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권력 투쟁사를 연구하고 있는 저자 이시언은 각종 사료를 토대로 조작과 음모로 얼룩진 조선 정치의 단면을 파헤친다. 한 장의 괴서怪書로 권세가가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수많은 추종자들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래서 조선 권력 투쟁의 이면에 등장하는 괴서는 언제나 피바람을 몰고 왔다.

중종 13년(1518년) 8월 21일, 갑자기 화살 하나가 날라와 사간원 대문에 꽂혔다. 화살 끝에는 익명의 투서投書가 묶여 있었다. 투서에는 조광조, 김안국 등 30여 명의 이름이 연명으로 적혀 있었는데, 그들이 국정을 어지럽힌다는 비난 일색이었다. 모두 사림士林 출신의 관료였다.

당시 조광조는 사림을 등에 업고 개혁 작업에 착수하고 있었다. 개혁의 대상은 바로 공신세력이었다. 연산군의 폭정에 항거한 공신들 덕분에 왕이 되었지만 무려 108명의 정국靖國공신들의 눈치를 보느라 중종은 제대로 정치를 펼칠 수 없었다. 또한, 별로 공이 없는 어중이떠중이들까지 공신의 권력을 누리자 중종은 사림의 우두머리 조광조를 앞세워 개혁정치를 모색하고 있었다.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대는 법이다. 조광조와 사림의 뜻대로 전체 공신의 4분의 3에 상당하는 76명이 명부에서 삭제당하자, 수세에 몰리던 공신세력이 반격을 시도한 것이다. 조광조 등 사림세력이 펼치는 '도덕정치'에 염증을 느낄 때라 그 한 통의 괴서는 엄청난 파급을 몰고왔다. 이듬해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나 개혁을 추진하던 조광조 등 사림파 70여 명은 사약을 마시고 죽게 되었다.  

엄격한 규율과 밤늦은 공부에 지친 중종은 조광조가 부담스러웠다. 조광조는 중종이 진정으로 사림세력과 뜻을 같이해 성리학적 이상국가를 건설하려는 줄 알았지만, 사실 중종은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대궐 후원의 나뭇잎에 꿀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씨를 써서 벌레들이 이를 파먹자 '조씨가 왕위 된다'는 소문이 퍼지게 된다. 여기에 사림파 관료들이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괴문서가 화살 끝에 매달려 날아들었던 것이다.

중종은 노련한 정치가였다. 그의 본심은 도학군주가 되는 게 아니라 왕권 강화였다. 사림을 이용해 공신들을 압박하고 이 전략이 먹혀들자 이젠 사림세력의 확대를 가로막고 나선 것이다. 즉 사림으로 쏠린 권력을 다시 빼앗아 정국의 주도권을 자신이 잡겠다는 의도였다.

백두산석마도진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수음마무頭滿江水飮馬無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丈夫

 -남이 <북정가北征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병조판서에 오른 남이 장군에게 역모의 누명을 씌운 '북정가' 세 번째 구절의 조작(미平국을 미得국으로), 문정왕후가 정적을 숙청하고 강력한 권력을 구축하는데 이용된 편지와 벽서, 선조때 서인세력이 동인세력을 제거한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원인이 된 비밀 장계 등은 한편의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스릴 넘치는 이야기들이다.

 

 

사극史劇의 갈등 국면에 늘 등장하는 것이 괴서이다. 궁궐 마당에서 발견된 서찰이나 화살 끝에 묶인 서찰, 관아에 붙은 벽서 등으로 피바람이 시작된다. <조선 괴서, 조작의 역사>는 역사 속에 극적인 효과를 유발하는 괴서를 추적했다. 책은 조선의 괴서들을 따라가며 조선시대의 정치적 권력투쟁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왕은 신하들을 속였고, 신하들도 왕을 속였다. 이처럼 속고 속이는 가운데 진행된 권력싸움을 하느라 백성의 안녕과 민생은 뒷전이었다. 현종과 숙종 시절 온 나라에 기근과 역병이 덮쳐 수많은 백성이 죽거나 도적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왕과 신하들은 권력다툼 때문에 백성들을 살피지 않고 외면하는 장면들은 뒷 맛이 씁쓸하기만 하다.

 

 

'당쟁黨爭의 역사'라는 혹독한 비평을 받는 조선시대는 권력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진실을 조작하고 상대에게 누명을 씌우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이와같은 조작에는 괴서怪書가 종종 애용됐다. 지금도 우리 정치판에 자주 등장하는 모략과 중상은 선조들로 배운 나쁜 학습 탓일까? 

 

반성이 없는 역사는 미래가 없다

 

역사, 한국사, 조선괴서, 이시언, 해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