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식민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19세기 말, 조선이 굳게 닫힌 문을 열자 이 은둔의 나라를 탐험하고 싶어하는 서구인들이 한반도로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국인들을 직접 관찰하고 체험했다. 그런데, 그들은 출발 시점에 이미 그릇된 정보에 의한 선입견을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그들은 조선을 여행하고 귀국해서는 자신들의 체험담을 바탕으로 책을 저술했다. 아놀드 새비지 랜도어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아손 그렙스트의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에른스트 오페르트의 <금단의 나라 조선>, 윌리엄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 지그프리트 겐테의 <신선한 나라 조선 1901>, 조지 커즌의 <100년 전의 여행, 100년 후의 교훈>, 호머 헐버트의 <대한제국멸망사> 등이 이 책 속에 소개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런 책들에서 한국은 "미개하고, 더럽고, 풍속이 부패했고, 거짓말과 도둑질을 하며, 완고하고 까다롭고 신경질적인 한국인, 잔인한 고문이 자행되는 나라" 등으로 묘사되고 있다. 저자는 이런 부정적인 표현이 구한말의 한국과 한국인 모습에 어두운 면을 부각시켰고, 그것이 마치 진실인 양 굳어져 버렸다고 해석한다. 나아가 일제의 식민 통치도 이런 음모의 바통을 이어받은 결과라고 비판한다.

 

계간 '실천문학'을 통해 소설가로 등단해 장편소설 <매혹>을 출간하기도 한 저자 이숲(본명 박수영)은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스웨덴 웁살라대학과 포르투갈 코임브라대학에서 유럽 현대사 석사과정을 공부했다. 유럽 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 저자는 한국 역사를 새롭게 보는 독자적인 눈을 길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럽에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지원하는 인종론과 사회진화론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이를테면, '힘센 종족이 약한 종족을 지배하기 마련'이라는 이론이 팽배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서구가 한국에 대해 쌓아올린 부정적인 인식 즉, 게으르고 무질서하며 자기 통제가 없다는 인식은 미개한 종족을 구제해야 한다는 논리로 쉽게 빠져들었다. 제국주의자들은 이 부정적 표상을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음모의 도구로 이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9~10쪽)

 

 

지난 8월 29일은 한국이 일제에 강제로 합병당한 국치일國恥日이다. 최근 일본 아베 정권이 집단자위권을 빙자해 재무장을 추진하거나, 군국주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게하는 극우파 정치인들의 막말 등이 사실 우리의 속내를 불편하게 만든다. 이런 때에 이 책은 우리에게 한국의 정체성을 다시금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패권의 시대에 한국은 '역사의 약자'였다. 저자는 서구인들이 남긴 여러 저서들을 읽으면서 구한말, 조선은 제국주의 시대의 역사에서 한때 지워진 나약한 종족이었다. 그러나, 이런 패권적 논리에는 부당한 내용이 너무 많았다. 이에 저자의 관심사는 후손인 우리도 덩달아 한국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과 특히 우리가 부정적인 면만 알고 있는 것에는 어떤 음모가 있지 않는가 하는 것들이었다.

 

 

일본과 친일파들이 한국인들 스스로 열등한 존재로 비하하길 바라면서 퍼뜨린 이 말을 우리는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역사의 약자로 살았던 우리에게 가장 슬픈 상처는 세월이 흘러도 쉽게 아물지 않는다. 이 후유증의 원인을 추적해 우리 한국인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다.

 

반면에 '수박 겉핥기'식 관찰에 의존하지 않고 한국과 깊은 교류를 나눈 서구인들은 전혀 다른 한국인을 그려냈다. 독일 기자였던 지그프리트 겐테는 한국을 체험하면서 자신이 이미 읽어 알고있던 <한국교회사서론>의 신뢰성을 의심했다. 그는 잔인한 고문의 실상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감옥에 가서 고문 기계를 살폈지만, 한국의 고문 도구들에서 중국 법정이나 중세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끔찍하고 잔인한 발명품들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영국 기자 프레드릭 매켄지는 직접 체험하지 않은 사실은 좀처럼 글을 쓰지 않았다. 매켄지는 한국에 대해 두 권의 책을 썼는데, 오로지 일본의 실체를 폭로하기 위해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그는 <대한제국의 비극>(1908년)의 서문에서 "내가 반일적이라고 한다면 기꺼이 반일의 피고자가 되고자 한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일본을 대견스럽게만 여기던 세상을 향해 오로지 매켄지만 일본의 군국주의를 조심하라고 경종을 울렸던 기자였다.

 

 

 

1919년 3월 28일 영국 여류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년)가 한국에 왔다. 3월 1일 시작된 만세 운동이 여전히 전국 여기저기서 계속되고 있었다. 한국에 오기 전에 일본에 머물렀던 그녀는 한국 사람들에 대해 나쁜 편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무장을 하지 않은 채 죽음을 각오하고 만세 운동에 참여하던 사람들을 만나면서 한국 사람들의 참모습에 눈뜨게 된다.

키스는 '과부'라는 제목으로 한국 여인을 그렸다. 마루 끝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초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이 여인은 일본 경찰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서 풀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몸에는 아직도 고문당한 흔적이 남아 있다. 얼마 전 남편을 잃었고, 아들은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애국자였다. 화가는 이 여인의 타고난 기품과 아름다움에 깊이 매료된다. 모진 고초를 겪었음에도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다. 원한에 찬 모습도 아니었다.

 

 

 

 

 
짧은 체류 기간이었지만 키스가 눈으로 확인한 것은 독일의 게슈타포보다도 더 잔인한 일본 경찰의 악행이었으며, 한국인에 대한 자신의 관념이 치밀하게 계획된 일본의 악선전이었다는 사실이다.

키스는 마치 크리스마스카드에서나 볼 법한 어여쁜 색과 선으로 고운 한복을 입은 사람을 그렸다. 밝고 화사한 색채와 세련된 감성으로 그려진 한국인들의 모습은 구한말 자료 사진에 등장하는 우울하고 미개한 한국인들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이 무렵 여러 서양 사람들은 거리에서 만난 '미개한 한국인들' 사진을 찍는 데 여념이 없었다.

 

저자 이숲이 지적하는 것처럼 제국주의자들은'쾌활하고 명석한 한국'보다는'무기력하고 무질서한 한국'이 더 필요했다. 그래야 이 열등한 종족을 구제한다는 논리로 식민주의적 침탈과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을 열등한 종족으로 선전하는 데 앞장선 것은 당연히 침략의 야욕에 불타던 일본이었다. 

자연스럽고 당당하며, 자유분방하고 쾌활한 한국 남자들.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며, 청순함과 수수함과 세련됨을 가진 한국 여자들. 100여 년 전 서구인의 시선에 비친 이들 한국인의 모습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제국주의의 '음모'와 '조작'을 고발하고자 했던 것이다.

 

'북어는 때려야 제 맛이고, 조선 사람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사람들이 있다. 자화자찬도 곤란하지만 이렇게 자기 모멸과 비하를 통해서는 진정한 정체성이 온전하게 정립될 수 없다. 정체성은 어딘가에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 제3자가 바라본 우리의 모습이 중요하게 부각되는 이유다.

 

 

역사와문화, 내한민국, 이숲, 예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