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게, 화려하나 사치하지 말라

 경복궁에 대한 세종의 짧지만 강력한 건축관이 담긴 말이다. <조선의 정체성>은 서울광장의 세종대왕 동상으로부터 광화문에 이르는 육조거리를 시작으로 경복궁의 면면을 살펴보는 일종의 역사기행문이다. 독특한 점이 있다면 제목을 수식하는 문장처럼 '세종과 함께 찾는' 즉, 세종의 사상과 눈높이로 경복궁을 탐구하는 방법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경복궁의 풍수지리적 입지와 조선 개국 당시 도읍을 정하는 이야기부터 광화문을 비롯한 사대문의 이름에 담긴 의미, 각 건물의 이름과 위치에 얽힌 이야기들을 세세하게 풀어준다. 재작년 경복궁 관광을 갔을 때를 떠올리며 저자가 추천하는 동선을 따라 머리속으로나마 경복궁을 둘러보는 재미는 본문에 수록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건물 이름의 유래, 의미 등을 통해 한층 배가되는 느낌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마르지 않으니

 용비어천가 중 가장 문학성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구절이다. 세종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 한글 창제의 위업일 것이다. 유네스코에 이미 세종대황문해상이 지정되어 있고, 세계 유수의 언어학자들이 한글의 우수성을 높게 평가한 바 있다. 한글 창제를 이루어 낸 세종과 그의 왕자들, 집현전 학자들이 경복궁 내의 어떤 건물을 오가며 인류 역사상 길이 빛날 한글이라는 문자를 발명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나는 학생들에게 국어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 바, 한글의 뛰어난 과학성과 편의성, 가독성과 학습의 용이성 등을 자주 접한 경험이 있다. 한글은 얼마나 우수한 문자인가. 표음문자이면서 표의문자의 성질을 가지고 있고, 단 24자만 익히면 모든 단어와 문장을 쓸 수 있으며 문장 성분간의 순서가 비교적 뚜렷하여 배우기가 쉽다. 그래도 한글이 쉽고 우수하다는 사실이 잘 와 닿지 않는다면 다음 질문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보자. "당신은 한글을 배우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한 기억이 있는가?" 물론 모국어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배우는 환경이 제공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글은 굳이 배우고자 노력하지 않아도 될 만큼 쉬운 글자이다. 만약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는 아직도 한자를 쓰고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모든 책과 신문과 TV 화면이 한자로 가득한 풍경을.

 

조선의 르네상스

 경복궁 내에는 여러 건물이 있는데, 그 건물들은 각각 특정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음식을 만들던 소주방, 의료 관련 업무를 담당했던 자경전, 미학적 가치가 뛰어난 교태전(왕비의 처소), 과학기술의 융성을 이루어냈던 흠경각, 가장 가운데 위치하며 국가의 대소사를 결정하던 근정전, 경연과 음률을 즐기던 경회루 등 각각의 건물은 하나 같이 독특한 업무를 수행하지만 역설적으로 하나 같은 미적 통일성을 갖추고 있다. 외국인에게 한국의 대표적 관광지를 소개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제주도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휴양도시의 성격이 강한 제주도보다 한국의 역사가 살아 숨쉬고, 뛰어난 문명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복궁을 추천하는 것은 어떨까. 자금성보다 먼저 지어진 소박하면서도 기품 있고, 단아하면서도 웅장한 위엄이 서려 있는 경복궁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법궁이다.

 

<조선의 정체성>과 함께 걷는 경복궁

 책을 읽으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서울까지 너무 멀어 당장 경복궁에 달려갈 수 없는 현실이었다. 본문에 많은 사진과 약도가 포함되어 있어 아쉬움을 약간은 달랠 수 있었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조선의 정체성>을 한 손에 들고 경복궁을 돌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