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아는 것은 점점 많아지지만, 아이디어는 고갈되어 가는 느낌을 종종 받곤 한다. 경험으로 유사한 아이디어를 재생산하고, 여기저기 경계를 그어대어 새롭게 자라날 아이디어의 줄기를 절단한다. 그러다보니 사고가 안정적이긴 하지만, 참신하지 못하고, 범위가 좁아진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동서고금의 진리는 머릿속에서만 배회하고, 막상 현실 앞에서는 무력해지고 만다.

도야마 시게히코는 <망각의 힘>(북바이북, 2009년)에서 나와 같은 이러한 상태를 경계하고, 망각의 힘을 활용할 것을 주문한다. 지식도 비만처럼 ‘지적 메타볼릭 증후군’이 있음을 지적하고, 지식의 군살을 뺄 것을 요구한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논어』 선진편)라는 가르침은 지식에 적용해도 타당한 이야기다. 비만은 운동으로 해소할 수 있겠지만, 지적 메타볼릭 증후군에서 운동에 해당하는 것은 망각이다. 하지만 잊는다는 것은 산책 등과 비교해볼 때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96쪽)

<망각의 힘>은 일종의 철학 에세이다. 저자는 그의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단상들을 자신의 생각과 교차시켜 차분히 들려준다. 그래서 독자는 한 편의 가벼운 이야기를 읽듯 차분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들은 가볍게 들린다고 해서 바로 잊힐 성질의 것은 아니다. 연속된 단편들은 일관된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빠르게 변해가는 지식정보의 사회에서 진정으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다. 그 힘의 원천은 ‘망각’에서 흘러나온다. 나날이 업그레이드되어 가는 컴퓨터처럼 치밀해지고 비대해지는 지식이 아니라 배설과 정화를 거친 지식이다.

“망각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배설작용으로 볼 수 있다. 다양한 지식이 머릿속에 쌓이지만 전부 필요한 지식이라고 볼 순 없다. 중요한 것만 취하고 나머지는 쓰레기로 내보내야 한다. 망각은 이를 분별해 정리하는 작업이다. 쓰레기를 내보내는 일을 게을리 하면 머릿속은 쓰레기로 가득 차 혼란에 빠진다.” (177쪽)

‘망각의 힘’이라는 제목에서 엿볼 수 있는 ‘망각하는’ 행위는, 죽은 자가 레테의 강물을 마시고 이승에서의 지난 과거를 깡그리 잊어버리듯, ‘지우기 위한’ 망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망각을 통해 새롭고, 제대로 된 것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사고의 장치이다. ‘살리기 위한’ 망각인 것이다. 새로운 것은 비워 있어야 채워질 수 있다.

이 망각의 힘은 삶을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다양한 태도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이는 일종의 거리두기이며, 새로운 사고를 위한 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저자는 “멀리서 바라보는 산은 흐릿하게 보이기 때문에 아름답고 푸르다.”(13쪽)고 이야기하며, “거리를 두고 읽는 글일수록 재미있다.”(14쪽)고 말한다. 막상 가까이 가면 별 것 아닌 것일 수도 있기에 멀리서 그리워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리두기는 ‘방관’의 태도로 나타나기도 한다. “가깝고, 연관이 있다는 것은 순수하고 보편적인 지식을 방해하는 장애가 된다. 주관은 가장 삐뚤어지기 쉬우며 이와 대립하는 객관도 충분히 옳지 못하다. 방관이야말로 보편적이며 타당에 가깝다. 자연과학은 방관주의의 꽃이다.”(99쪽) 또한 감정의 거리두기는 감정을 최고조로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곧바로 표현하는 감동은 감동적이지 못하다. 가슴 속을 파고든 절절한 감명이 넋을 울린다. 이때 시도 순수한 정서를 만들어낸다.”(69쪽), “마음에 간직해두면 그리움이 커져간다.(86쪽)”

이렇게 ‘비움’과 ‘거리두기’는 새로운 사고를 위해 꼭 필요한 자세다. 일상의 것들에 집착하고, 매사를 채우고 확인하려는 사고의 방식으로는 새로운 것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유연하고 여유로운 관조적 자세가 사물을 날것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고, 삶의 여유를 가져다줄 것이다.

by 꽃다지, 2009년 9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