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그때까지 나를 추동한 힘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살인의 충동, 변태성욕 따위가 아니었다. 아쉬움이었다.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희생자를 묻을 때마다 나는 되뇌곤 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살인을 멈춘 것은 바로 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칠십줄에 접어든 연쇄살인마의 이야기에 책장을 펼치자마자 강렬한 섬뜩함이 밀려온다. 열여섯, 아버지를 시작으로 삼십년간 살인을 계속해 온 김병수는 노년에 치매를 얻었다. 자꾸만 깜빡깜빡 들어왔다 나가는 정신줄을 부여잡고자 기록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딸 은희 곁을 맴도는 박주태-개조한 사냥용 지프를 타고 심상치 않은 눈빛을 가진 그-를 경계하며 급기야 딸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살인을 계획한다.

 

김영하 작가님 소설은 임팩트가 있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이 소설도 살인자의 독백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그 심리를 들여다보고 그의 기억의 파편을 맞추어가는 과정이 몹시 흥미진진하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멘붕에 빠져버렸다. 당연히 이렇게 전개되겠지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내가 읽어주고 들어준 김병수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망상인지 혼돈에 빠지게 된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

 

처음부터 끝까지 속도감과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소설, 읽을수록 멘붕에 빠지다 급기야 반전까지... 권희철 문학평론가의 해설까지 읽고나면 다시 책장을 앞으로 넘겨 읽게 된다. 내가 놓쳤던 단서들을 다시 찾아보기 위해. 술술 읽히지만 꼼꼼히 생각하며 읽어야 하는 소설이다.

 

<인간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치매에 걸린 인간은 벽이 좁혀지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