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8년, 고려의 역사에 있어서는 실로 엄청난 충격의 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5월 22일 이성계 장군은 압록강 안에 위치한 섬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렸다. 바로 위화도회군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함경도와 강원도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 철령 이북의 땅이 원나라 영토였으므로 요동에 귀속시키라는 요구가 있었다. 이때 최영 장군은 요동 정벌을 계획했다. 고려의 우왕은 모든 정사를 최영에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계획에 따랐다. 같은 해 3월 1일 우왕은 최영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두 사람 간에는 군신의 관계를 넘어 장인과 사위의 관계였던 것이다.

4월 1일 우왕은 이성계에게 요동 정벌을 알렸다. 이성계는 이를 반대했다. 이에 우왕은 동요했지만 최영의 뜻은 확고했다. 이성계는 요동 정벌이 명의 보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어 백성들이 참화를 겪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5월 7일 요동 정벌군은 위화도에 도착했다. 이후 이성계는 수심이 깊어 더 이상 진격이 어렵다는 이유로 최영에게 회군을 건의했다. 하지만 최영은 이를 묵살했다. 결국 회군을 결심한 이성계는 장군들을 설득했다.

서열상으론 좌군도통사 조민수 장군이 이성계보다 위였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장수가 이성계를 따랐으므로 조민수 역시 이성계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성계의 회군 소식이 전해지자 우왕과 최영은 황급히 서경에서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성계는 천천히 남하했다. 6월 2일 이성계의 군대가 개경성을 둘러쌌고 6월 27일에 도성 안으로 들어가 최영을 체포했다.

밥은 하늘이다

"백성이란 나라의 근본이다.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

- 세종의 교지

1391년 발표된 과전법은 소출의 10분의 1을 거두는 전제이기에 액면 그대로는 이상적인 제도였다. 하지만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어 권력 남용과 부정부패가 싹트고 있었다. 세금을 거두는 이들이 소출의 10분의 1에 만족하지 않고 여러 구실들을 내세워 농민들을 괴롭혔다. 예컨대 '말에게 먹일 풀을 달라', '기와집 아궁이에 넣을 땔감을 바쳐라', '고기 구워 먹을 숯을 구우라' 등처럼 말이다.

역시 세종이었다. 세종의 정책 결정에서 밀어붙이기란 찾아볼 수 없었다. 거꾸로였다. 묻고 또 물었다. 과거 시험에서만 물어본 것이 아니라 지방의 관리들에게도 묻고 농민들에게까지 물었다.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중앙의 관료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17만여 명에게 의견을 물었단다. 평균 10명의 식구가 1호를 구성한다. 17만 명의 의견을 청취했다는 것은 사실 170만 명의 여론을 살폈다는 것이다. 세종 시대의 전체 인구가 500~600만 명이었으니 가히 전 국민적 의사소통이었다.

훈민정음이 없는 세상에서 처녀 총각이 어떻게 연애편지를 주고받았을까? '나는 너를 사랑해'를 어떻게 옮길까? 이두로 써볼까? '나는我隱 너를余乙 사랑해思爲'라고 쓴다면 의미의 전달은 가능하겠지만 사랑의 정조를 전달하는 데는 실패한다. 생각해보자. 훈민정음이 없던 시절 <천자문>을 처음 배우는 학동들이 '천지현황天地玄黃'의 뜻과 음을 어떻게 배울까?

서당 훈장의 강의가 아니라면 天이 '하늘 천'이고, 地가 '땅 지'인 것을 무슨 수로 배우느냐는 말이다. 그러니까 애당초 한자엔 발음 기호가 없어서 한자의 음은 가르치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발음의 대혼란, 그것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 한 또 하나의 이유였다.

승경도陞卿圖 게임

퇴계가 퇴계인 까닭은 그의 심원한 학문에서 비롯되었으나 그의 학문적 성취보다 더 위대한 것은 나아감과 물러섬, 출사와 처사에서 보여준 그의 무욕無欲과 자유로움이 아닐까 싶다. 승경도는 18계단의 관직을 놓고 주사위를 던져 먼저 영의정에 오르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이 게임을 하다 보면 그 많은 관직의 이름들이 저절로 외워진다. 이 게임이 갖는 학습 효과이다.

"현실은 승경도 게임이 아니다.

주사위를 던지다 보면 누구나 영의정에 오르게 되지만 이것은 착각이다"

선비들은 주사위의 숫자만큼 위로 오르길 선택하는 반면 퇴계 이황은 주사위를 던져놓고 자기 마음대로 움직인다. 남들이 싫어하는 외직을 자청하여 단성 군수, 풍기 군수를 선택한다. 형조참의를 거부하고 은일로 내려가는 것이다. 조선 500년 왕조사에서 참으로 기이한 선비가 나온 것이다. 새장의 안과 밖을 제집 드나들듯 자유롭게 드나든 퇴계 이황. 그는 난진이퇴難進易退, 즉 나아감은 어렵게 하고 물러섬은 쉽게 함으로써 조선 선비의 품격을 한껏 높인 선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