로하면서도 모자라는 사랑을 받을 곳이 필요했다. 그것은 단순히 동년배 남자친구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였다. 필히 자신을 감싸줄 엄마의 손길, 바꿔말해 따뜻한 어른의 손길이 필요했던 것이다. 머지않아 그는 서지우를 만났고 또 이적요를 만났다. 집에서는 무거운 짐을 진 장녀로서 아무 곳에도 위안을 받을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적요의 집에선 사랑받는 막내 일 수 있었다. 그녀는 너무나도 그리웠던 어른의 손길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두 남성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외로움을 느껴야 했다. 자신을 어떻게 더 사랑해주려고 노력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더 신경 쓰기 바빴던 두 사람에서 은교는 왠지모르게 소외되었던 것이다. 나는 은교가 두 사람을 이성적으로 사랑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설령 이적요에게 키스를 해달라고 말했더라도, 서지우와 성관계를 맺었더라도 그것은 진정 끓어오르는 사랑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일종의 자기 위안이였을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한달 반만에 미친듯이 써내려간 이 소설 속 금단의 사랑에서 나는 뜬금없이 사랑은 없었다고 외치고 싶다. 서로 사랑이라 착각한 것이라 믿고 싶다. 그것은 단순히 나이차이로 비롯된 거부감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은교를 사랑했다는 두 남성의 말과 행동 속에서 진정 사랑의 느낌을 받지 못했고 은교 역시도 정말 그들을 사랑했는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책 속엔 젊음을 사랑한 이적요와 누군가의 관심이 필요했던 은교와 그리고 스승을 애증하는 서지우만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