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호스피스 의사의 삶에 대한 깨달음

 

우리들의 일생 중 가장 힘든 시기는 언제일까? 죽마고우의 빚보증을 잘못서서 가진 재산 모두 날렸을 때, 모든 걸 바쳐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잘난 남편 만들어놨더니 잘 생기고 재산 많은 젊은 과부와 바람을 피워대서 이혼할까 말까 고민에 빠졌을 때, 대학을 졸업하고 몇 수를 거듭해도 여전히 백수인 취업 준비생이 자취방에서 빈 쌀 독을 움켜쥐고 신세를 한탄할 때 등등, 이런 때보다 더 힘든 시기는 따로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인생의 반전에 실낱 같은 빛조차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시기, 즉 중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의 '짧은 삶'이 아마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가 아닐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중요한 시기를 대부분의 당사자들은 모른 채 생을 마감한다는 사실이다. 말기 암으로 인한 시한부 판정을 받고도 가족이나 친지들은 이를 당사자에게 감추려하지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비록 짧은 생일지라도 마음 편하게 마감하도록 하겠다는 배려심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김여환 호스피스 의사는 2007년부터 2014년까지 대구의료원 평온관에서 센터장으로 근무하면서 수많은 호스피스 환자들과 교류했다. 책 내용은 어찌 보면 암 덩어리를 주렁주렁 달고 살다가 떠나가는, 불행하지만 평범한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녀가 만난 환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들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얘기하고 싶어 했고, 좋든 나쁘든 그녀는 귀 기울였다. 비록 죽음을 준비하는 환자일지라고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등바등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세상살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에게 작은 희망을 던져준다.

 

"영원한 것은 없으니까, 오늘을 아름답게, 행복하게 사세요"

 

그녀는 아줌마 의사로 7년을 그들과 함께 지낸 경험자로서, 이와같은 인생의 마지막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4부로 구성된 이 책을 썼다. 사실 우리 모두는 죽는다. 남들보다 일찍 또는 늦을 뿐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들 대부분은 죽음이란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아니, 상관없는 이야기이길 바란다.

 

 

우리들의 마지막 모습은?

 

신복연 할머니가 사망할 것 같았다. 할머니는 86살 말기 위암 환자다. 점심식사도 미룬 채 기다리는 저자에게 간호사가 찾아와 침울한 목소리로 할머니의 사망 선언을 요청했다. 현대 의학은 심장이 완전 멈춘 상태를 '죽음'이라고 말한다. 할머니의 심전도 그래프가 일직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언제나 짤막한 사망 선언을 마치고 나면 대개 가족들의 대성통곡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날은 조용했다. 암종을 지킨 할머니의 둘째 딸이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평소 할머니가 딸에게 죽고 나면 울지 말라고 당부했다는 거다. 자식들의 우는 소리가 들리면 이승을 떠나는 게 너무 힘들어진다고 말이다. 꽃분홍색 한복을 갈아입고, 흰 양말까지 정갈하게 신은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무척 따뜻해 보였다. 환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저자는 마지막 순간이 됐을 때 가슴에 무엇을 담고 떠날지 상상했다.

 

남과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자기 자신과 먼저 소통해야 한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과 소통하면 인생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자신과 만나려면 가장 낮은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므로 임종실은 부끄럽지만 가장 볼품없고 꾸밈없는 자신의 민낯이 있는 곳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만남은 바로 '나의 마지막'이라고" 

 

 

나란히 놓인 침대에서 꾸는 꿈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건이, 건이 아빠는 연골암 환자다. 자기 밑으로 7살, 3살 남동생이 둘이나 있어서 건이는 제 나이보다 아주 의젓했다. 건이 아빠는 눈꺼풀 위로 탁구공만 하게 튀어나온 암 때문에 오른쪽 눈을 뜰 수가 없어서 성한 왼쪽 눈마저 항상 토끼처럼 빨갰다. 또 한쪽 눈만으로 사물을 바라보니까 당연히 어지럽고 머리도 아팠다. 더구나 여러 곳에 암이 이미 뼈로 전이되어 수족을 움직일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아침 회진 때 건이 아빠가 호스피스 의사인 저자한테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 소원이 있어요" 환자의 아내는 옆에서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아내를 안고 자고 싶어요" 그녀는 아차 싶었다. 이들이 젊은 부부라는 걸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건이 아빠 차트에 특별 처방을 내렸다.

 

 

방을 옮긴 날 그녀가 살며시 병실 문을 열어보니, 그들은 오랜만에 서로 손을 잡고 얼굴을 마주한 모습으로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그들은 무슨 꿈을 꾸고 있었을까? 우리는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별과는 달리 삶의 끝자락에서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다. 우리의 인생이 서서히 저물어갈 때 과연 우리는 어떤 아름다움을 뿜어낼 수 있을까?

 

 

삶과 죽음이 걷잡을 수 없이 뒤엉킬 때

 

세상은 가벼움과 무거움이 서로 경계를 불분명하게 가른 채 섞여 있다. 어떤 부분은 자신이 남보다 가볍고, 어떤 부분은 남보다 무겁다. 이렇게 어우러져서 세상은 좀 더 좋게 변한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오는 것'과 같은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경계선을 드러낸다.

 

 

그렇다. 죽음이란 이처럼 일평생을 별 탈 없이 살다가 90살이 되어 마음 독하게 먹고 준비해도 어려운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닥뜨린느 죽음은 아무리 노력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법이다. 저자가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돌본 의사로서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이 먼저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남은 사람들 걱정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남은 사람들은 이 마음을 알까? 존재란 그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죽어서도 사랑하는 이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다.

 

 

 

 

 

"나 때문에 끼니를거를까 봐,

나를 잃은 슬픔으로 행여 병이라도 생길까 봐,

경제적으로 힘들까 봐 등등.....

그들은 사소한 걱정을 몰래 했다"

 

 

마음의 창문을 많이 가진 사람이 되세요

 

집과 무덤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는 바로 창문이 있고 없고의 차이이다. 외부로 통할 수 있는 창문이 있으면 집이고, 반대로 없으면 무덤이다. 신라시대 왕의 무덤인 천마총은 그 속에 별 게 다 있지만 창문이 없기 때문에 무덤이다. 미국 대통령 집무실은 의외로 소박하고 좌우로 참모진의 집무실이 딱 붙어 있다. 수시로 참모진과 대화하려고 문을 항상 열어 둔다고 한다.

 

'삶과 죽음'도 다른 사람과 얼마만큼 소통할 수 있느냐에 차이가 있다. 비록 이승을 떠날지라도 누군가의 가슴에 남아 있어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사랑받고 있다면 그는 결코 죽은 게 아니다. 같은 집, 같은 직장에 있으면서도 서로 의견이 달라 소통할 수 없는 사이라면 살아있되, 그 관계는 죽은 것과 같다. 부모, 아내, 그리고 자식의 가슴에 담긴 채 영원히 사는 이가 있는 반면, 가까이 살면서도 마음의 문을 닫고 냉랭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이 소식을 어떻게 알려드려야 할까요?

 

63살의 딸이 85살의 노모를 입원시키려고 상담차 의료원을 방문했다. 딸의 말에 의하면 할머니는 췌장암 때문에 두 번이나 항암 치료를 받고 기력이 너무 떨어져서 이젠 더 이상 치료를 받을 수 없을 것 같아 호스피스에 입원하고 싶다는 의견이었다.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전하자 환자는 항암 치료를 원했고, 그래서 그렇게 했지만 지금 와서는 후회된다는 말을 했다. 현재는 더 이상 가망이 없지만 환자가 원하므로 항암제 대신 비타민 주사를 병원에서 놔주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우리들은 당사자에게 '나쁜 소식'을 알려야 함에도 그러질 못한다. 혹시 삶의 끈을 놓아버려 금방 상태가 최악으로 빠질까 우려해서다. 삶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안다면 누구나 당연히 절망에 빠질 것이다. 그 공포와 허망함에 분노하며 잠을 설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당사자 대부분이 현명한 결론에 도달한다.

 

"큰따님이 어머님과 가장 친하시니까 어머님께 이제 치료가 안 되는 병에 걸렸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리세요. 대신 어머님이 알고 싶은 만큼 천천히 알려드리는 것이 중요해요.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말씀을 꼭 해드리세요. 그런 다음에 어머님께서 호스피스를 원하시면 언제든지 모시고 오세요"

 

 

배웅(2015년), 박지운 그림

 

 

오늘의 행복을 내일에 양보하지 마세요

 

'삶과 죽음'은 물과 기름 같은 거다. 그렇지만 도저히 섞일 수 없는 것들을 조화롭게 포용한다면, 내일의 죽음이 아닌 오늘의 삶이 달라진다. 인생은 여행이다. 호스피스 의사로서 저자가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그 여행이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자기 뚝 멈춰버린다는 것이다. 마지막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살면 한 번 뿐인 자신의 인생이 스스로 원하지도 않는 자리에서 영원히 멈추어버릴 수 있다.

 

내일 도사리고 있는 재앙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살아감 속에 죽어감의 흔적을 묻히는 것이다. 내일이라는 것이 그 누구에게도 완벽하게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 오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심코 거칠게 한 말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오지도 않을 비겁한 내일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너무 많이는 양보하지 말자.

 

 

죽음의 여의사로 살아야 하는 이유

 

혜영 씨는 저자보다 두 살 어린 40대 후반이었다. 담도암 때문에 온몸이 노랬고, 달고 있는 하얀 수액제가 보험이 되냐고 물어오는 알뜰한 살림꾼이었다. 비록 젊은 나이에 찾아온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다리가 불편한 둘째 딸이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쳤다고 기뻐하는 천상 엄마다.

 

그녀의 남편은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였다. 그래서 주제 넘게 저자는 그 남편에게 "여자는 100송이 장미꽃을 1번 선물 받는 것보다 1송이씩 100번의 선물 받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해 버렸다. 어느 날 혜영 씨가 가느다란 금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우리 그이가 사줬어요"라고 활짝 웃었다.

 

지평선(2013년), 박지운 그림 

 

 

 

아름다운 마무리를 바라며

 

2003년 2월, 전업 주부였던 저자는 의사 생활을 시작했다. 39살이었다. 비록 늦은 나이지만 다시 시작할 용기를 준 이는 소설가 박완서였다. 마흔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문단에 데뷔했기에 친근감이 느껴져서 그녀의 책으로 서재 한구석을 계속 채워나갔다. 전업 주부 시절, 쓸쓸함이 몰려올 때면 아이들을 재워놓고 밤새 그녀의 소설을 뒤적거렸다.

 

이후 막내가 초등학교 1학년을 적응할 무렵, 저자는 용기를 내어 힘겨운 인턴 수련을 시작했다. 10살이나 어린 동료 의사들보다 많이 뒤쳐졌다. 인턴 성적도 바닥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이가 많아서 병원에서도 허드렛일을 시키는 게 부담스럽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들고 혼란스러웠다. 이때 그녀에게 계속할 수 있는 용기를 준 사람은 영국 작가 콜린 윌슨이었다. 1954년 크리스마스, 콜린은 돈이 없어서 고향에 가지도 못하고 런던의 작은 아파트에서 홀로 저녁을 먹고 있었다. 가족과 떨어져 쓸쓸한 저녁을 먹는 자신의 처지가 그동안 자신이 읽은 수많은 문학 작품속의 인물들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 후, 콜린은 <아웃사이더>라는 책을 출간했다. 당시 많은 비평가들은 마치 전기 쇼크를 받은 것처럼 당황해했다.

 

'의사'라는 직업은 혼돈이 보이는 아웃사이더의 눈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도 아직은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다. 심장이 멈추기 직전까지는 덜 아프고 덜 고통스럽게 마지막 순간을 보내야 할 권리가 있었다. 저자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가 통증과 두려움이 몰려오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일 것이라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았다. 그래서 용기 내어 아웃사이더가 되어보기를 원했다.

 

 

 

호스피스 환자들은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기를 바란다.   

 

에세이, 내일은못볼지도몰라요, 김여환, 쌤앤파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