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작은 마을에 젊은 여성이 홀로 찾아왔다. 이곳은 오오카게무라역 인근이다. 그녀의 이름은 유정流情, 흔한 듯한 이 이름을 한자어로 풀어보면 정말 특이하다. 사연이 있음직한 이름이다. 헤어드레서인 그녀의 엄마가 작명한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작은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카레' 펄럭이는 군청색 노렌(출입문 앞에 내건 헝겊 치장)을 걷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일본인 같지도, 백인 같지도, 흑인 같지도 않은 한 사내가 가게의 주인이다. 피부색은 금빛이 도는 갈색이고, 머리카락도 옅은 금빛이다. 이 사내의 이름이 카레다. 일본 말로 '그 남자'란 의미이다. 그는 외할머니 손에 성장했다.

 

"카레...., 먹을 수 있나요?"

"그럼요. 카레, 먹을 수 있어요"

 

열 살 이후론 이렇게 말을 받아주는 것이 그녀에겐 처음이다. 그녀는 카운터에 놓인 높은 의자에 앉아 그 사내가 요리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입이 좀 가벼운 사내다. 뜬금없이 자신의 엄마 얘기를 한다. 이 마을 출신인데 16살에 가출하여 동경 긴자에서 술집 마담에게 스카우트되었지만, 호스티스 생활에 곧 염증을 느끼고 약간 모은 돈으로 브라질로 훌쩍 떠났단다. 카레는 맛이 없다.

 

 

유정은 엄마가 경영하는 미용실에서 성장했다. 미용실의 단골인 미나 선생은 극단 '츠키'의 주인이다. 미나 선생의 제의로 그녀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극단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필요한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극단은 도쿄 신주쿠와 서울 대학로를 오가며 공연했다. 극단은 보통 지하에 연습실을 두고 있지만, 츠키는 일본과 서울 모두 지상연습실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스스로의 영혼을 하루에 0.35밀리미터씩 밖으로 밀어내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이야"

 

그녀의 엄마는 머리카락을 숭배했다. 동네 미장원보다 약간 세련된 카페 분위기의 미용실이라 동네 멋쟁이들이 드나들었다. 극단 츠키의 배우들도 찾아와 난해한 헤어스타일을 부탁하곤 했다. 딸의 공부에는 간섭 없는 엄마지만, 미용실의 일에는 절대로 개입못하게 했다. 자신의 일을 대물림하고 싶은 엄마는 그리 많지 않은 법이다.

 

또 카레가 이야기를 이어간다. 해변가 마을은 10년 전 만해도 고기가 잘 잡혀 마을엔 거주민이 많았다. 마을에 유치원이나 보육원이 없어서 마을 아이들 모두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6년전 원양어선의 기름탱크가 터져 물고기가 폐사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지로 이사했다고 한다. 카레집도 본디 횟집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지어낸 얘기였다.

 

피아노 선생의 이름은 리에다. 그녀의 남편은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뒤 가출해버렸다. 그녀는 카레집의 단골이다. 카레 씨가 짝사랑하는 여인이다. 그녀는 지금도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 남편은 당시 읍내에서 사진관을 운영했는데 그녀에게 모자를 자주 선물할 정도로 금슬도 좋았다.

 

이제 극단의 배우들을 살펴보자. 

 

고소공포증이 있는 강휘는 10살 위의 하루히와 연인 사이다. 하루히는 39살로 극단에서 최연장자다. '플라밍고5'라는 작품에서 강휘는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역할이었다. 힘이 들어 뛰어내릴 때마다 그는 지켜보던 하루히의 품에 안겨 온몸을 떨곤 했다. 서울 소극장에서 일주일, 신주쿠 극장에서 열흘 동안 가진 공연을 위해 그는 무려 255번이나 절벽에서 추락해야만 했다. 켄도, 용재도 이 연습을 했지만 그들은 한번도 캐스팅되지 않았다. 미나 선생은 배우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졌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그녀는 배우들에게 늘 주문을 건다.

 

"어때, 영혼을 팔기에 좋은 날이지?"

 

용재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프랑스에서 출생하고 자란 흑인이었다. 그들의 먼 조상은 아프리카에서 프랑스로 와 마법과 주술이 유일하게 허용되는 서커스 사업을 했다. 이들은 순혈주의를 추종했기에 세대를 거듭할수록 가족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서커스단 운영이 힘들자 용재의 아버지 앙리는 그들만의 주문에 따라 꼬레, 코리아로 왔던 것이다.

 

파리에서 온 서커스단의 후예 앙리는 호텔식 카바레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쇼를 했다. 이 공연장에는 북을 치는 아버지와 함께 창을 하는 선우은점 이라는 아가씨가 있었다. 앙리는 이 아가씨의 창법에 매료되어 사랑에 빠졌다. 가문의 첫 번째 혼혈이 태어났다. 바로 용재다. 그는 16살에 베네통 잡지 광고모델로 데뷔한 패션쇼의 검은 황제였다.

 

극단 '츠키'의 여주인 미나 선생은 특별한 손님을 관리하고 있다. 그녀는 9명의 극단 배우중 뛰어난 사람을 소위 '뮤토'로 활용했다. 고객의 의뢰에 의한 연기를 수행하는 역할이다. 뮤토는 정해진 플레이만 해야한다. 이것은 묵계였다. 뮤토는 돈벌이에 이용되는 사람이므로 미나 선생의 대우가 달랐다.

 

"류, 이제부터 여기서 지내면 돼"

 

주인공 유정은  고교를 졸업하자 극단 일에 더욱 재미를 느꼈다. 아예 집에서 나와 극단 배우 마유코와 함께 방을 사용했다. 어느듯 뮤토로서의 자질이 인정되면서 도쿄타워 옆 P호텔, 꼭대기층 스위트룸을 배정받았다. 욕조에서 도쿄타워가 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은 방이다. 회원가입도 마쳤다. '또 다른 나'를 받은 셈이었다.

 

마유코는 초기에 하루히와 방을 같이 사용하다 그녀가 강휘와 결혼하면서 떠나자 유정에게 같이 살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마유코의 방은 늘 인기가 좋았다. 유정의 집들이에 미루는 요시히로가 부탁한 수제 오르골을 가져왔다. 용재는 보라색 우산을 선물로 주었다.

 

첫번 째 뮤토의 상대는 홋카이도 야쿠자 조직의 2인자였다. 유정의 플레이는 오직 한 가지의 대사 뿐이었다. "나는 이제 가야 해요. 정말로" 시종일관 그 대사만 하면 그녀의 역할이 끝나는 것이었다. 훌륭한 임무 수행이었다. 미나 선생으로부터 영국제 블러드 로열 100송이를 꽃다발로 선물 받았다. 

 

한번은 강원도 봉평을 지나 어느 시골 통나무집에서 의뢰인을 만났다.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세계적인 한국인 세프였다. 대부분 과거에 대한 일을 의뢰하는데, 이 남자는 미래의 일을 요청했다. 그는 미각을 잃고 우울증에 빠질 정도로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평화로운 시골 주방장의 꿈을 현실로 경험하고자 귀국했던 것이다. 반백의 모습으로 요리하고 식사하며 기념촬영까지 했는데 이틑날 그가 뉴욕 자택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미나 선생은 대본에 없는 플레이를 하지 않았냐며 다그쳤다. 또한, 대본에 없는 플레이를 하면서 용재도 뮤토 대열에서 탈락했다는 비밀을 발설했다. 이후 그녀는 실수없는 플레이를 했다.

 

"풀 플레이를 원하는 고객이 있어"

 

어느 날, 미나 선생은 유정이 헤어 플레이를 하고 요시히로가 롤 플레이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실내가 족히 90평이 되는 맨션에 도착했다. 거실에 늘어선 청동백조 동상이 추위에 지쳐 푸르스름했다. 의뢰한 여자는 27년 전 유서 깊은 귀족 집안의 첩으로 들어갔다. 집안의 유일한 며느리가 아이를 갖지 못하자 씨받이로 들어간 것이다. 당시 19살이었다.

 

운좋게 사내아이를 낳았고, 그 대가로 시내에 넓은 맨션 한 채와 적잖은 재물도 받았다. 당장 젖이 문제인데, 아이가 친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자 할수없이 그 집에 유모 겸 식모로 지내게 되었다. 어느 여름 날, 주인집 가족이 별장으로 가족여행을 떠나자 그녀는 자신이 받은 멘션으로 아이를 납치했다.

 

그녀는 아이를 목욕시키려고 욕조에 물을 받았다.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아이의 아빠 전화였다. 그녀는 추궁을 당하자 당황했다. 통화를 마치고 욕조로 와보니 비눗방울과 물이 넘쳐 아이는 그 속에서 익사하고 말았다.

 

유정은 요시히로의 머리를 삭발하고 요시히로는 아이처럼 욕조에 웅크리고 앉았다. 한없이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그는 저체온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대본대로 플레이를 완성해야만 했다. 의뢰인은 무표정하게 요시히로 쪽을 바라보다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기를 되풀이했다.

 

"그 남자를 고통스럽게 하고 싶었어요"

 

하마트면 요시히로가 죽을 뻔했다. 그는 실핏줄이 군데군데 터져 병원에 일주일간 입원해 있었다. 그러나, 미나 선생은 개의치 않은 표정을 짓고 다음 일을 말했다. 유정은 차디찬 수돗물이 자신의 심장으로 흘러드는 소리를 들었다. 미나 선생에게 그 동안 속아왔다는 생각이 한없이 밀려왔다.

 

"이제, 플레이는, 하지, 않아요"

 

스위트룸을 나서기 전, 유정은 처음 호텔로 따라 올 때 입었던 옷을 옷장 깊숙한 곳에서 찾아 입었다. 목둘레와 소매에 희미하게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카드를 봉투에 넣어 프런트에 반납했다. 열차를 탔다. 도쿄를 벗어나자 창밖 풍경은 점점 단조로워졌다. 어딘가에서 내려야 한다. 오오카게무라. 표지판이 눈에 들러온다. 헤이세이 23년 7월 26일, 오오카게무라역, 하치승객 없음.

 

 

이 소설에는 2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두 번째 이야기 '천사의 가루'는 사랑의 기억보다 강렬한 사랑의 부재에 관한, 상실에 관한 지독히 아름다운 다큐멘터리다.  '힐링노블' 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영혼을 샤워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여행을 맛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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