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기적 유전자>를 드디어 읽었다. 

이런류(?)의 책은 한번에 읽어내려가야지, 도중에 며칠 쉬고 나면 다시 손에 쥐기가 어렵다. 그래서 부지런히 이틀만에 읽었다. 

내가 구입한 책은 2015년 12월 25일 발행된 것인데, 이력이 화려하다.

1993년 초판 1쇄, 2002년 초판 16쇄.

2002년 개정판 1쇄, 2006년 개정판 19쇄.

2006년 30주년 기념판 1쇄, 2010년 30주년 기념판 26쇄.

2010년 전면개정판 1쇄, 2015년 전면개정판 40쇄.

누적 판매 부수가 궁금해서 검색을 해 봤는데 관련 기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팔렸을까? 4판에 걸쳐 총 100여쇄를 찍었으니 1쇄당 1,500부로 잡으면 약 15만권? 물론 적지 않은 양이지만 인지도나 완성도를 고려하면 100만권 이상은 팔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참고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123만권 이상 팔렸다고 한다.

본격적인 책 이야기에 앞서, 번역에 관한 부분을 짚어봐야 할 것 같다.

아마 과학분야 전체를 통틀어서 이 책의 역자인 홍영남 씨 보다 더 많은 비판을 받은 번역가는 없을 것이다. 지금도 네이버에서 "이기적 유전자 번역"을 검색하면 네티즌들의 분노 어린 글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원문과 홍영남씨 번역본을 비교하고, 여기에 '나라면 이렇게 번역했을 것이다'며 자신의 번역본을 게시해 놓은 네티즌도 있다. 오죽하면 1992년 이용철의 <이기적인 유전자> 번역본이 훨씬 훌륭하다며 이미 절판된 책이 중고시장에서 4만원 이상의 가격에 거래되고 있겠는가. 

을유문화사는 2010년 기존 번역자 외에 이상임이라는 역자를 추가하여 전면개정판을 발행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티즌의 번역에 대한 불만은 여전히 높아 보인다.

하도 번역에 대한 불만이 많아 나도 책을 읽기 전에 지레 겁을 먹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름대로 내가 내린 결론은 '썩 잘 된 번역은 아니지만, 책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이 책의 내용을 100%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번역 때문이라기 보다는 과학에 대한 나의 기초지식이 부족한 탓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이 책의 난이도에 대해서.

쉬운 책이 아니다. 진입장벽이 꽤 높다. 이 책과 더불어 대표적인 과학교양서로 꼽히는 <코스모스>보다 어렵다. 그러므로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도킨스가 무슨말을 하려는지 한번 들어나 보자'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본다면 십중팔구 중도하차다.

이 책은 숙제하듯이 읽어야 한다. 우리가 대학교 입학 후 처음으로 전공서적과 마주쳤을 때의 느낌을 떠올려 보자. <경제학 원론>, <경영학 원론>, <회계원리> 등.... 재미있게 읽었던가?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던가? 결코 그렇지 않다. 중간고사를 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마음 잡고 읽을 때에야 비로써 80% 이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평소 과학교양서를 접하지 않았던 독자라면 분명히 고생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기 전에 팟캐스트, 블로그, 위키피디아 등을 통해 진화론에 대한 기초 개념을 먼저 잡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 책의 내용은 의외로 단순하다.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은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설계된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 유전자는 이기적인 습성을 가지고 있는데, 때때로 드러나는 이타적인 행동 또한 사실 자신의 생존을 위한 이기적 행위의 결과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기주의, 이타주의의 정의는 주관이나 의식에 근거한 것이 아닌 행동에 근거한 것임을 주의해야 한다. 즉, 사람이 하는 모든 이기적인 행동은 사람이 이기적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유전자의 설계에 따른 행위라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대목이다.

도킨스는 자연의 '집단 선택설(Theory of group selection)'과 '개체 선택설(Theory of individual selection)을 비판한다. 이는 생물은 종의 이익 혹은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것인데, 일벌이 침을 쏘는 행위를 예로 들 수 있다. 일벌은 침을 쏘는 것과 동시에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내장이 보통 침과 함께 빠져 버리기 때문에 그 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되는데, 이러한 이타적인 행동은 벌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도킨스는 '유전자 선택설(Theory of gene selection)'을 선호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자연 선택의 기본 단위로 가장 적합한 것은 종도 개체군도 개체도 아닌, 유전 물질의 작은 단위 즉, 유전자라는 것이다. 도킨스는 겉으로 보이기에 이타적이지만 사실은 이기적인 행동의 예로 많은 것들을 들고 있는데 몇 가지만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새의 경계음

- 새 무리가 초원에서 먹이를 찾고 있음. 멀리서 매가 날아옴. 한 마리가 매를 발견. 혼자 숨어 있으면 살 수 있는데 소리를 내서 주위 새들에게 경고를 해줌. 소리를 내면 오히려 위협에 노출됨에도 불구하고.

- 어짜피 자기 혼자 숨어봤자 주위 새들이 제멋대로 돌아다니기 때문에 결국 매에게 발각됨. 차라리 일찍 경고음을 내서 매가 오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줄이는 것이 개인에게 더 유리함. 혹여 이 새가 혼자 날아가서 목숨을 무지한다고 하더라도 더이상 무리 내 일원이 아님. 다른 동료들도 함께 날아오르도록 부추기는 것이 더 도움됨 

#2 가젤의 높이뛰기

- 영양 무리 중 하나가 포식자를 발견함. 갑자기 높이 뛰기 시작함. 마치 포식자의 주의를 끄는 것처럼. 차라리 도망가면 살 가능성이 더 높은데도.

- 포식자에게 '나는 이렇게 높이 뛸 만큼 건강하니 다른 놈드을 쫓는 것이 좋을것'이라는 신호임. 자기는 살고 다른 개체를 위험에 빠뜨리려는 이기적 행위

#3 꿀벌의 벌침

- 일벌들이 하는 자폭 행위. 마치 자신의 집단을 위해 희생하는 것처럼 보임

- 사실 이 벌은 불임임. 일벌은 자식을 만들지 않음. 따라서 이런 노력은 자기 자식이 아닌 혈연자를 돌봄으로써 자신의 유전자를 보존하는 행위임

#4 동물의 산아 제한

- 모든 동물은 산아 제한을 함. 출생률을 조절하기만 하면 기아는 발생하지 않기 때문임. 이는 집단 전체의 이익을 위해 실행되는 이타적인 행위처럼 보임

- 사실 자기가 낳은 새끼들 중 살아남는 새끼 수를 최대화하기 위해 산아 제한을 하는 것임. 너무 많이 나아버리면 각각의 새끼에게 분배되는 먹이의 양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는 새끼가 거의 없기 때문임

이처럼 도킨스는 책 전반에 걸쳐 모든 동물은 유전자의 생존 기계에 불과하며, 동물들이 보이는 이기적인 행동양식이 사실 유전자의 생존을 위해 설계된 프로그램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떻게보면 매우 비인간적이고 냉혈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책의 마지막 부분 11장과 12장은 이와는 다소 다른 시각이다. 11장은 '밈(Meme)'이라는 자신이 창조한 개념에 대해 설명해 놓았는데 요약하자면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유전자(gene)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밈도 갖고 있다. 밈은 사상, 종교, 음악 등 문화의 영역이며, 밈은 진화한다라는 내용이다. 솔직히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위대하니까'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12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한 놈이 더 잘 먹고 잘 산다' 라는 주장을 죄수의 딜레마 등 게임 이론으로 설명해 놓았다. 책을 해피엔등으로 끝내고 싶었던 것 같다.

<이기적 유전자>는 찬사 만큼이나 많은 비판을 받았다. 내가 동의하는 비판은 '유전자 결정론'이다. 이와 같은 일원론적 태도는 세상의 모든 것을 너무나도 쉽게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인간 행동의 모든 원인이 유전자라니.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치자. 피의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다. "제가 죽이려고 한 건 정말 아니었어요. 모든 것은 제 몸 속의 유전자가 시킨 것이에요. 저는 생존 기계에 불과하니까요". 우리는 유전자를 처벌할 것인가? 

나의 짧은 인생 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이런 센세이셔널한 책은 겸손한 사람은 결코 쓸 수 없다. 설사 주류 학계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겸손한 사람들은 기존 학자들을 과감히 비판하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는다. 겸손한 사람을 폄훼하려는 것은 아니다. 성격이 그렇다는 것이니까... 도킨스는 자신감을 넘어서 약간의 자만심을 갖고 있는 듯 하다. 선배 학자들을 까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밈(Meme)이라는 개념까지 만들어내다니. 이 책을 30대 중반에 썼다고 하니 젊은이의 패기라고 봐야 할까? 실제로 학자들 가운데서는 도킨스를 학자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도 있다고 한다. 과학자가 아니라 그냥 논픽션 작가 정도라고 할까...진화생물학자의 대가인 에드워드 윌슨이 최근 도킨스의 주장과는 상반되는 논문을 썼다고 하던데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다.

개인적으로는 도킨스가 충분히 칭송받을만 하다고 생각한다. 1976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무려 40년전에 발간한 <이기적 유전자>가 그동안의 과학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수정 없이 아직까지 전 세계적으로 많이 읽히고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업적이다. 게다가 도킨스의 탁월한 비유와 글쓰기 능력 덕에 <만들어진 신>, <눈먼 시계공>, <지상 최대의 쇼> 등의 후속작품도 연달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무엇보다도 가장 칭찬받을만한 업적은 일반 대중들을 진화생물학이라는 과학분야로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학자들끼리 그들만의 언어로 진화생물학을 논하였다면 <이기적 유전자> 이후에는 일반 대중들도 이 분야에 뛰어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놀랄만한 업적 아닌가? 칼 세이건 이후 과학 분야에 이런 인물이 또 있었던가?

도킨스의 다른 저서인 <눈먼 시계공>과 <진화론 강의>를 구입하였다. 여기에 <만들어진 신>, <지상 최대의 쇼> 정도를 읽으면 도킨스를 이해하는데 충분할 것이라 기대한다. 쉽지 않은 책들이겠지만 한 번 읽어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