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사람의 힘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런 시간이 지속되다보면 분노하거나 원망할 힘마저 없어지게 된다. 희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단지 내 차례만을 무기력하게 기다리게 될 뿐이다. 그 누구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페스트균이 직접적인 원인이겠지만 왜 페스트균이 그 시점에서 유행하고 또 지나갔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홍수, 해일,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나 전쟁, 안전사고, 살인 등과 같은 인위적인 사건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추후에 설명은 가능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마찬가지며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 같아 보인다.

 

이 와중에도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무슨 고귀한 가치를 추구한다거나 거창한 구호를 내세우지도 않는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으니까, 손 놓고 기다리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할 뿐이다. 의사인 리유나 오통 판사, 외부에서 온 랑베르 기자 등 이곳 사람들은 어찌할 수 없는 큰 흐름 앞에서 결국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각자의 역할을 찾게 된다. 페스트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죄없는 어린아이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슬픔과 분노, 체념의 감정이 올라오지만 어쩔 수 없다.

 

페스트가 물러가면서 다시금 활기를 찾는 사람들,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전처럼 즐겁게 살아간다. 어떻게 불행이 다 지나갔다고 확신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이처럼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잘못한 것도 없이 죽어간 친구와 가족들의 주검이 아직 식기도 전에 우리는 행복에 겨워 웃고 살아있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 이들에게 문제가 있을까. 아니면 그래야만 하다고 생각하는 내 생각에 문제가 있을까.

 

내 인생에 원치 않는 일이 생기고 그것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을 때, 그것을 없애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도 변화가 없을 때... 우리는 그러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 이상과는 상관없이 현실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정하면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게 현실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내가 포기하고 있을 때쯤 하늘은 슬그머니 행복을 내 주머니 속에 넣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